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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에서 경찰전투의 재평가
( 경찰서 전투 중심으로 )
송유창(삼육대 교수)
목 차
I. 서 언
II. 개전 초기의 대한민국 경찰
1. 해방 이후 정부수립시까지의 경찰....................................................................
2..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전쟁 발발 당시까지의 경찰
3. 한국전쟁 발발당시 부터 휴전협정당시까지의 경찰
III. 개전 및 초기작전 에서의 비상경비사령부별 경찰의 작전
1.경기도 경찰비상경비사령부의 작전
1) 옹진반도 지역 전투
2) 개성지역 전투
3) 문산지역 전투
4)오류동지역 전투..................................................................................................
2.강원도 경찰비상경비사령부 작전.......................................................................
1)춘천부근전투.........................................................................................................
2)영월 지역 공방전................................................................................................
3)영월 재 탈환 작전.................................................................................................
4)강릉 지역 전투.......................................................................................................
3.서울시 경찰비상경비사령부 작전
IV. 개전 및 초기작전 에서의 단계별 경찰 전투평가
1. 미군정기의 경찰 평가.........................................................................................
2. 정부수립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경찰 평가..........................................
3. 개전 초기작전간 경찰전투의 평가...............................................................
V. 결 론
*참고문헌
I. 서 언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시기까지를 격동의 시대로 볼 수 있다.신생독립국가로서 인재도 부족하였을 뿐만아니라 국가 운영에 대한 경험도 일천하였다.특히 미군정기에는 미군과 언어소통의 어려움 뿐만아니라 서양 군대문화에 대한 충격이 더 컷을 것이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으로 분단된 채 남북한을 점령한 미.쏘는 각국 나름대로의 자국 이익을 위한 한반도 씨나리오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한민국과 북한 또한 각각 나름대로 이념이 다른 계산속에서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한 경주를 하고 있었다.북한은 쏘련에 의해 일찌감치 지도자의 선정이 내정(?)된 셈이지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민주적 절차에 의한 지도자 선택이 남아 사회는 더욱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생긴 국가기관인 경찰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먼저 미군정기에는 경찰의 최고 기구를 독립부처인 경무부(警務部)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인 대한민국은 미군정에 의해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친탁.반탁의 시위에 이어 끝없는 이념투쟁으로 좌익세력의 반란과 폭동으로 나라가 온통 무질서 천지였다.그러나 미군정은 창군기의 군대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진압하기위해서는 경찰 조직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따라서 경찰은 경무부로 창설되기가 무섭게 반란과 폭동 현장에 출동하여 좌악세력을 배제 시키기가 바빴다.그러다보니 경찰은 본연의 임무인 민생안정을 위한 치안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군대 또한 일본,만주,중국과 기타지역에서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하던 각양각색의 신분들을 모아서 미군에 의해 새롭게 창설되고 있었던 시기였다.이 시기에 오로지 해방된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조직은 경찰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경찰은 경무부에서 내무부의 일 개국인 치안국(治安局)으로 조직이 격하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반란과 폭동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신생독립국가의 체제안정까지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경찰을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준전시체제로 조직하면서 경찰에 의한 의존도는 더 심화되었다. 한편 경찰조직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경찰의 양적 증강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전시체제편이라는 명목으로 약 7만여명에 달할 정도로 평창을 하였다.
또한 경찰을 반란과 폭동 진압을 위해 준전시체제 유지라는 명목으로 치안국과 각 도경찰국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뜻밖에도 이러한 노력은 마치 한국전쟁을 사전에 대비하기라도 한 것 같이 전시에 경찰을 국군과 대등한 전투를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 구체적인 예가, 첫째 상급제대(치안국,도경찰국)에다 비상경비사령부를 발족하여 좌익세력의 반란과 폭동을 진압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반란사건에 연이어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이 일어나자, 내무부 치안국은 이 일련의 사태를 중시하였다.따라서 공산당에 의한 국내 치안교란사태에 대비하고자 1948년 10월 하순에 치안국에 경찰총비상경비사령부로, 각도에는 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둘째로 하급제대 보강을 위해서는 1949년 9월 2일 총경비사령부 예하에 1개 중대 규모의 특별기동대를 편성하였으며,1950년 4월 15일 경찰 간부 24명을 육군보병학교에 입교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어 이들을 중심으로 1950년 4월 20일 제8,9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여 제8대대를 강원도 영월과 장성 일대에,제9대대를 남춘천에 배치하였다.이들의 대대병력 규모는 496명이었다.이와 같은 노력들은 마치 한국전쟁에 대비하여 경찰이 국군과 대등하게 전투를 할 수 있는 전투부대를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전쟁 기간 경찰의 운용을 보면, 전쟁 이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형태로 조직되고 운용되었다면,전쟁기간에는 반대로 경찰서별로 “임무형 분권화체제”로 운용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기습 남침시 전투를 실시한 경찰서의 입장에서 보면 총경비사령부나 도경비사령부로부터 지휘통제를 받을 수 있는 지휘통신장비가 마련되지 못한 시대였다. 또한 시.공간적으로도 도비상경비사령부가 각 경찰서를 지휘통제 하기가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그 당시 경기도 예하에는 21개 경찰서,강원도는 12개의 경찰서로 편성되어 있어 평시가 아닌 전시에는 이들을 지휘통제하기에 지휘폭이 초과된 상태로 볼 수 있다. 또한 비상경비사령부 조차도 국군과 작전계획이나 상황을 서로 공유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전투를 실시하고 있는 경찰서에 경찰비상경비사령부가 제공 할 수 있는 적에 대한 정보나 작전지침을 줄 수가 없었던 상황이다.비선형으로 전개되는 전선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투력으로 생사를 걸고 싸우는 전투에서 최소한의 공간을 양보하여 최대한의 시간을 벌게 함으로써 후방의 국군 증원부대가 새로운 전투준비 할 수 있도록 해준 성과 만으로도 최상의 경찰역할로 평가 받아야 될 것이다.
그러나 전방의 접적지역 경찰서는 비상경비사령부와 달리 “임무형 분권화체제의 전투”를 수행하였던 것이다.우선 자신의 경찰서 책임지역으로 적이 기습 공격함으로서 강요에 의한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찰서는 도비상경비사령부의 작전지침이나 지원 하나 없이도 먼저 철수하거나 적을 피하지 않고 싸웠다. 경찰서장을 중심으로 한결같이 북한의 정규군에 비해 인원,화기와 장비가 비교 되지않을 정도로 열세인데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강릉경찰서의 경우 적의 침입을 군보다 먼저 발견하여 관내에 배치된 군작전부대인 8사단에 통보한 후에 군경합동작전을 실시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최전방의 접적지역 경찰서가 비상경비사령부의 작전지침이나 지원없이 북한군의 정규군과 대등하게 싸울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정신전력면에서는 해방 후부터 전쟁전까지 수많은 좌익세력의 반란과 폭동 진압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정신무장을 강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관내의 익숙한 지형숙지가 적의 접근로 판단과 위협분석에 유리한 역할을 하여 병력을 절약하게 하였을 것이다.또한 책임지역 국군의 작전부대와는 전쟁 전부터 38선을 수시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함께 저지하던 경험이 효과적인 군경합동작전수행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각 종 주부식 및 기동수단 등 소요되는 전투근무지원 또한 평시부터 관내 주민과들과의 유대강화가 제반 문제를 해결해 주었리라 생각된다.이와 같은 요소들이 상급 제대나 타기관의 지원없이 경찰서별로 독립된 ‘임무위주의 분권화 전투’를 가능 하였다고 분석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동안 이승만은 전시체제로 편제된 경찰을 이용하여 정치적 파동을 일으켜 초헌법적 지위를 장악 하였다.이는 경찰이 정치화되는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간 국군의 경우는 전쟁수행한 주체라는 명분으로 대한민국이 전 역량을 총 동원하여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전투부대만 해도 UN 16개국이 지원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경찰서들은 최전선에서 북한군과 상대가 되지 않는 장비와 인력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옥쇄(玉碎)의 정신으로 곳곳에서 적을 지연시킴으로써 한국전쟁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한국전쟁간 군(軍)은 전쟁을 주도하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국군은 전투기록을 활발히 연구하여 전사(戰史)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에, 경찰들은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대등한 전투를 하였음에도 국군에 비해 그 헌신이 많이 가려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는 한국전쟁에서 경찰들이 전쟁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경찰 스스로가 그 역할에 대한 평기를 소홀히 한 점은 없었는 지도 반성 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이런 의미에서 선배경찰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역사를 발굴하는 연구가 더 활발해졌으면하는 바램이다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경찰은 초기전투에서 국군과 함께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었다. 또한 전투제대는 경찰의 특성상 전방 접적지역에서 경찰서 중심으로 싸웠음을 볼 수 있었다.따라서 ‘한국전쟁 초기전투에서 경찰이 경찰서별로 어떻게 북한군과 싸웠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이다.
