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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선교사들(눅9:22~23)
김헌곤 목사( 한국교회 순교자 후손, 집단 순교지 교회 대표)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들의 첫 발걸음 이후 1995년까지, 100년 동안에 2950 여 명의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찾아와 헌신했다. 일억 만리 머나먼 동양의 땅에,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시설이 없고 음식도 거역스럽고 관습이 다르고 전염병도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의 진하디 진한 사랑을 체험하고 사명에 붙잡혀서 자원하여 찾아온 것이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 한반도의 상황은 언제든지 모든 것을 잃고 생명까지 잃을 수 있었다. 역사에 의하면 1801년부터 1871년 병인박해까지 5천명~8천명 천주교인들이 학살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 역사를 알고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조선을 찾아온 헌신자들이다.
본문에 십자가는 삶의 고난과 사역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죽음이다. 12제자가 그랬고 2천년 동안 복음에 헌신했던 자들의 죽음이 증거 한다.
조선 땅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선교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존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에서 중국의 산동과 심양에 1872년(30세)에 가서 사역했다. 1887년에 신약성경 27권을 번역하여 조선 선교의 기초석을 놓았다. 그는 15년 동안에 아내와 자녀 4명을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선교현장을 떠나지 않고 사역했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1888년 캐나다에서 25세에 입국하여 연동교회에서 사역했다. 사역 중에 부인 해티가 결핵으로 둘째 아들 비비안이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었다. 게일은 한영대자전(韓英大字典)을 간행하였고 한국역사와 한국문학을 세계에 소개하는 공로를 세웠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90년 (25세)에 가족과 함께 내한하여 개성에 남도병원을 설립하고,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런 와중에 두 딸을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로제타 홀 의료선교사는 1890년 25세에 조선에 입국하여 1892년 윌리엄 홀과 결혼했다. 남편이 1894년 청일전쟁 때 부상병을 치료하다가 소천, 3년 후엔 딸도 풍토병으로 소천 했다.
그는 아들 부부와 기홀병원, 구세요양원을 설립하고,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었다.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평양에 숭실대학을 세웠다. 첫딸이 1894년 뇌척수막염으로, 1916년 아내 애니가 소천 했지만, 아들 윌리엄과 리처드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1892년 27세에 입국하여 군산 구암교회, 예수병원, 영명학교, 멜본딘학교를 세우고. 전주서문교회에서 건축하고 전북지역에 여러교회를 세웠는데 세 아들이 소천하는 아픔이 있었다. 전주 기전학교는 43세에 소천한 전킨을 기념하는 학교이다.
많은 선교사 중에 대를 이어 헌신한 두 가문을 소개한다.
길보른(Kilbourne) 家門의 헌신
한국교회를 위해 길보른 선교사 가족의 3대에 걸친 헌신은 특별하다. 길보른 선교사 가족은 1907년 성결교회 설립 초기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3대가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 땅에 성결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발전을 뒷받침 해왔다.
1대 어네스트 길보른(Ernest Albert Kilbourne)은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함께 동양선교와 한국성결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어네스트는 1865년 3월 13일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쥴리아(Julia Pittinger) 자매와 1888년 결혼하였고 시카고시 전신국장으로 1,000여명의 전신기사들을 관리하는 기사장(a division chief)이 되었다. 이후 같은 기사장 이었던 찰스 카우만의 전도로 1895년경 회심하였고 직장, 거리, 공원 등지에서 전도를 열심히 하였고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어느 날 길보른은 구체적이고 의미심장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환상 중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까지 연결된 아치형의 큰 고속도로를 보았다. 그 다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닿았고, 또 다시 중국에 닿았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그 고속도로는 직접 천국에 연결 되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네스트는 1899년에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을 졸업하고, 이어 마틴 냅이 세운 하나님의 성서학원(God’s Bible School)에서 공부한 후, 1901년 1월에 시카고에서 카우만과 함께 사도성결연맹의 마틴 냅, 셋 리스, 스토커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받는다. 그러나 바로 선교사로 떠나지 않고, 전신회사에 근무할 때 회사재정을 남용한 일이 마음에 걸려 회개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완전한 재정적 보상을 한 후 카우만보다 1년 늦게 1902년 8월에 일본으로 출발한다. 어네스트 선교사는 일본, 조선, 중국에서 총 270여 교회를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 했다.
