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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효조(1956년 7월6일-2011년9월7일 사망)
10년 선수생활에서 총 타율이 3할3푼1리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것 같군요. 박철순 선수의 22연승보다는 깨지기 쉬우려나??##
http://cafe.daum.net/donghae73
김성기 조회 2408 |추천 0 | 2011.09.07. 16:27
오늘 아침 급작스럽게 ‘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던지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008년 그가 삼성팀 스카우트라는, 명성에 전혀 걸맞지 않는 미천한(?) 보직으로 야구장 언저리를 떠돌고 있을 때 안타까움 절절한 심경으로 써놨던 글인데, 오늘 하루 제 블러그에 벌써 2000명 가까이 다녀갔더군요...모두 저처럼 장효조라는 ‘천재’를 사랑했던 분들이시겠지요.
.‘야구천재의 급작스런 귀천’을 깊이 애도하면서...그에 관한 ‘잡글’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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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복(福)에 겨운 소리’라고 타박 할지 모르지만, 야구중계의 참맛은 라디오 중계에 있다는 것이 나의 오랜 지론이다.
미상불 몇 해 전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스포츠채널들 덕택에 한겨울까지 야구경기(비록 녹화중계지만)를 즐기는 호사스러운 이즈녘에도, 어쩌다 혹간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들을라치면 30여 년 전 진공관 라디오에 귀를 쫑긋 세운 채 경기에 몰입하곤 했던 빛바랜 기억의 편린들이 마치 어제 일인 양 퍼덕퍼덕 되살아나곤 한다.
물론 텔레비전은 동네 만화가게 쯤에나 가야 알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하신 몸’이었기에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시절 라디오중계는 분명 TV의 그것과는 또다른 묘미를 안겨주었던 게 사실이다.
눈으로가 아니라 머리로, 혹은 마음으로 보았기에 더욱 그러하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박종세, 이규항, 이장우, 김재영, 김용, 정도영, 유수호, 양진수, 고창근, 임주완 같은 명캐스터가 있어 그 재미는 배가되곤 했었다.
그 중에서도 내 기억의 갈피에 아직도 선명히 살아있는 대표적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이장우 아나운서와 김재영 아나운서다.
"캉-"(알루미늄 방망이로 때리다보니 대충 이런 소리가 났다) 하는 경쾌한 타구음이 들리고 나서 홈런임을 알려주기까지의 그 몇 초, 길어야 3~4초에 불과한 그 짧은 순간에 “크다!~ 크다!…”를 연발하면서 우리들 애간장을 녹여내기 일쑤였던 이장우 아나운서나,
‘타이무리히트(timely hit-적시타)’가 터지는 순간 마치 난청지역에 들어선 것처럼 고막을 찢을 듯 일거에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소음 사이로 “아~성동원두(동대문구장을 그는 꼭 이렇게 불렀다)는 완전 열광의 도가니!!”라는 단말마적 외침을 반복하던 김재영 아나운서는 당시 나의 또다른 우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장효조라는 불세출의 야구스타를 처음 만난 것도 기실 김재영 아나운서의 라디오중계를 들으면서였다.
전에 어떤 글에서 언급했듯이, 1972년 군상상고의 황금사자기 역전우승 이후 마치 열병을 앓듯 고교야구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던 나는, 야구 중계가 있는 날이면 국민드라마 ‘여로’까지 과감히 포기(?)한 채 금성사에서 만든 세로 10센티, 가로 40센티 남짓의 진공관 라디오(평소엔 아버지 머리맡에 얌전히 모셔져 있었다)에 내 모든 촉수를 곤두세우곤 했었다.
한데, 내가 중학교 초년생이던 1973년의 한여름 밤 대구상고와 배재고의 봉황대기 결승전를 라디오중계로 우연히 - 그 전까지 나는 군산상고의 경기만 골라 듣는 지독한 편식주의자였다 - 들으면서 김한근, 이승후, 석주옥, 이광은, 신언호, 하기룡 등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중 나의 뇌리에 가장 깊고 선명하게 각인된 이름 석자가 바로 장효조였다.