II. 개전 초기의 대한민국 경찰
1. 해방 이후 정부수립시까의 경찰
미 군정초기 경찰의 주요 임무는 ‘좌익 척결을 통한 정부수립’이었다. 미군정시대의 경찰조직은 1945년 10월 21일 경무국을 창설되었고,1946년 3월 경무부로 승격 및 개편되었다. 이 시기에 미군들은 해방 후 신생독립국가의 치안유지를 위한 통치수단과 함께 군정의 보조기관으로 경찰이 가장효과적인 조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미군정은 해마다 적자에산을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경찰 기구를 설치하고 기존의 조직을 확장하였다.1945년 12월 27일 경무국 고문인 W.H 메클린 헌병대령이 서명한 ‘조선국립경찰의 조직에 관한 건’이란 문서에 경무부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혼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경찰은 국방사령부의 지휘·감독을 받았는데, 이시기에 경찰도 일종의 전투부대로 조직이 편성되는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경찰은 시·도지사로부터 분리되어 시·도 경찰부장이 관내의 질서유지책임을 지는 것 외에는 경찰의 조직과 인사 및 재정 등에 관한 권한을 관장하다가 도경찰부는 1946년 10월 관구경찰청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선진 미국의 경찰제도를 준용하는 선진국 경찰제도로 발전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였다.통행금지 시간 단축,제복.제모.흉장.표찰의 착용,경찰봉 휴대,경찰가의 제정,감찰조직의 강화 등 민주주의 이념에 따른 경찰개념이 강조되면서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의 보호가 경찰의 역할과 활동이 되었다. 따라서 미군정은 군대보다 경찰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고, 경찰에게 보다 큰 임무를 부여하면서, 미국식 무기와 제복이 먼저 지급되었다. 국방경비대가 일본군의 제복을 입고 99식 또는 38식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던 반면에 경찰에게 칼빈 소총을 지급하였다.이 시기에는 경찰은 칼빈 소총으로 북한의 음모와 좌익세력의 잔인한 총뿌리로부터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 섰다.
2..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전쟁 발발 당시까지의 경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경찰의 임무는 ‘치안과 국방‘이었다.신생정부 존립을 위협하는 유격대를 토벌하는 것과 38선을 경비하는 것이었다.이를 위해 준군사화하는 노력 또한 꾸준히 지속되었다.그러므로 경찰의 전투는 당시 상황에서 특수한 임무로 받아들여졌고 준군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전까지 지리산,태백산과 오대산외 지구에서 빈번히 출몰하는 유격공비(遊擊共匪)를 소탕하는 국내 토벌작전 임무가 정부수립기 경찰의 주요임무 가운데 하나가 된 셈이였다.
정부수립 직후 경찰 조직은 경무부를 치안국으로 격하시켜 내무부의 지휘.감독을 받는 보조기관으로 전락시켰다.또한 내부적으로는 내무부 산하의 치안국 체제로 격하되었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자주적인 입장에서 경찰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각 시·도에는 시장 또는 도지사의 보조기관으로 경찰국이 설치되었다. 한편 당시 좌익 극렬분자의 반란, 파업, 폭동과 공비진압을 위해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대응하였다.
북한 인민유격대의 침투는 1948년 11월 14일의 1차 침투를 시작으로 1950년 3월 28일 까지 1년 반 동안에 10회에 걸쳐, 2,345명이 침투하였다.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이중 2,000여명을 사살 또는 생포되었다(윤장호, p.73). 6・25전쟁 이전의 적 유격대 활동은 갓 건국된 대한민국 단독정부에게 실질적인 정부 존립을 좌우하는 위협요소로 대두되었다. 이에 경찰은 ‘치안의 실지 완전회복’을 위한 유격대 토벌작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군경합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러한 시기에 미군의 제6.7사단이 대한민국에서 철수하기 위하여 먼저 38선 경비를 한국군에 인계하는 시기였다.미군이 남긴 경비시설은 주요 간선도로에 경비초소와 콘세트 막사가 전부였으며 전술적인 방어시설이나 장애물은 없었다.이러한 미군과 함께 1948년 말까지 38선경비를 담당한 것은 경찰이었으며,1949년 말에서야 미군대신에 국군과 더불어 38선을 경비하게 되었다.
