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4.3.5.사순 제3주간 화요일 다니3,25,34-43 마태18,21-35
“너 자신을 알라”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17,8)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양상은 다소 달라도 날마다 물어야 할 절박한 물음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생각이 있는, 의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날마다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마디 셋이 배움, 섬김, 여정입니다.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중에 날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제 소박한 소원입니다. 오늘 다산 어른의 하루에 나오는 말마디들 역시 현자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기에 지위로 구분할 수 없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가장 약한 사람이 먼저이다.”-다산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맹자
60년 이상 한결같이 생명운동에 전념해온 큰 어른 정성헌 선생의 귀띰 40가지 중 열만 인용합니다. 자기를 드려다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잠언입니다.
1.보고 싶은 사람이 되라.
2.남이 있어야 내가 있다.
3.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아껴라.
4.따뜻한 사람이 되라.
5.크고 깊은 사람이 되라.
6.마음의 스승을 모셔라.
7.욕심을 버려야 평화로워진다.
8.“오죽하면 그러겠냐”는 측은지심을 지녀라.
9.그윽하고 큰 꿈을 꾸고 말하자.
10.스스로, 함께, 꾸준히.
40가지중 10가지만 선정했는데 나머지 30가지 잠언도 금과옥조의 말씀이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도 이와 같으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무지가 큰 병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제가 참 많이 배우고 인용한 동방영성에서 특히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어제도 무지에서 파생되는 온갖 불행과 비극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나 국내의 혼란도 인간 무지의 결과임을 봅니다. 전쟁이나 약육강식의 ‘문명의 야만’이란 역설도 무지의 악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치유받아야 할 불치의 병이 무지같습니다. 무지한 인간, 부정적 사람의 정의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공부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에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데 여전히 미완의 존재로서 인생 학교 마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로 무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의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았다 취소되는 무자비한 종입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사가 공분을 일으킵니다. 그대로 무지하고 인색한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만탈렌트 한량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탕감받고 살아가는, 끊임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는 끝없는 찬미와 감사요, 이웃에게는 참으로 자비로워야 할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무한히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기에 사랑해야 하며,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의 의무, 용서의 의무입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하고 인색한 종에 대한 주인의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 대한 질책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러할 것이다.”
내가 살기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용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이 또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결국은 무지가 문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공부, 끊임없는 회개와 끊임없는 용서뿐입니다. 기도와 공부, 회개와 용서를 통한 겸손의 하느님 은총만이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바로 그 기도의 모범, 회개의 모범, 겸손의 모범이 제1독서 바빌론 유배중 불타는 화덕 속에서 기도하는 다니엘의 세 동료중 아자르야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불후의 기도가 다니엘서 3장의 아자르야와 세 동료의 하느님 찬미기도입니다. 이런 기도 역시 배워서 훈련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회개와 겸손의 기도가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자기인식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무지의 병을 온전히 치유하는 기도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아깝지만 마지막 부분이 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소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하느님께 흠숭과 공경을 다하는 하느님 중심의 참 아름답고 깊은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입니다. 다니엘서 3장 26-44절까지 아자르야의 노래기도와 이어지는 다니엘의 동료 세 젊은이들의 3장 52-90절까지 하느님 찬송, 찬양기도 역시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불가마 속에서 이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음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이었습니다.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 불가마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 찬양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은총이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우리 모두 참된 겸손의 삶을, 자기인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단적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신원을 말하면 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입니다. 이를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첫댓글 🙏 🙏 🙏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