어네스트는 1907년 5월 김상준, 정빈이 한국에 성결교단을 세울 때 밑 걸음이 되었으며, 1912년 700석의 경성신학교(서울신대 전신, 교장 토마스)를 건축할 때 모금을 담당하여 당시 5층의 신학교 건물은, 명동성당과 함께 경성의 명물이 되었다. 어네스트는 1921년 OMS(동양선교회) 감독이 되어서는 한국성결교회의 조직을 강화시켰다. 그는 한국성결교회 감독겸 성서학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활천」을 창간하여(1922), 행정과 학원과 문서선교 책임자로 적극적 선교를 하였다. 1924년에 카우만 초대총리가 서거하자, 그를 이어 2대 OMS 총재로 활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뒤 1928년 64세로 소천 했다. 그는 운명하기 몇 시간 전에 선교사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불의 돈을 출납하였으나, 나의 소유는 송곳 한 개 박을 땅이 없고, 집도 없고, 화려한 가구도 없고, 생활비로 쓰다가 남은 돈 80$ 밖에 없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다."라는 마지막 기록으로 그의 검소한 생활을 밝혔다.
2대 선교사 로슨 길보른이 대를 이어 헌신했다. 부친인 어네스트 길보른의 외아들인 로슨은 서울성서학원 교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고문으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일제 치하 당시에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 일제의 강압으로 OMS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했다가 1949년 다시 입국하면서 지방순회와 신학교 교수, 그리고 전도 활동을 재개했다.
3대 선교사에드윈( Edwin1917~2015). 엘마(Elmer 1920~2017)어네스트(1920~2017)길보른 3형제는 로슨 길보른의 아들로 한국선교를 이어갔다. 에드윈과 엘마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1949년 공산화되어 한국에 들어와 50년대 말엽까지 한국성결교회 재건에 사활을 걸었다. 에드윈은 1950년 사망한 딸 캐더린을 양화진 묘지에 묻었지만 이후 23년간 한국을 향한 전도와 선교 열정을 계속 불살랐다. 엘마는 1949년 한국에 들어와 섬과 빈민촌을 돌며 구제사역자로 활동하고 월드비전과 협력하여 고아원과 양로원과 나병환자 요양소를 세웠으며 한국전쟁 이후 세계구호위원회(World Relief Commission)의 한국 책임자로서 국민일보 발표에 의하면 급식사업에도 주력해 매일 7만 6000명에게(천원씩 만 계산해도, 7천6백만 원) 16년간 밥을 제공한, 한국 역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6.25전쟁 후, 굶주리는 자가 너무 많은 때에 엘마의 헌신은 너무 귀했다. 엘마는 부친의 친구로 여러 차례 우리 집에서 뵈었는데 참으로 검소한 분이었다. 한국 정부는 감사의 표시로 1963년 6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훈장을 수여하였다. 엘마는 1985년 인도선교를 위해 한국을 잠시 떠났지만, 그의 유언을 따라 진정한 고향인 한국의 양화진에 묻혔다.
에드윈 선교사는 2015년 8월 19일 향년 98세로 소천했다. 장례예배에서 유족은 조문객들에게 “화환 대신에 길보른 장학재단에 후원금을 요청했다. 한국 사랑에 대한 유족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길보른 후손들은 가문에 재산들을 모아 2007년 5월 26일 한국성결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신학대학교에 장학금 10억과 길보른 재단에 장학금 15억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길보른 선교사 3대 가문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린튼(Linton) 家門의 헌신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인돈, 1891년 ~1960년) 선교사는 조지아 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21세에 한국 와서 48년간 500여 교회를 세우고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사회참여보다는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중점을 뒀기에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피했지만 그가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있을 때,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고, 한국의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했다.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 시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했다는 이유로 1940년 쫓겨났다가 1946년 11월 신흥학교 교장직에 복직했다. 지금의 한남대학교인 대전대학교를 1956년에 설립하였고 그의 전공이 건축기사로 학교를 지을 때 시멘트부터 마감재까지 일일이 간섭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립선암에 걸렸음에도 쉬지 않고 학교 일을 하다 미국에 들어가 1960년 8월 13일에 사망하였다.
가족은 선교사 유진 벨의 딸 인애자와 결혼하여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장남이 윌리엄 린튼 2세, 차남이 유진 린튼, 삼남이 휴 린튼, 그리고 드와이트 린튼이 있다
장인 유진벨은(배유지 Eugene Bell, 1868-1925) 로티 위더스픈과 1884년 결혼하여 헨리와 샬롯 두 자녀를 낳았다. 1895년 4월 9일 유진벨은 오웬 선교사와 함께 제2진으로 내한하게 된다. 이때 유진벨의 나이가 27세였다. 그는 1898년 호남지역으로 배치되어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펼쳐 木浦에 양동교회를 세웠다. 유진벨 부인은 1901년에 심장병에 걸렸으나, 치료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남편이 전도 여행하는 중에 홀로 3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들도 어린 나이에 풍토병으로 죽었다. 이런 아픔 속에도 송정중앙교회를 세웠고(1901년)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1903년에 설립했다.