또한 일선 경찰부대에 대한 장비강화를 위해 중화기류에 속하는 기관총・박격포 등의 긴급 보급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경찰은 단지 카빈총으로만 무장을 했기 때문에 이들은 소총을 보유한 북한군의 손쉬운 표적이 되므로 경찰에게 충분한 소총을 보급해 줄 것을 미국에게 요구하여, 한국전쟁 직전에 카빈총 1만 8천여 정을 보유하게 되었다.(경찰종합학교 50년사, p.89)
이시기는 조국재건(祖國)再建)이라는 큰 사명을 앞두고 치안 확보가 경찰 조직의 무엇보다도 긴급한 일이였으며, 이와 같은 절대적인 요청에 따라 무질서,혼란과 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확보하기위하여 창설된 것이 국립경찰이었다.따라서 해방직후 사회혼란과 무질서를 잡고 좌익세력의 폭동과 반란 뿐만아니라 한국전쟁 직전에 남침을 기만하기 위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북한군의 38선 도발을 막는 가장 필요한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3. 한국전쟁 발발당시 부터 휴전협정당시까지의 경찰
한국전쟁 발발시점에는 내부적으로는 좌익세력들과 게릴라들의 활동과 38선일대에서 적교란 활동이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따라서 경찰의 임무는 전투와 구국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남침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전투임무 외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의 보호라는 본래의 사명이 경찰에 부여되었다. 이시기의 경찰 조직은 내무부 및 치안국의 지휘.통제를 받았지만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잘 편성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전쟁 중 후방지역(後方地域)에서 주도적인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 즉 전쟁초기에 일부 경찰은 전선에서 군을 지원하여 방어하면서 치안을 유지하였고,후방에서도 안정적인 치안유지와 피난민 철수 통제임무등을 수행하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군을 지원하며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전쟁초기에 후퇴하던 경찰은 치안국 산하 비상경비사령부에 의해 재편되어 일부는 군의 지연작전에 참가하였으나,대부부는 후방지역 안정을 위한 활동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치안국은 경찰병력이 개전당시 25,000여명이었으나 7월 중순 시점 13,000 여명으로 감소되자,전투에 투입되는 경찰병력을 양성하기위하여 경찰전문학교를 전시교육대로 편성하여 전투교육과 전술훈련을 시켰다.때로는 군에 요청하여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경찰전문학교는 당시의 전황에 따라 대구,서울.부산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간부후보양성에 주력하였고 통신기능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통신요원을 선발하여 교육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북한의 기습을 받은 군도 그러하였지만 내무부 역시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통제 및 전시운영계획이나 주민통제계획 등 전시전환을 위한 준비계획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국가안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육군본부)와 경찰연락관을 파견하여 전선상황을 공유하는등 적극적인 군과의 공조하는 노력없이 대부분의 작전과 상황을 단독으로 처리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7월8일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안국에서는 7월 11일 ‘불순자 검거건’을 전국 경찰에 하달하였다는 것은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은 일천한 정부수립의 역사에서 일어난 초유의 비상사태 속에서 정부차원의 훈련이 부재했고 간부들의 경험 또한 부족한 상태에서 온 안타까움으로 봐야할 것이다.조금 더 적극적으로 국방(국군)부와 전쟁간 작전을 협조 하였더라면 경찰의 전투는 더 성공적이였을 것이고,무명의 산하에서 운명을 달리하신 선배 영령(英靈)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III. 개전 및 초기작전 에서의 비상경비사령부별 경찰의 작전
1950년 6월 24일 당시, 국군과 북한군의 편성부대 및 병력은 출처마다 숫자가 다소 상이하나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표 1)에서와 같이 남한과 북한의 무기 및 전투장비는 1:2의 수준, 전투 병력에 있어서는 1:2.6으로서, 국군이 더욱 열세하였고 병력 구성과 훈련 수준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표 1) 6·25전쟁 시 남한과 북한의 무기 및 전투장비
구분
국군
북한군
지상무기
야포
·105㎜ 곡사포 : 88문
·야포 : 970
(122㎜ : 172, 76.2㎜ : 380,
·76.2 자주포 : 176
전차
0
·T-34전차 : 242
대전차포
·57㎜대전차포 : 140기
·45㎜대전차포 : 1,142
박격포
·박격포 : 960문
(60㎜ : 575, 81㎜ : 384)
·박격포 : 2,318(61㎜ : 1,142,
82㎜: 950, 120㎜ : 226)
장갑차
·장갑차 : 24대
·장갑차 : 54
고사포
0
·85/37㎜고사포 : 36
함정
·전투함 및 소해정 : 28
·수송선 및 기타 : 5
·전투함 및 소해정 : 30
·수송선 및 기타 : 5
항공기
·연락기 및 연습기 : 22
·전투기 및 연습기 : 211
출처 : 전쟁사 제1권, 국방부, 1967. pp.109~110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비상체제로 돌입하였다. 경찰은 남침 상황을 접수받자 치안국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1948년 10월19일 여순반란사건 이후 운영된 바 있던 비상경비체제로 전환하여 경찰을 지휘하였다. 1949년 9월 2일 1개 중대 규모의 특별기동대를 편성하였고,1950년 4월 15일 경찰 간부 24명을 육군보병학교에 입교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1950년 4월 20일 제8,9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여 제8대대를 강원도 영월과 장성 일대에,제9대대를 남춘천에 배치하였다.이들의 대대병력 규모는 496명이었다.
경찰은 6월 9일에 북의 남침에 대비하여 38선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경찰국에 “갑호비상근무령”을 발령하여 비상경계에 들어가 있던 중 6.25남침을 맞이했다.전쟁이 발발하자 38도선 접경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도경찰국)과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도경찰국)은 군과 마찬가지로 바로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찰의 초기작전 결과는 국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6·25전쟁 초기작전에서 경찰의 헌신이 6·25전쟁 전반에 걸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경기도 경찰비상경비사령부의 작전
경기도 비상사령부(사령관 경무관 이영하)가 담당했던 지역은 21개의 경찰서로 편성되어 있었다.그 중 11개의 경찰서가 접적지역의 경찰서이며 국군 제17연대와 제1사단,그리고 제7사단 방어지역이었다.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 주작전지역은 옹진반도와 개성~문산 지역이다. 옹진반도 공격을 위해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한 인민군 제6사단 예하 1개 보병연대와 제3경비여단에 맞서 국군 독립 제17연대가 수행한 작전이다.
개성-문산지역 전투는 203전차연대(-)예하 27여대의 전차에 자주포 27대로 증강한 제6사단(-)과 1사단으로 김포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인민군 조공축선으로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한 전투를 말한다. 당시 서부지역에서 초기전투는 병력과 부대규모와 편성장비 면에서 열세인 국군과 경찰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초기부터 악전고투하였다.
1) 옹진반도 지역 전투
옹진경찰서는 당시 제17연대와 함께 전투를 한 경찰서 였다. 육군본부에서 하달된 옹진반도의 작전형태별 방어지침 제3호는 “적이 전면적인 남침을 전개할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 다음, 해군의 지원을 받아 해상으로 철수 한다”는 것이었다. 옹진반도전투는 (그림 2)에서와 같이 국군 17연대가 T-34형 전차 1개중대로 증강된 인민군 제6사단 14연대와 인민군 3경비여단과 맞서 치른 방어전투이다.(1129일간의 전쟁 6·25, p.91)
국군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45km에 달하는 광 정면에 2개 대대를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한 전형적인 방어형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곧 2~3일 전부터 심상치 않
(그림 1) 6·25전쟁 북한군 공격계획
출처 : 육군 군사편찬연구소, ‘북한군 남침계획’, 2005.
았던 적정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연대장은 6월 24일부로 3대대에 105mm 곡사포 1개 중대와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를 배속하고 예하 각급 부대와 옹진경찰서에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도록 지시하였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04:00시에 국군 17연대 정면에 사전 공격준비사격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17연대는 6월 23일부터 적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고 대비하였으나 초기작전간 좌전방의 1대대장이 전사하고 이어서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국군 17연대 연대본부 및 직할부대와 3대대는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포항으로 철수하여 7포병대대의 105밀리 곡사포 등 전투 장비를 파괴하고 해군수송선과 민간선박을 이용하여 인천으로 철수하였다.(1129일간의 전쟁 6·25, p91) 한편 완강한 방어를 계속하던 2대대는 역습에 성공하였지만 전황이 급변함에 따라 1대대와 직할대 및 지원부대의 낙오 병
력을 수습하면서 사곶항에 도착하였지만 해상철수 수단이 없던 차에 용호도 지서주임 김두
(그림 2) 옹진반도 전투
출처 : 나무위키 옹진반도 전투
의 경사의 주선으로 20톤급 기관선으로 정원 90명이 탑승 가능한 대성호를 지원받아 다음날 아침까지 군인, 경찰과 피란민이 해상으로 철수하여 군산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한국전쟁 간 국군 17연대의 활약 뒤에는 민간선박을 동원하여 옹진반도 철수작전을 성공시켜 연대의 전투력보존에 기여한 기억되지 않는 경찰의 역할이 있었다. 전시에는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도 중요하지만 상급부대 계획에 의해 지연전 및 철수작전 역시 대단히 중요하며,초전 전투력 보존은 향후 전투력발휘를 위한 전역작전 개념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옹진경찰서 경찰관중 6·25전쟁기간에 전사한 경찰관은 23명이며 1950년 6월 25~26일 양일간 전사한 옹진서 경찰관은 15명(경기경찰사, p.1183)인데 안타깝게도 경찰의 세부전투 사례는 전해지지 않는다.
2)개성지역 전투
개성~문산 지역은 서울로 통하는 관문으로 백선엽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은 약 94km의 광 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개성에 12연대, 고랑포 일대에 13연대를 배치하였고, 제1연대를 예비로 사단사령부와 같이 수색일대에 배치하였다.
