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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헤겔 연구는 현재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연구와 더불어 활발한 양상을 보이며 국제적 현상으로서의 헤겔 연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일본에서의 헤겔 연구는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자를 후자로부터 나누어준 것은 헤겔 철학의 생성기반과 수용 주체인 일본의 문화적 기반의 이질성, 즉 초월적인 일신교로서의 유대-기독교 전통에 의거한 유럽의 정신풍토와 비초월적인 다신교로서의 신도 애니미즘의 전통에 침윤된 일본의 정신풍토의 구조적 이질성에 놓여 있었다.
이전의 헤겔 철학은 초월적인 일신교로서의 유대-기독교의 교의내용을 표상을 개념으로 다시 짜는 방향에서 철학으로 조직한 '변신론'의 체계이자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이었다. 이와 같은 것으로서 헤겔 철학은 일본의 정신풍토에서 본질적으로 '타자'로서의 성격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를 타자로서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문화의 수용방식으로서 채용되어 온 '화혼양재(和魂洋才)' 방식으로부터의 부정적인 전환이 불가결하며, '화혼'이라는 이름의 일본문화의 원체질에 대한 자기부정적인 자기지양 없이는 이 문화를 타자로서 평가하는 눈을 기를 수 없다. 일본에서의 헤겔 연구는 원리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자기부정적인 자기지양을 일본문화에 촉구하는 의의를 짊어지고 있다.
일본에서의 헤겔 연구를 역사적으로 회고하는 경우, Ⅰ. 1880년대 전반~1920년대 중엽(메이지 10년대 후반~다이쇼 시기), Ⅱ. 1920년대 후반~45(쇼와 초기~패전), Ⅲ. 45년 이후(전후)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Ⅰ. 이 시기에 독일 철학의 수용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강단철학'이 확립된다. 1880년대 전반 영국과 프랑스계의 철학사상은 자유민권사상과 혁명사상의 온상이라는 것이 메이지정권에게 자각되어 이에 사상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유교윤리(봉건적 교학 이데올로기)의 부활이 시도됨과 동시에 독일 철학의 적극적인 도입이 권장되었다. 이때부터 90년대 전반에 걸친 시기가 독일 철학 수용의 창시기에 해당된다. 90년대 중엽부터 1900년대 전반에 걸친 시기가 그 제2기에 해당되며, 제국 대학을 거점으로 한 강단철학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제3기, 특히 1910년대에는 신칸트학파의 철학 연구가 왕성해졌다. 독일 철학 연구는 칸트 철학 연구가 주류이고 헤겔 철학에 관한 연구는 아주 적었다.
헤겔 철학이 연구되게 된 것은 페놀로사(Ernst Francisco Fenollosa 1853-1908; 1878-86 도쿄 대학에 재직)가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류의 진화론에 의거하여 헤겔에 관해 강의를 한 이후의 일이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 헤겔 철학에 관한 지식도 점차 보급되고 있었지만, 진화론 또는 불교적 형이상학에 의거한 이해라는 점이 이 단계의 특징이었다. 『철학연적(哲學涓滴)』에서의 미야케 세츠레이(三宅雪嶺(雄二郞))의 이해는 전자의, 기요사와 만시(淸澤滿之)의 '현상 즉 실재론'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Ⅰ의 시기의 연구 성과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나카지마 리키조(中島力造) 『헤겔 변증법』(91), 저자 이름이 없는 논문 「헤겔의 변증법과 동양철학」(92, 『철학회잡지』), 모토라유 지로(元良勇次郎) 『헤겔의 존재론에 관하여』(1909), 기히라 다다요시(紀平正美) 「헤겔 철학과 그 번역에 관하여」(05, 『철학잡지』). 번역으로서는 시부에 다모츠(澁江保) 역 『역사연구법』(1894), 기히라(紀平) · 오다기리 세츠타로(小田切良太郎) 역 「헤겔의 철학체계」(『엔치클로페디 논리학』의 중간까지. 05, 『철학잡지』). 그밖에 법학자 · 국가학자에 의한 연구로서 『법학협회잡지』에 게재된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愼吉) 「국가학사에서 헤겔의 지위」(04),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헤겔 법률철학의 기초」(05), 도미즈 히론도(戶水寬人) 「헤겔의 학설」(08) 등이 있다.
Ⅱ. 칸트 철학을 대신하여 헤겔 철학 연구가 철학계의 주요동향이 된 것은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에 걸친 쇼와 초기이다. 헤겔 연구가 급격하게 활황을 보이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이 있었다.