이 대회에서 장효조는 타격상과 최다안타상을 독식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그렇다고 그가 나의 관심을 독점하게 된 이유가 온전히 타격성적 때문이었는가 하면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오히려 “외모는 중학생같은 조그마한 선수가 어떻게 저런 타격을 할 수 있을까요…”를 연발하던 김재영 아나운서의 반복되는 찬사에 영향을 받은 바 더욱 컸지 않았나 싶다.
이를테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선수길래…’하는 원초적 호기심이 나로 하여금 그를 더 깊게 탐구하고픈 욕구를 갖게 하였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런 나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듯 그 해 가을에 치룬 배명고와의 황금사자기 결승전 연장승부에서 그는 결승점을 뽑아낸 뒤 홈플레이트에서 실신해버리는 투혼을 발휘하여 특유의 ‘승부사’적 근성을 일찌감치 만천하에 알리기도 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9월 14일자 8면 톱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구상고 장효조는 배명고와 2-2로 맞선 연장 10회 안타를 치고 나간 뒤 이승후의 중전안타 때 홈으로 필사의 슬라이딩을 하며 결승점을 올렸다. 장효조는 홈 플레이트에서 기절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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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시인 고은은 어떤 글에서 낙산사는 반드시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낙산사 뒤에 감탄사가 붙지 않으면 고유명사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내게 있어 장효조라는 선수야 말로 이름 뒤에 감탄사를 붙이지 않으면 고유명사가 되지 않는, 그런 선수였다. 때문에 장효조는 야구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내게 늘 ‘장효조!’로 남아 있었다.
기실 내가 그 면모를 처음 알게 되었던 1973년도만 해도 그는 3개 메이저대회(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에서 2번의 타격왕과 한번의 타격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통산 4할7푼5리라는 경이로운 타율로 고교야구무대를 평정했었다.
뿐이랴! 대학(한양대)에 진학한 이후에도 그의 경이로운 고타율 행진은 멈출 줄 몰랐다.
정확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아 부득이 한 인터넷 언론의 칼럼을 잠시 차용하면, 대학 입학 직후 새내기로 참가한 대학야구 춘계연맹전에서 4할대 타율로 타격랭킹 2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2학년 때는 459(159타수 73안타), 3학년 때는 437(112타수 49안타)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4년 내내 4할대 고타율을 유지하였고, 대학무대의 장․단기 리그에서 타격상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방망이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쳐낸다”는 ‘장효조용’ 우스갯소리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얼추 이때쯤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국가대표선수로서의 활약상 또한 눈부셨다.
1977년, 한양대 3학년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기 시작한 장효조는 대표팀에서 1번부터 5번까지 골고루 맡으며 ‘전전후 요격기’로서의 면모를 국제무대에 한껏 과시하였다.
준족에 작전수행능력이 뛰어나 초기에는 주로 1~2번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뛰어난 타격감각으로 이후 주로 3번을,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부터는 장타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며 4번 내지 5번을 번갈아 맡는 등 상위 전 타순을 두루 섭렵하였던 것이다.
특히 1980년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제26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2게임 연속 3점포를 쏘아올리는 등 4할대에 이르는 높은 타율로 대~한민국이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면서 '작은고추'의 매운맛과 '안타제조기'로서의 진면목을 국제무대에 맘껏 과시하기도 하였다.
내가 마치 ‘구단 관계자’ 혹은 ‘스카우트’와 같은 마인드로 장효조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던 건 그가 실업무대에 데뷔하고 나서부터였다.
1979년 봄 한양대를 ‘우수한 성적(여기서는 물론 타격성적을 말한다)’으로 졸업한 장효조는 그해 신생구단으로 자금력이 빵빵하다고 소문나 있던 포항제철에 입단하게 되었다.
하지만, 말이 ‘성인야구의 최고봉’이었지 돌이켜보면 당시 실업야구는 대~한민국의 내놓라 하는 대표급 선수들이 득시글거렸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겐 완전히 ‘버려진 자식’ 취급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 먹을 정도의 푼돈만 지불하면 김재박․이해창․김봉연․김우열․윤동균․이종도․김용희․이광은․김일권․황규봉․이선희․하기룡․정현발․서정환 등 당대의 스타들과 ‘토크'까지 즐기며 관람이 가능한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야구장엔 언제나 찬바람만 횡행할 따름이었다.