청단경찰서(李鐘鎬) 경감)는 북한군 침공소식을 듣고 일상적으로 있어 왔던 국지도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삽시간에 사태가 급박하게 진전되자 경찰 병력을 향산(香山)고지와 마탑(馬塔)고지에 배치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저항하다가 25일 늦은 시간에 해상으로 탈출하였다.경찰 부대는 적 30여 명을 사살하고 3명이 전사하였다.
연안경찰서(金周文 경감)는 25일 남침소식을 듣고 전투태세에 들어가서 건지산(乾支山)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가 비봉산(飛鳳山)에 있는 제12연대 3대대(이무중 소령)와 합류하여 석양무렵까지 군과 합동작전을 펴다가 19:00시에 해상으로 철수하였다.군경합동부대는 적 100여명을 사살하고 경찰관 5명이 전사하였다.
백천경찰서(崔正得 경감)는 남침 급보를 받고 경찰서 주변고지에서 급편방어진지를 마련하고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다.먼동이 틀 무렵 적이 접근하자 기관총 2정을 비롯한 전 화력을 집중하여 사격하자 한때는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증강되는 적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제12연대 9중대와 합류하여 지연전을 펴다가 18:00시에 군과 함께 철수하였다.경찰관 12명이 전사하고 적30여명을 사살한 것으로 추산했다.
개성철도 경찰대(甘鳳龍 경감)는 당시 개성역 구내에 본부가 위치해 있었고 개성철도경찰대 50여명 대원은 대장 감봉룡 경감 지휘로 용전분투하였다.당시 개성방면에서는 04:00시부터 30분간 포격이 시작되었고, 북한군 1개 연대는 개성 후방 송악산 방향에서 정면으로 공격하고 1개 연대는 열차를 이용하여 경의 본선을 따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06:00시경 개성 역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새벽부터 전방에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피난길에 나선 주민들, 휴가나 외출을 중지하고 복귀하는 국군 제1사단 12연대 소속 일부 병사들로 인해 역 구내는 혼란한 그 순간 한 열차가 개성 역 구내로 천천히 진입했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열차로 접근하는 민간인과 군인들 에게 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북한군들이었다.
그 결과, 앞 뒤 양면에서 공격을 받게 된 아군은 혼란에 빠지고 병력은 분산되었다.
(그림 3) 개성(연안)·문산지구 전투
출처 :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14. p92.
북한군이 몰래 철도를 연결하여 남침개시와 동시에 북한군을 태워 돌진함으로써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개성시내에 북한군이 열차를 이용하여 진입했을 때 국군과 경찰병력은 전방초소로 투입되었고 개성시내일대에는 개성철도경찰대만 있었다.
감봉룡 경찰대장은 25일 적의 포성에 상황을 직감하여 05:30분에 대원들을 비상소집하여 적의 공격상황을 설명하고 경비주임 홍이화 경위로 하여금 부대 경찰병력으로 본부 뒷산과 본부 및 철도건물을 경비하여 침입한 적을 격퇴하도록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사찰주임 박준석 경위에게는 사복대원 2명을 합동정보본부에 파견하여 수시로 변동되는 상황을 본부에 유선으로 보고토록 하고, 대원들을 요소에 배치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어 본부 건물 중심으로 사수하기로 결심했다.(한국경찰사Ⅱ, p.249) 철도경찰대원들이 각 부서에 배치되자 전황을 파악할 수 없는 가운데 시내에는 적의 포탄이 낙하하였고 사방에서는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였다. 국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먼저 시내에 쏟아져 들어온 것은 열차를 이용하여 기습한 북한군들이었다. 적이 시내로 돌입하여 07:30분에 유선전화가 두절되고 적에게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 전 대원의 결사적인 항전결과 제1진을 물리쳤다.
적은 공격개시 후 처음으로 시내에서 조직적인 저항을 받자 09:00시경 5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왔다. 이에 감봉룡 경감은 본부건물을 중심으로 사수키로 결심했다. 이러는 동안에 적이 시내로 돌입하자 대원들은 일단 방공호로 대피하였는데 건물이 파괴되자 적병들은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쳐들어와 수류탄 세례를 퍼부었다. 감봉룡 경감은 최후를 각오하고 대원들에게 총탄 한 케이스만 남기고 최대 속도로 사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어서 탈출 기회를 놓친 감경감은 대원들에게 마지막 돌격을 명령하고 선두에서 돌격사격을 하면서 나가자 이에 대원들도 함께 돌진을 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개성 철도경찰대가 결사항전하고 한 시간 뒤 개성은 완전히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43명이 전사하고 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명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 함으로써 이 혈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구국경찰사1, p.72~73) 개성 철도대의 세부전과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포위망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개성경찰서의 경찰전투전사는 전해지지 않으나 전시 행방불명 경찰관을 보면 개성서 54명, 안양서 2명이었다.
국군 제1사단 12연대 잔여병력은 문산 방향으로 지연전을 하며 이동하였고 일부 병력은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성경찰서 경찰관들은 물러서지 않고 응전하였으며, 개전 3일간 개성경찰서의 순직 경찰관은 27명이며 개성서에서 전시 행방불명된 경찰관은 54명이다.(경기경찰사, pp.1184/1187)
3) 문산지역 전투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문산 지구에 이르렀을 당시, 문산 일대는 국군 제1사단 13연대 책임지역이었으나 당시 1개 대대가 고랑포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고 1개 대대는 고랑포 남쪽에서 야외 훈련 중이었으며 1개 대대는 예비대로 후방에 집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군 제1사단은 구화리에서 고랑포와 적성면 방향으로 공격하였다. 북한군이 고랑포와 적성을 돌파하고 임진강을 건너 남하를 시도하였다.
장단경찰서(洪殷植 경감) 관하 고랑포지서는 임진강 돌출부 북안 38선 접경에 있었고 인근에 임진강 도하(渡河)지점이 있는 전략요충지이다.새벽에 전차 7대를 앞세우고 임진강을 도하하고자 침공한 적에게 고랑포 지서가 가장 먼저 점령당했다. 이에 홍은식 장단경찰서장은 본서 경찰관을 집합시켜 놓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멸공성단에 몸을 바치자”며 관내사수를 명령하고 다음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한편,고랑포 지서를 증원하기 위하여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를 대장으로 하고 경찰관 21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김기태 경위는 06:00시에 3/4톤 트럭에 특공대를 태우고 고랑포지서로 질주다가 도중에 적전차포에 직격탄에 맞아 김기태 경위를 포함하여 경찰관 15명이 전사를 했다. 비보를 접한 홍은식 서장은 재차 고랑포를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전선이 임진강 이남으로 이동하게 되어 어쩔수 없이 임진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파주경찰서와 합류하였다. 임진강 이북지역을 수중에 넣은 적은 주력을 적성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파주경찰서(賈昶鉉 경감)는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국군 제1사단 13연대에 협조를 요청하며 경비주임 지휘 하에 증강된 1개 소대 급 50명을 편성하여 적성지서를 지원하기위해 출동 중에 북한군 제1사단 선발대와 조우하여 약 30분간 교전을 하던 중 때마침 지원된 국군 제1사단 13연대 1개 소대와 협동하여 북한군 선발대를 격파하였으나 북한군 본대의 진출과 지형의 불리와 전력의 열세로 파평면 금파리(파주군 파평면)로 철수하여 국군과 지연전을 하였다.적은 10:00시에 적성을 침탈한 다음 전차와 장갑차 각 3대를 앞세우고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후 그 남쪽 장파리로 남진한 연대규모의 병력과 합세하여 파평산 일대 아군진지를 공격하였다.