하나는 1931년이 헤겔 사후 100주년이어서 사후 100년 기념제의 거행을 준비한 독일, 유럽의 철학계에서의 '헤겔 부흥'의 추세였다. 30년 헤이그에 본부를 두는 '국제헤겔연맹'이 결성되고 31년 일본지부도 설치되어 이 지부로부터 『헤겔과 헤겔주의』(31), 『스피노자와 헤겔』(32), 『헤겔 철학 해설』(31)이 간행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에서의 헤겔 연구는 국제적 현상으로서의 헤겔 부흥이 일익을 담당하는 형태로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유럽에서의 헤겔 부흥이 마르크스주의와의 대결 지향을 감추고 있었던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쇼와 초기의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대두한 것이었다. 일본 철학계는 마르크스주의에 세계관적으로 동조할 것인가 아니면 대결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 압박되어 아카데미 철학계는 마르크스주의와 대결하는 방향에서 헤겔 철학 연구로 나아갔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는 "밤이 깊도록 마르크스를 논하거나 마르크스 때문에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인다"고 노래하고(29), 다나베 하지메(田辺元)는 마르크스주의와 대결하기 위한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로서 '변증법'을 자기의 것으로 하기 위해 헤겔 연구로 향했다.
이 시기에 비판적 변증법, 유물적 변증법, 존재론적 변증법, 사변적 변증법, 즉물변증법, 무의 변증법 등 다수의 변증법 논리가 제창되었지만, 이것들은 헤겔 변증법의 체계적 해석에서 산출된 것이자 각각의 제창자의 체계적 입장을 언표하고 있었다.
헤겔 연구가 얼마나 활황을 보였던가는 헤겔 철학에 관한 잡지 논문이 25(다이쇼 14)년 이후 급증하고, 30-31년 두 해에만 약 70편에 달하는 것으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다. 29년과 31년에 잡지 『이상』과 『사상』이 각각 헤겔 특집을 편성한다. 29년은 '헤겔 연구'(4월, 『이상』), '변증법 연구'(10월, 『사상』), 31년은 '헤겔 부흥' 제1책(4월, 『이상』), '헤겔 부흥' 제2책(9월, 같은 잡지), '헤겔 연구'(10월, 『사상』). 또한 29년 이후 사이구사 히로토(三枝博音) 편집의 전문지 『헤겔과 변증법 연구』가 간행되었다.
이하에서 '교토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니시다, 다나베, 미키 기요시(三木淸), 고야마 이와오(高山岩男), 무타이 리사쿠(務臺理作)의 헤겔 연구 내지 헤겔 해석을 일별해 보고자 한다.
니시다의 해석은 앞에서 거론한 『헤겔과 헤겔주의』에 수록된 '나의 입장에서 본 헤겔 변증법'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개물이 거기에서 존재하는 '무의 장소'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헤겔(및 마르크스)의 '과정적 변증법'에 대해서 '장소적 변증법'을 제창하고, 헤겔이 변증법적 모순을 노에마적 주어적 대상면에서만 파악하고 노에시스적 술어면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일면성을 지적하는 방향에서 헤겔 비판을 전개했다.
다나베의 논문집 『헤겔 철학과 변증법』(32)은 니시다의 '절대무'의 입장을 계승하고 후기 셸링의 '신에서의 자연'의 입장을 실마리로 하여 헤겔에서의 '절대적'의 의미를 해명함으로써 '관념변증법'과 '유물변증법'을 다 같이 포섭하는 '절대변증법'을 제창했다. 미키의 「변증법의 존재론적 해명」(앞의 『헤겔주의』에 수록)은 헤겔 변증법 그 자체의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헤겔, 마르크스를 실마리로 미키 독자의 '변증법'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이자 '존재'(현실존재)와 그 '근거'(이유)인 '사실'과의 역동적 관계에 입각한 '질서의 변증법' 방향으로 스스로의 변증법을 구체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고야마의 『헤겔』(35, 서철총서)은 헤겔 청년기의 '학의 생성'으로부터 사후의 헤겔학파의 해체까지를 서술한 것으로서 이 시대의 것으로서는 포괄적인 연구였다. 그것은 헤겔 철학을 기독교의 진리를 "논리로써 개념적으로 조직하는 학"으로서 파악하고 초기 신학 논집, 『정신현상학』, 『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역사철학』, 『예술철학』, 『종교철학』, 『철학사』 등 헤겔 철학의 거의 전 영역을 개관하고 있다. 그것은 헤겔 부흥에 직면하여 헤겔 철학의 유산을 니시다와 다나베의 변증법 지평에서 계승하고자 하는 동기를 지닌 것이었다.