중앙 주요일간지들은 스포츠면 가장자리에 전날 경기 스코어만 우표 크기 정도로 소개할 뿐 좀처럼 실업야구 기사를 싣는 법이 없었고 야구장에서는 선수들의 고함소리만 난무하여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는 태생적으로 번잡한 곳을 기피하여 술집도 손님 없는 집만 골라 드나들곤 하던 내겐 더없이 쾌적한 관람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장효조를 큰 비용 들이지 않고 매일 볼 수 있다는데에랴…
나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동대문야구장으로 달려가서 반쯤 드러눕는 ‘되바라진 포즈’로 일광욕 즐기듯 실업야구를 즐기곤 했다.
그렇다고 아무 경기나 다 챙길 만치 한가한 신분(당시 나는 재수생이었다)도 아니었으므로 나름대로 스포츠신문을 통해 빅게임(이를테면 포철과 롯데, 포철과 한국화장품, 포철과 성무, 포철과 경리단의 경기 등)을 체크해뒀다가 해당 날짜에 경기장을 찾는 주밀(周密)함도 꾀하게 되었다.
당시 포항제철에는 장효조를 비롯하여 윤동균․이광은․배대웅․서정환․김용희․이선희 등 (당시, 엉덩이를 흔들며 타격하는 유태중이란 선수도 화제를 불러 모았지만 얼마 후 그라운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후일 프로야구를 쥐락펴락했던 대스타들이 즐비했는데 장효조는 3번타자였고 윤동균이 4번타자였다.
한데, 첫날 장효조의 타순 때 TV에서는 잘 잡히지 않던 특이한 장면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타석에 들어선 장효조가 투수에게 오른손을 들어 기다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왼쪽 스파이크 밑창으로 땅바닥을 열심히 파헤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작업(?)은 매 타석 때마다 마치 종교의식(儀式) 치르듯이 반복되던 행동이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터파기 작업’이 맞춤하게 이뤄졌다 싶을 때 그는 비로소 그 곳에 왼발을 밀착시킨 뒤 정연히 타격자세를 취하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윤동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움푹 파인 구덩이를 되메우는 일이었고 이에 관중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오곤 했지만, 장효조의 그 독특한 의식(?)은 그가 매 타석마다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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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27일 드디어 프로야구가 역사적인 개막의 빵빠레를 울렸다.
그러나 장효조는 김재박․최동원․선동열․한대화 등과 더불어 그해 가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관계로 보류선수로 묶여 프로데뷔를 다음 해로 미뤄야 했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으로 대표되는 그 대회에서 4번타자로 활약하였던 장효조는 우승이라는 값진 선물을 안은 채 이듬해인 1983년 연고구단인 삼성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드디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4월 3일. 해태타이거즈의 재일동포 투수 주동식을 상대로 2루타를 ‘제조’해낸 것을 시작으로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에 걸맞게 시즌 종료 때까지 쉼없이 안타를 ‘제조’해냈다.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스타들이 총 망라된 -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프로야구 원년으로 기록됨직 한 -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그는 타격왕 타이틀을 비롯한 타격 4개 부문(최다안타, 출루율, 장타율) 타이틀을 독식하였다.
뿐더러 득점 2위, 타점 3위, 도루 4위, 홈런 4위 등 타자에게 주어지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랭킹 5위 안에 드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였다.(그 기록들 속에는 8연타석 안타, 3연타석 홈런 등 그만이 가능하였던 ‘숨은 보석’같은 기록들도 곳곳에 박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해 MVP는 커녕 신인왕 타이틀조차 챙기지 못했다. ‘장효조가 어찌 신인일 수 있는냐’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논리 때문에….
그리고 이듬해부터 롯데 이적 첫해인 1989년까지 일곱 시즌 동안 평균 342라는 가공할 타율을 유지하며 다시 3회의 타격 1위와 5회의 출루율 1위라는 눈부신 기록을 그의 이력에 추가하였으며, 결국 통산타율 331라는 빼어난 기록을 야구사에 남긴 채 1992년 시즌 폐막과 함께 영욕의 그라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돌이켜보건대, 그는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분명 ‘달인(達人)’의 경지에 올라선 인물이었다.
한국 야구사에서 수많은 타격의 고수들이 명멸하였지만 장효조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프로무대를 떠날 때까지 줄곧 타격 1위 자리를 마치 ‘내 것’인 양 도맡아놓고 차지하였던 선수는 일찍이 없었다.