파주경찰서 경비주임이 지휘하는 특공대 50여명은 제13연대와 함께 금파리 전방 개활지로 적을 유인한 다음 화력을 집중하여 근접 전투를 펼쳤다.적은 많은 시체와 장비를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경찰관 3명이 전사하고 1명이 부상했다.한편 15:00시경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는보안과장 황규섭(黃圭燮) 총경을 ‘개성지구 경찰부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2전선에 있던 13개 경찰서 경찰관으로 2개중대를 편성하여 서울에 가장 위협을 주는 축선인 문산지역으로 출동 시켰다.황규섭 총경의 경찰 병력은 개성-문산 간의 적의 도하가 예상되는 임진강 남안의 감제고지에 전개하였다.25일 자정무렵에 적은 임진강 철교를 이용하여 도강을 시작하였다.임진강 철교는 폭파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개성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는 제1사단 12연대가 철수한 후에 폭파하기로하고 기다리는 중에 기회를 놓쳤다.적의 도하를 저지하고자 군과 지연전을 펴다가 제1사단을 따라 문산읍 하동(下洞)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적 1개소대를 조우해서 격전 끝에 격퇴하고 적 소대장을 사살하였다.26일 21:00에 제 1사단을 따라서 봉일천으로 철수 하였다.
4) 오류동지역 전투
부평경찰서(김억순 경감)는 25일 05:00시에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李夏榮 경무관,경기도 경찰국장)로부터 북한군이 38선을 침공하여 계속 남진 중이라는 급보와 함께 “전투태세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김억순 부평경찰서장은 전 경찰관으로 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고 오류동-소사-부평을 잇는 도로 양측방 야산에 진지를 구축하였다.27일 새벽,인천에 있는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가 수원으로 이동하고 부평에 있던 보급창이 철수하자 이 지역에는 부평경찰서 병력만 남았다.
한강하구로 도하한 적은 무방비 상태의 김포 일원을 휩쓸고 26일 06:00시에 부평일대로 진입하여 경찰 병력과 접전이 벌어졌다. 10:00시에 김포비행장 부근에 적이 출몰한 것을 안희규(安熙奎) 경위가 지휘하는 중대가 격전 끝에 15:00경에 격퇴했다.
30일 06:15분경 전차 2대를 앞세운 적이 김포군 양동면(陽東面) 쪽에서 오류동으로 진출하여 경찰 병력과 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미 방어중인 수도사단 18연대와 합동으로 이들을 격퇴하여 경찰의 사기가 자못 충천 하였다.이 전투에서 군경합동으로 적 162명을 사살하고 7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경찰관 12명이 전사하였다.
7월 3일 20:00시에 적은 영등포를 점령하였고 23:00시에 인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경찰부대는 수원으로 철수 하였다.
국군 제1사단과 문산 일대에서의 경찰작전에도 불구하고 개성·문산 전투에서 인민군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까지 진출했으나, 국군 제1사단과 경찰의 조직적인 저항에 직면하여 진출이 다른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인민군 제1사단장 최광이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자 김일성은 전선 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시키라고 명령할 정도로 남침작전 지연을 문책했다고 전한다.
2.강원도 경찰비상경비사령부 작전
6·25남침 시 북한군 제1군단은 주공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군 제2군단은 조공으로 춘천~홍천~강릉축선을 돌파하고 개전 5일 이내에 수원 이남으로 진격하여 국군의 퇴로 및 증원 병력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그림 5)에서와 같이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25일인 개전 당일에 춘천을 점령하며 북한군 제12사단은 인제에서 홍천방향으로 진출하여 춘천~가평축선에서 국군 6사단을 격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림 5) 중동부지역 작전
출처 :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14. p96
강원도 비상경비사령관(윤명달 경무감-강원도경찰국장) 예하에는 12개 경찰서가 편성되어 있었다.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 남침을 개시하자 관내사수를 엄명하는 한편, 군경합동작전을 전개토록 하였다.군과의 합동작전을 통하여 3일간 적의 강력한 공격을 잘 막아내어 버텼으나 중과부족으로 27일 1700시에 홍천방면으로 철수 하였다.
당시, 북한군 제2사단은 3개 축선으로 공격을 개시했는데 그중 2개 축선은 화천과 양구에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를 이용하여 내평리 마을을 통과해야했다. 내평리 후사 면에는 국군 제6사단 7연대예하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었지만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내평지서는 춘천시내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했다.
1)춘천 부근 전투
춘천경찰서는 25일 04:15분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남침하자 38선 접경에 있는 북산
(北山-內平里)지서에는 지서장 노종해 경위 등 11명이 북한군 제7사단 예하부대와 1시간 이상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급기야 북한군은 82mm 박격포를 대거 동원, 내평지서를 완전 폐허로 만든 다음에야 진출할 수 있었다. 당일 전투에서 내평지서는 통신마저도 끊기고 고립된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지만 노종해 경위 등 11명 전원이 산화하였다.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소양강을 극복해야 하고 소양강 대안 깊숙이에는 사북지서가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축선 상에 위치한 사북지서에서도 국군 1개 중대와 지서원 12명이 합동으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적의 기총소사로 말미암아 윤홍규 순경 등 9명이 전사하였다.춘천지구 전투에서 내평지서 전투는 북한군의 춘천방향으로의 진출을 1시간 이상 지연시키고,연계하여 사북지서 전투는 국군 제6사단 예하 7연대의 소양강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시간적인 여건을 제공하였다.
춘천.인제 양 경찰서 병력과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는 29일 제9전투경찰대대(3중대는 오대산 공비 토벌중)는 병력을 수습하여 홍천에서 방어선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가중되는 적의 압력에 못이겨 다음날 도비상경비사령부는 원주로,경찰서 병력들은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홍천경찰서장(김성기 경감)이 지휘하는 홍천경찰서 부대는 30일 02:00시 홍천읍내에 진입한 적과 시가전을 벌였으며, 같은 날 새벽 03:00시 피난민과 국군병력의 완전 철수를 확인한 후, 강원도 비상경비사령관의 작전명령에 따라 제2방어선인 원주방면으로 철수하여 다음 작전에 대비하였다
춘천,인제,홍천경찰서와 강원 비상경비사령부의 제9전투경찰 병력이 국군 제6사단과 함께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통합저지하므로써 북한군 2.6.7사단이 춘천 공략에서 최초 계획보다 3일간이나 차질을 빚어 북한군은 지휘체계에도 큰 변동을 주었다.최초 북한군 제2군단에 의한 한강 이남에서의 국군의 포위를 저지하였고 열세한 전투력과 훈련수준에도 불구하고 국군이 7월 3일까지 한강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벌게 하였다. 그 결과 미 제24사단이 한국에 도착하여 경부축선에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케 하였다. 북한군의 1단계 전역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준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의 춘천~홍천전투는 개전초기에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북한군 전쟁지도부의 의지를 좌절시킨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이러한 평가는 단순히 국군만의 전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간 춘천-홍천간의 전투가 경찰의 희생으로 이뤄진 전투의 성과임을 아는 사람과 문헌은 거의 없어 더욱 안타깝다.
2) 영월지역 공방전
강원도 비상경비사령관 윤명운 경무관은 영월과 울진 이북에 있던 강원도 경찰병력을 군과 함께 축차적으로 철수하게 하였다. 강원 비상경비사령부도 원주에서 제천으로 이동키고 경찰병력을 수습하여 영월지구를 고수하기로 하였다. 이지역에는 군이 배채되어 있지않아서 경찰단독으로 작전을 펴야했다. 영월지구에는 상동중석광산을 비롯하여 함백(咸白)),마차리(磨磋里)탄광과 10Kw 출력을 가진 영월화력발전소 등 국가기간 시설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윤명운 사령관은 경찰학교 교장인 김인호 총경을 ‘영월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8전투경찰대대와 영월 및 장성경찰서 병력을 지휘하여 영월을 고수하게 하였다.