유진벨은 선교부를 1904년 광주로 옮기게 된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유진벨과 오웬 가족, 변창연, 그리고 가정부와 주민을 초청하여 40여 명이 함께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시의 최초 교회인 양림교회 시작이다. 그는 1905년 光州 최초의 종합병원인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을 세웠고, 1908년에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세웠으며 여러 교회를 세웠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았다. 유진벨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 한센병자들을 몸에 끌어안았고, 치료뿐만 아니라 생활 공동체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돌봐 줬다. 버려진 아이들은 양녀, 양자로 삼았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학비가 있든 없든 간에 교육시켰고,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갖가지 이유로 쫓겨나 갈 곳 없는 여성들을 야학을 통해 글을 깨우치게 하고, 양잠기술, 바느질 기술 등을 가르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줬다.
유진벨은 1904년 마가렛 벨과 재혼했으나, 마가렛 벨은 1919년 3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돌아오다가 병점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유진 벨은 건강이 악화되어 30년 사역을 마치고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딸 샬롯 벨(Charlotte Bell)은 光州에서 출생해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성인이 돼 아버지 벨에게 돌아와, 群山에서 사역하던 윌리엄 린튼과 결혼했다.
3대 선교사 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
윌리엄 린튼과 어머니 샬렛 벨 린튼의 셋째 아들로 한국 군산에서 태어났다. 신사참배 반대로 1940년 11월 14일 온 가족이 강제 출국당했을 때 휴 린튼은 14세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휴 린튼은 1954년 아내 로이스 린튼과 세 아들과 함께 입국했다. 그의 선교 지역은 전라남도였다. 휴 린튼은 순천으로 부임했다. 섬 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웠다.
휴 린튼은 1960년부터 1970년까지 광양만의 바닷물을 막아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하며 20만 평의 땅을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휴 린튼은 1984년 4월 10일 농촌 교회 건축용 자재를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 요양소로 들어오는데, 맞은 편에서 오던 관광버스가 들이받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순천에는 응급 환자용 앰뷸런스가 없었다. 그때 의대생이던 막내아들 인요한은 한국의 응급 의료 체계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휴 린튼의 부인 로이스 린튼은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신학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무렵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휴 린튼과 결혼하고 1954년 남편과 함께 어린 세 아들의 손을 잡고 입국할 때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지리산 곳곳에서 빨치산들이 출몰하던 때였다. 휴 린튼이 교회 사역에 역점을 두었다면, 로이스는 결핵 퇴치에 중점을 두었다. 마침내 시설을 갖춘 결핵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이곳이 현재의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이다. 휴 린튼의 가족은 온 가족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순천 印씨의 시조가 되었다.
휴 린튼의 자녀 중에, 둘째인 스티브 린튼(유진벨 이사장), 넷째인 앤드루 린튼, 막내가 존 린튼(인요한)이 태어났으나 첫째와 셋째는 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3형제가 됐다.
드와이트 린튼은 휴 린튼의 동생으로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에서 의료봉사와 호남신학대학 학장으로 헌신하였다.
4대 선교사 스티븐 린튼과 존 린튼
휴 린튼 선교사의 아들 스티브(인세반)는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의료지원 사역을 펼치며 결핵병원을 세우고 결핵검진 차량 결핵약품을 공급하고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1997년부터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도 수차례(빌리 그래함, 지미 카터와 함께) 만난 북한 전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부인은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만난 경향신문 김경래 장로의 딸 김원숙이다.
스티브의 동생 존(인요한)은 한국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토종’이다. 부인은 이지나한국 여성이다. 인요한은 부친의 교통사고를 통하여, 엠블런스(ambulance) 구급차 보급 운동을 통해 응급 환자 치료에 큰 공로를 세웠다.
빌 린튼 3세는 윌리엄 린튼 목사의 장손(長孫)으로 인세반, 인요한과는 사촌 간으로. 미국의 세계적 생명공학기업인 ‘프로메가(PROMEGA)’ 대표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설립한 한남대를 2004년 방문해 500만 달러 재정을 후원했고, 이후 한남대에 프로메가 BT 교육연구원이 설립됐다.
인요한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21.5.23) 린튼家에서 호남에 세운교회가 612곳이라 했다. 참으로 놀라운 열매이다.
서울 제2한강교 북단에 이뤄진 145명의 선교사 가족 매장지가 있는 양화진을 방문하면, 1908년에 급성 맹장염으로 소천한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는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모든 생명을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If I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기록되어 있다. 모든 선교사의 마음일 것이다.
한국개신교가 짧은 역사에 세계 기독교사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헌신과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2600 여명 순교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이중 대다수가 자원한 순교자이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 문준경 전도사, 박관준, 유계준 장로, 윤임례 집사는 자원한 순교자이다. 이들 자원한 순교자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고 사모했다. 한국교회는 초기 선교사들과 순교자들의 신앙으로 재무장해야 한국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고난과 고통에서 머물지 않고 죽음까지 감당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