타고난 선구안에다 가공할 배트스피드와 근성, 게다가 결 따라 치는 타격기술(일명 부채살 타법)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천상의 타자’였다.
장효조의 가장 큰 장점은 타석에서의 뛰어난 집중력이었다.
그는 타석에 들어설 때 한 가지 코스, 한 가지 구질만을 노렸으며, 뛰어난 집중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공(실투)을 골라내곤 했다.
원하는 공이 아니면 한가운데로 쏠리는 공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혹자는 장효조가 삼진을 많이 당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지만 그는 3.3경기당 한번 정도씩 삼진을 당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3연전을 모두 쫓아다니다 ‘운 좋으면’ 한 번 정도 그가 삼진 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늘 자신의 타이밍과 포인트에 맞춰놓고 타격에 임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뛰어난 집중력이 뛰어난 선구안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장효조는 본시 열악한 신체적 조건을 전광석화같은 배트 스피드로 커버하여 파워히터로서의 면모(대표팀에서 4,5번을 친 적이 여러 번 있었다)도 가지고 있었으나, 프로 2년차 이후부터 배트를 짧게 잡고 안타 위주의 ‘실속배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프로 데뷔 첫해 18개의 홈런으로 홈런 랭킹 4위에 올랐음에도 10년간의 통산 홈런수가 54개에 불과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장효조의 실속배팅을 상징하는 조어(造語) 중에 ‘45미터의 예술’이라는 것이 있다.
야구에서 안타가 되기 위한 거리, 즉 타석에서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그 빈 공간까지가 45m정도 되는데, 공이 딱 45m만 날아가게 힘을 조절하는 능력, 장효조는 그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공이 45m만 날아가도록 몸의 힘을 조절하기 위해 수 만 번 배트를 휘둘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요컨대 장효조는 단지 자신의 재능만 믿고 현실에 안주한 ‘게으른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불리함을 직시하고 그에 걸맞는 타격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함으로써 결국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교타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가 뭐래도 그는 한국 야구사상 최고의 교타자였다. 프로통산 331의 타율은 장효조만의 신성한 영역이다.
작은 체구에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스윙, 그리고 센서를 부착해놓은 듯한 초정밀도의 선구안, 장효조가 스윙을 하지 않는 공은 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구안은 타인과의 비교자체를 불허하였다.
하지만…생각해보면 이렇듯 한국 야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큰 획을 그은 독보적인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價値)가 온전히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주는 선수가 또한 장효조다.
선수시절 활약도에 비해 유난히 상복이 없었던 것이 그러하려니와 은퇴 이후에도 네임밸류에 걸맞는 비중 있는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행보들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죄다 장효조 스스로가 유발(?)한 측면이 무엇보다 크다는데 ‘비극’은 숨어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워낙 빼어난 타자였던 데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고교시절부터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늘 1등을 도맡아 왔던 우등생이었기에 오히려 ‘존재감’이 없었던 선수가 장효조였다.
실제로 그 시절 그가 타격 1위에 오를라 치면 대부분의 매스컴과 야구팬들은 ‘또야?’ 하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하여, 3할대 밑으로 내려온 성적이 되레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만치 경이로운 기록들을 너무 많이 쏟아 냈기에 오히려 그 모든 기록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게끔 만들어 놓은 ‘주범(?)’이 그 자신이었다는 역설 또한 성립되는 것이다.
오호라!~ 너무나 공을 잘 쳐서 되레 존재감이 없었고 너무나 야구를 잘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덧 기억의 저 편에서 전설로 남으려고 하는 남자, 그가 바로 ‘타격의 달인’ 장효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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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년부터 프로야구를 쭉보면서 지금까지삼성을 응원하고있지만 갑작스런 죽음에 놀라고 고인이 되어버린
장효조분께 깊은애도를 표하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않을 기록은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것 같습니다
네.... 제가 61년 생입니다.
그러니까 1983년도 프로야구 원년 일때 제 나이 23살때 였습니다
그때 저도 소의 풀을 뜯기면서 라디오로 야구를 들었던 기억이 아스라이.... 그리고 달콤하게 스며듭니다.
저보다 몇년 선배들은 더 절실하게 느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