7월 2일 전차를 앞세운 적이 마차리로 침공했고,태백산으로 침투한 적 유격대가 후방을 위협하여 경찰부대가 적 포위망 속에 갖히는 상황이 되었다.그러나 경찰부대는 사력을 다하여 종일 분전하다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음날 05:00시에 포위망을 탈출하여 단양으로 철수를 했다.이때 적이 원주를 침탈하여 강원비상경비사령부도 봉양(鳳陽-제천북쪽)으로 이동했다.
윤명운 사령관은 단양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영월을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각개 분산된 병력이 대부분 청주방면으로 후퇴하여 단양에서 수습한 병력은 영월,정선경찰서의 병력과 제8,제9전투경찰대대의 병력 뿐이었다.윤명운 사령관은 수습한 병력을 재편성한 후 “강원도 경찰의 명예와 전통을 위하여 영월을 탈환하는데 몸을 바치자”라고 비장한 각오로 다짐을 한 후에 마차리 쪽 도로 양측 무명고지에 병력을 배치해 놓고 적이 진출하기를 기다렸다.자정을 지날 무렵 일단의 적이 마차리로부터 정면으로 침공하였고,일부의 적은 상동 쪽에서 침공하여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경찰 부대는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적을 격퇴하였으나 적의 후속병력이 증원되고,삼옥(三玉-영월 동쪽 4Km) 방향으로 우회한 적이 경찰부대의 포위를 기도하였으므로 7월 5일 06:30분에 영월 탈환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3)영월 재탈환 작전
윤명운 강원비상경비사령관은 영월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7일 06:00시에 영월지구 전투사령관인 김인호 총경에게 영월을 재탈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영월지구전투사령부 예하 제8전투경찰대대 제1중대장 김해수(金海洙)경위는 7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상동(上洞-영월 동쪽 21km 지점)에서 기관총 1정을 장착한 트럭 2대에 분승하여 영월로 향하였다.다음 날 14:00시 송현치(松峴峙-상동 서쪽 5km 지점,태백-영월간 31번 국도상)에 이르렀을 때 반대편에서 병력을 잔뜩 태우고 오는 적의 차량과 마주쳤다. 중대는 즉시 하차하여 선제 공격을 하였으나 적도 동시에 공격하여 급기야 백병전으로 전개되었다.혼전 속에서 중대장 김해수 경위가 전사하자 석상익(石商益) 경위가 지휘를 하였으나 석경위 마저 적탄에 쓰러졌다.이때 적 본대로보이는 적 후속부대가 중대를 포위 하기에 이르러 중대는 전열이 흩어지고 병력은 분산된 상태에서 적진을 각개 돌파하여 본대로 복귀하였다. 이 전투에서 경찰 중대는 김해수 경위를 비롯하여 24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을 당했다.
제8전투경찰대대 대대장 전성우(全星宇) 경감은 제1중대의 참패를 설욕하고자 결심했다.하루 동안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7월 9일 01:00시에 제3중대(李夏永 경감)와 제5중대(趙英 경감)를 송현치로 진격시켰다.중대가 송현치에 이르기 전에 적은 트럭 13대에 병력을 싣고 녹전리(碌田里-영월리 중동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서벽(西碧-춘양 서북쪽 8km)을 거쳐 춘양으로 가고 있었다.경찰중대는 송현치로의 진출을 단념하고 춘양으로 전진하여 제3중대는 춘양천변 동쪽에,제5중대는 춘양 한 쪽 도로변에 전개하여 도로를 막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경북전투경찰대대 11중대가 춘양 서쪽 산악지대에 이미 배치되어 있었다.
7월 9일 04:00경 제5증대가 적 선발대로 보이는 트럭 2대가 나타나자 이를 공격하고 교전이 벌어졌다.이때 적 본대가 경북전투경찰 제11중대 측후방으로 침투하여 중화기로 집중사격을 해 왔으므로 전 경찰 병력은 춘양 외각지대로 철수 하였다. 이전투로 경찰 8명이 전사하였다.
4)강릉지역 전투
강릉지역 작전은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동해안지역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작전이다. 북한군군 제5사단은 배속 받은 제1경비여단의 3개 대대를 자주포로 증강하여 제1제대로, 사단예하 10연대를 제2제대로 하여 38°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하였다. 또한 제945육전대와 제766유격대를 해안으로 상륙시켜 국군 제8사단의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일부병력을 산악으로 침투시켜 대관령지역으로의 부대철수와 증원을 차단하고자 했다.당시 동부지역에는 국군 제8사단의 10연대와 21연대가 가용한 부대였으며 1개 연대는 오대산과 태백산일대에서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38°선 경계진지에는 제10연대의 2개 대대가 배치되고 제21연대는 삼척에 본부를 두고 후방에 침투한 북한 인민유격대 토벌에 임하고 있었다. 이때 경찰은 주로 동해의 해안 경비를 담당하면서 일부 경찰병력으로 태백산 지구의 공비소탕에 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결국, 당시 해안선방어는 마을 단위 청년방위대와 경찰에만 의존하고 있어서 해상을 이용한 북한군의 상륙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주문진경찰서(정복회 경감)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 적5사단이 관내에 있는 제8사단 제10연대 방어정면을 돌파한 때를 같이하여 강릉시 안인리에 적 제766부대가,옥계면 도리(道里)와 삼척 임원지에 제549부대가 상륙하였으며 적들의 기도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강릉경찰서(전호인 총경)에서는 정동면(正東面-강릉시 정동출장소) 해안초소에 파견된 김대욱(金大旭)순경은 적 1개 중대규모가 상륙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아군이 상륙훈련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관망하다가 그 자리에서 북한군의 사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것이 적이 침공하는 사실을 알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에 강릉경찰서장은 적이 정동진에 상륙하여 강릉으로 북상하고 있다는 지서의 보고를 받고 이를 국군 제8사단에 통보하는 동시에 관하에 비상을 걸어 적의 상륙부대에 대처코자 하였으나 통신이 두절되고 전후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북한군의 전면 남침을 인지한 국군 제8사단은 10:00시에 사단 내 비상을 선포하고 연곡천 일대로 부대를 추진시키고 삼척에 있던 예비연대로 하여금 해안으로 상륙한 게릴라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주저항선을 증원토록 하였다.최초 적의 기습상륙을 알리고 조치한 강릉경찰서의 노력으로 국군의 희생을 막는 효과적인 조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주문진경찰서장은 전 경찰서원을 동원하여 전투중대를 편성하여 주문진 북방 4km 지점의 향호리(香湖里-주문진읍)와 그 북쪽 인구(仁邱-양양군 현남면)에 상륙한 적을 최대한으로 저지하였으나, 적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견디지 못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25일 밤중에 사천(沙川-강릉시 사천면 사무소 소재지)일대로 철수하였다.
강릉경찰서는 당시 군과 더불어 전·후방에서 양면 공격을 받았으나 6월 27일 질서정연하게 대관령으로 철수했고, 주문진경찰서도 이곳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삼척경찰서 부대도 적의 기습을 받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군 진부리로 철수하여 차기작전에 대비했다.
또한, 전투경찰 제9대대 제3중대(중대장 함약해 경감)는 오대산 두로봉(頭老峰-1,421,9m)에서 적 유격대의 침투를 저지하고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이 남침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주문진경찰서 삼산지서로부터 연락을 받고 철수하여 진부에서 삼척경찰서 병력과 합류하였다.