무타이의 『헤겔 연구』(35)는 독자적인 체계적 연구이다. 정신의 순수 '개념'과 그 '표현'인 '세계'와의 연관구조를 기축으로 하여 『정신현상학』, 『논리학』, 『역사철학』, 『철학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헤겔 철학의 비밀의 열쇠는 『정신현상학』에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Ⅲ. 전후시기의 초기 단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헤겔 철학을 '변증법'에 비추어 연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걸쳐 사회주의의 품위를 의심케 하는 사태가 기존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잇달아 발생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휴머니즘으로서의 청년 마르크스 사상에 착안하여 그로부터 마르크스 사상의 모습을 재구축하고 부활시키고자 하는 초기 마르크스 연구가 일어났다.
그에 대응하여 초기 마르크스와 관련하여 헤겔을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새로운 연구동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70년이 탄생 200년에 해당한다는 사정도 곁들여 70년대 이후 헤겔 철학을 초기 마르크스와의 관련이라는 관점을 떠나 헤겔 철학 그 자체에 입각해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동향이 대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의 지양'이라는 과제 앞에 서게 된 '현대'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보다도 헤겔 철학이 시사하는 바가 풍부하다는 인류의 예감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개관한 것과 같이 사후 150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헤겔 철학은 국제적인 규모에서 두 차례의 말하자면 '부흥'을 경험한바 있다. 이러한 두 차례의 '부흥'에는 모두 국제적인 현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동향이 깊이 관계되어 있다. 1930년대의 '부흥'에는 국제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대두'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1970년대 이후의 '부흥'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쇠퇴'가 각각 깊이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야가와 도오루(宮川 透)
첫댓글 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모든 인간 역사발전은 정,반,합이란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하죠.
어느 하나의 과정을 쭈욱 거치다가 어떤 계기로 정 반대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고,
나중에 타협점인 양쪽의 종합 단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죠.
또 그런 상태가 계속되다가 또 그와 정반대의 단계를 만나고, 또 얼마 후엔 다시
종합의 상태로 돌아가고, 또 이것이 반대의 위상이 되다가 또 뒤에 종합이 되고, 또 그것이...ㅎ
이런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서 이전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거나 줄이게 되니,
역사든, 사고든, 문명이든 점차 발전해 나감은 당연하달 것이죠.
헤겔의 이런 인식배경에는, 당연히 당시의 프랑스 혁명을 지켜본 관점이
작용한 거죠.
기존의 신분봉건질서를 단두대에 끌어올려 무너뜨리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의지를 중시한 계몽주의가 나폴레옹에 의해
전유럽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시대에, 유럽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계급에 소외된 반체제적인 입장이었으므로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고,
프랑스의 변화를 지켜보던 독일의 철학자 헤겔 역시,
이런 역사의 변혁을 두고 한 말씀 남긴 것은 당연하다겠죠.ㅎ
건 그렇고..,
일본이 서구의 압력에 밀려 개화를 해야 하던 시기에
지식층에 의해 헤겔의 주장이 열띠게 논의되었던 것도 당연합니다,
그들로서도 유럽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것 처럼, 변화의 현장 앞에 불려져 있었던 거죠.
@우명
그러니, 일본을 서구에 어떻게, 얼마만큼 벌거벗겨 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역사 변증법에 기초하여 설왕설래했음은 아주 자연스런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그만큼, 당시 일본의 문화가 개방화되었음도 알 수 있고요
위에 나오는 당시의 일본의 입장인, 화혼양재(和魂洋才)는 우리나라의 동도서기(東道西器)나
청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등과 유사한 주장들이죠.
즉 기술은 서양을 따르되, 정신만은 바꾸지 말고 지금 그대로 존속하자는...절충적 자세인데,
이 주장들이 나온 자체가 서구를 따라야만 하는, 시대변화에 대한두려움이 깔려있다는 반증이죠.
조선과 청에서는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그런 주장 조차도
@우명
구세력에 의해 선뜻 수용하지 못하고, 설왕설래, 좌충우돌, 우왕좌왕, 어영부영 시간만 끌다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한꺼번에 다 받아들여야 하여 크나큰 혼란을 겪게 되었지만요.
그러나 일본은 조선이나 청과 달리, 서구의 문물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곧 정신까지도
개혁하는 일대의 대대적인 자체 혁명을 이루어내니, 이른바 메이지 유신입니다.
일본은 그렇게, 조선과 청에 비해 반세기나 앞서 발빠르게 서구를 배우게 되어,
비까번쩍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설라무네, 그때까지도 오줌 똥 못 가리던 조선과 청을
집어 삼키려는 욕구를 드러내나니, 대동아 침략정책이 되고 말았던 것이죠.ㅎ
일본과 헤겔..잘 봤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