강원경찰 병력은 대관령을 중심으로 제8사단과 작전을 펴다가 29일 19:00시에 군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그림 7) 동해안(강릉)지구 전투
출처 :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14. p99
다.서울경찰 비상경비사령부 철수 작전
서울시 비상경비사령부(김태선 이사관) 예하에는 10개의 경찰서가로 편성되어 있었다.6월 25일 06:30분 비상경비총사령부로부터 “북한군이 전 38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각 경찰은 즉각 전투태세에 임하라”는 지시를 서울시 비상경비사령부는 받았다.
서울비상경비사령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한편으로는 전투준비태세를 갖추면서 헌병사령관과 협조하여 서울 시민의 동요를 막고자 노력하였다.이날 상오 헌병사령관 송요찬 대령과 공동으로 포고문을 발표하였다.“북한군이 6월 25일을 기하여 38도선을 침범하여 만행 중이니 시민은 불필요한 행동을 삼가고 군경을 신뢰하여 동요치 말고 당국의 지시에 따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정오에는 김태선 서울 비상경비사령관은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단축하여 수도치안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북한 항공기가 3회에 걸쳐서 여의도 비행장,철도조차장과 서울시내 중심가에 기총소사를 하였고 심리전단을 살포하였다.이에 치안국은 일반명령(제78호)을 내려 시민에게 적기의 야간공습에 대비하여 야간 등화관제를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포천,동두천과 임짐강 이북지역이 적 수중에 유린되자 서울 주변에 경찰관을 배치하여 오열(五列)의 책동을 분쇄하는 한편 사복경찰을 문산,포천,의정부전선에 침투시켜 적의 진출 상황을 탐지하였다.서울시 비상경비사령부는 의정부 축선의 전황을 수집하던 중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90호에 의거 “1개 대대의 전투경찰을 육군사관학교에 배속하라”는 명령을 받는다.이에 서울시 경찰국 기동대 이강현(李康玄) 경위가 지휘하고 서울시경기동대장 전병두(全炳斗)경감이 동행하여 300명이 포천 남쪽에 위치한 내촌지역으로 긴급 출동하였다.육군사관학교 교장 이준식 준장은 육사 생도들과 함께 경찰대대를 서파(西坡)-퇴계원-서울에 이르는 선에 배치하였다.
26일 11:00시경 경찰진지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경찰대대 1개분대가 부상을 입었고 15:00시에 적이 공격하여 교전이 벌어졋다. 경찰들이 가진 실탄은 1인당 10발에 불과하였으므로 실탄을 소모 한 후에 육사부근으로 철수하였다가 시경으로 복귀하였다.
26일 13:00시 의정부를 탈취한 적이 창동 -미아리선으로 밀고오자 서울시내 각 경찰서 병력을 차출하여 미아리선에 투입하였으나 대전차 방어무기가 없어 속수무책인데다가 지휘체계마저도 서지 않아 각개 분산되고 말았다.
27일 14:00시 서울시 전 경찰은 강남으로 철수하라는 비상총경비사령부(치안국)의 지시가 내려졌다.각 경찰서는 철수준비를 하고 차량으로 서울시경에 집결하였는데 “전황이 아군에 유리하니 철수를 중지하라”는 새로운 지시가 내려져서 각 부서로 복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그러나 서울시 비상경비사령부는 27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28일 자정에 적일부가 퇴계로까지 침투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고,혼란이 야기되자 각 경찰서는 상부지시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독자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한강 인도교와 서울역 사이는 군경 이동차량과 피난민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었다.
종로경찰서는 28일 02:30분에 트럭 8대에 병력을 태우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 중 교량이 폭파되어 4대는 무사히 건넛으나 뒤 4대는 교량과 함께 폭파되어 이상훈(李相勳) 경위 외 76명이 순직하였다.경찰서를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남아 있던 김영희(金榮熙) 경위 외 12명은 적이 시내에 침입하자 교전중 각개 분산되었고,지하에 숨어서 국군의 수복을 기다리던 중 적색분자의 밀고로 잡혀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경찰은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군 보급로, 중요시설경비,피난민 통제, 구호활동과 후방에서 준동하는 공산분자 색출 등 많은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했다.그러나 경찰은 적수공권이었다.장비 부족에다 통신수단이 거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화기 조차도 갖추지 못하였다.
중부경찰서 경찰관들은 충남도청 광장에 집결하였다가 김태선 서울 시경국장의 지시로 7월 1일 안양까지 출동하여 적을 저지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다음 날 천안까지 철수하는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
경비총사령부는 최연(崔燕) 총경을 수원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이 수용 되는대로 중대 또는 대대단위로 전투경찰부대로 편성하여 군 작전에 협력토록 하였다.
7월 2일 천안에 집결한 서울시경찰국 병력과 평택에 집결한 경기도 경찰국(경기도경) 병력을 안양과 수원지구 전선에 투입하고,천안에 있던 철도경찰대 본부 병력으로 안양-수원-천안-조치원 간 주보급로인 병차선을 확보토록 하였다. 경북,충북,충남 도경 병력과 철도경찰대 본부 병력 등에서 1,350명을 차출하여 천안-김천 사이의 철로,교량과 터널 등 중요시설 경비를 강화시켰다.
IV. 개전 및 초기작전 에서의 단계별 경찰 전투평가
1. 미군정기의 경찰 평가
미군정기의 경찰을 살펴보면 첫째로 경찰의 최고 기구를 행정부의 독립된 경무부(警務部)로 편성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형태로 조직하였다.해방 직후 정부도 수립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을 조기에 안정시키기 위한 미군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일본군의 무장을 효과적으로 해제하고 분단된 남북의 상황을 고려하여 미군은 조기에 남한을 안정시키고자 독립된 행정부의 기관으로 편성하였다.
두 번째로는 경찰을 전시편제화로 시키면서 경찰국가체제로 개편하였다. 미군정은 본국에서는 영미법체계하에 자치경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강력한 경찰기구의 필요성 때문에 국가경찰제를 선택하였다. 또한 미군정기는 군대를 이용할 수 없었던 특성상 경찰력에 의존하여 좌익을 배제시켜 나갔으며,1946년 10월 1일 폭동사건을 계기로 경찰을 전시편제화를 추진하였다.
세 번째 경찰의 조직방법에 있어서도 하향식 방법을 선택하였다.해방직후 자율적으로 조직되어 치안을 유지하던 건준치안대,청년단과 같은 치안조직을 흡수하여 부정하는 한편 중앙에서 먼저 상부조직을 결성하고 이어서 지방조직을 결성하는 하향식 방법으로 조직하였다.
네 번째로 이 시기의 경찰은 중립적 사회질서유지 기능보다 경찰의 충원과정에 있었어도 일제경찰관들을 그대로 재임용하고 일제식민지 경찰기구를 활용하므로써 일제경찰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불신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정부수립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경찰 평가
정부수립 후의 경찰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경찰기구가 경무부에서 내무부 치안국으로 축소되었다.경찰을 독립적인 조직으로 두지 않고 내무부에 속하게 함으로써 행정부를 장악한 이승만은 경찰을 그의 정적 제거라는 목적에 사용하기도 하였다.특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좌절 되면서 친일파 경찰은 이승만 정권과 더욱 유착되었다.
두 번째로 이 당시의 경찰은 38선경비와 좌익 유격대 토벌을 이유로 준전시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찰을 대규모로 증원하는 하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면서 경찰을 대규모로 증원하는 동시에 경찰국가화 하였다.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경찰력 강화를 통하여 국민에 대한 사찰관행과 감시체제를 구축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세 번째로 치안국과 각 도에 비상경비사령부의 설치 운용하였다.비상경비사령부는 미군정시대(1946)에 경무부로 편성되었다가 정부수립후 내무부의 치안국으로 조직은 축소된 반면에, 해방 이후 무력에 의한 좌익세력의 반란과 소요가 늘어나자 신생국가의 특수한 사정으로 기구상으로 반영하지는 못하고 이러한 특수임무를 수행하기위하여 임시기구인 ‘비상경비사령부(非常警備司令部)’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상황으로는 현실적인 조치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러한 경찰의 정책은 마치 한국전쟁에 대비하기라도 한 듯이 전쟁 발발과 동시에 경찰의 전투수행에 크게 이바지한 조치였다.
3. 개전 초기작전간 경찰전투의 평가
개전초기 작전간 경찰작전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경찰은 상급제대가 예하 경찰서를 지원할 능력이나 역할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행된 작전이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시 총경비사령부나 도경비사령부가 예하 경찰서들을 지휘통제를 할 수 있는 지휘통신장비가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다.또한 시.공간적으로도 도비상경비사령부가 각 경찰서를 지휘하거나 지원하기가 위한 상급제대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발발한 전쟁이었다.그 당시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의 예하에는 21개 경찰서가,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에는 12개의 경찰서가 편성되어 지휘폭이 가중하였다. 또한 비상경비사령부조차도 국군과 작전계획이나 상황을 서로 공유할 여건이나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전투를 실시하고 있는 예하 경찰서에 비상경비사령부가 상급제대로서 적에 대한 정보나 작전지침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상급제대의 지원없이 고립무원에서 예하 경찰서 스스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두 번째로 상급제대의 역할이 미흡하자 경찰은 경찰서별로 ‘임무형 분권화체제’로 효과적인 전투를 실시하였다. 전방 접적지역 경찰서들은 비선형으로 전개되는 전선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투력으로 생사를 건 전투를 하였다. 최소한의 공간을 양보하면서 최대한의 시간을 벌게 해주므로써 국군의 후방 증원부대가 새로운 전투준비를 하도록 해준 것이다.이러한 전투는 한국전쟁간 경찰이 기여한 최상의 헌신으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경찰은 국군의 전투력 공백지역에 스스로 적을 찿아서 전선을 보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전개한 지역에서는 군경합동작전으로 적을 물리쳤다. 당시 대한민국으로서는 마치 육. 해. 공. 해병대에 이어 제5군의 국전투부대의 혁할을 하였다. 경찰의 인원 및 장비편성은 기본적으로 치안유지에 적합한 수준이었으나, 북한의 정규군에 비해 화기와 장비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인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특히 강원도 비상경비사령관(윤명운 경무관)은 영월과 울진 이북에 있던 강원도 경찰병력을 군과 함께 축차적으로 철수한 후 경찰병력을 수습하여 영월지구를 고수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에는 군이 배치되지 않아서 경찰단독으로 작전을 편 것이다.
네 번째로 효과적인 후방지역 작전 및 병참선 방호작전으로 후방지역 안정 및 국군의 증원전력 전투력 보존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경찰은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군 보급로, 중요시설 및 피난민 통제, 구호활동과 후방에서 준동하는 공산분자 색출 등 많은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은 후방지역 치안확보와 부역자 처리 등을 통해 ‘반공국가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정치적 반대를 통제하고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일선 행정기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V. 결 론
본 연구는 해방 후 창설한지 4년여 밖에 되지 않았던 대한민국 경찰이 한국전쟁 초기전투에서 국군의 인원,장비 및 물자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상태에서 북한의 정규군을 맞아 어떻게 싸워서 한국전쟁으로 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는지를 밝히는데 있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 경찰의 역할을 시기적으로 미군정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전쟁 발발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불과 5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앞의 평가에서 보았듯이 기간별로 경찰의 조직화 과정과 역할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미군정기와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는 한국전쟁을 대비하여 경찰이 전쟁을 준비하였다기 보다도 당시에 처했던 남한의 사회적 상황에 맞는 경찰정책들이 결과론적으로 전쟁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군정기에는 경찰의 최고기구를 행정부의 독립된 경무부(警務部)로 편성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형태로 조직하였고 경찰을 전시편제화로 개편한 점이다. 이어 정부수립 이후에는 38선 경비와 좌익유격대 토벌을 이유로 준전시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찰을 대규모로 증원하는 정책과 치안국과 각 도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 운용하였던 점이다.
끝으로 한국전쟁의 초기전투에서 경찰이 전쟁에 기여한 점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방 접적지역에서는 경찰서별로 북한군에게 최소한의 공간을 양보하면서 최대한 북한군의 전진을 지연시킴으로써 국군의 후방 증원부대가 새로운 전투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벌게 해준 것이다. 국군이나 상급제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경찰은 경찰서별로 “임무형 분권화 전투”를 통해 효과적으로 적을 저지하였다. 접적지역 경찰서들은 비선형으로 전개되는 전선에서 관내 지형의 잇점을 최대 활용함으로써 적의 피해는 강요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찰의 전투형태는 군의 메트(METT)요소를 가장 잘 적용한 전투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옹진, 춘천, 파주경찰서의 성공적인 전투와 개성철도경찰대의 장렬한 전투는 북한군의 기본 공격계획 마저 차질을 가져오게 할 정도로 한국전쟁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종심작전지역에서는 경찰은 국군의 전력공백 지역을 스스로 보강하면서 효과적으로 군경합동작전을 수행하였다. 개전초 문산지역을 방어하는 1사단의 정면은 웅진반도를 제외하고도 94km에 달했다. 이러한 정면을 군이 모두 담당하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임무일 것이다. 그래서 접적지역의 경찰서병력 자체가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전투력이 되었다. 또한 경찰들은 상급제대나 국군의 작전지침이나 명령 없이 스스로 적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찿아싸웠다. 더욱이 경찰의 인원 및 장비의 편성은 기본적으로 치안유지를 위한 조직이다. 그러나 북한의 정규군에 비해 인원, 화기와 장비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열세인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셋째, 후방지역에서는 후방 지역작전 및 병참선 방호작전으로 후방지역 안정 및 국군의 증원전력 전투력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경찰은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군 보급로, 중요시설 경비, 피난민 통제, 구호활동과 후방에서 준동하는 공산분자 색출 등 많은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은 후방지역 치안확보와 부역자 처리 등을 통해 ‘반공국가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전투부대도 아닌 경찰이 훌륭하게 전투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해방 후 최초의 국가기관으로 탄생하여 짧은 기간내에도 “치안과 국방”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 경험이 경찰에게 한국전쟁을 훌륭하게 치루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은 전쟁의 주체가 되어 국난을 극복한 현장의 역사를 다양하게 연구하여 전사(戰史)로 기록들을 잘 남겼다. 국군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국군보다 더 큰 희생을 치른 경찰은 자신의 전투에 관한 역사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부족한 경찰의 자료를 보고 연구기간 내내 연구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후배경찰들은 선배경찰들의 역사를 보완하는 노력과 이 전쟁이 주는 역사적 교훈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아놀드 조셉 토인비 교수는 “인류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경찰은 미군정기 조직 직후부터 전쟁기간 동안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생치안을 위한 노력과 좌익세력의 반란이나 폭동,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수호하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노력은 한결 같이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아울러 노파심이겠지만 남북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한반도 주변정세 및 역내 이해관련국들의 관계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남. 북. 미가 공동으로 한국전쟁시 전사자의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찰도 이러한 사업에 조심스럽게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먼저 가신 선배영령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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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주관,국가보훈협회 주관 현충원서의 2018.10.12.11:000,세미나 발제문..유영옥 국가보훈학회 회장 요청.9월27일부터 자료준비,10월 5일 최종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