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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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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문무의 조선사 해설 명(明) 태조(太祖)의 후비(后妃) 공비(碽妃)
문 무 추천 1 조회 398 14.08.04 20:27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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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8.05 08:34

    첫댓글 이전글에도 올렸듯이...공비(貢妃)는 원나라 원비(元妃,황후)인 고로...
    당대에는 기황후가 가장 적합한 후보자라 생각합니다.

  • 14.08.05 18:06

    기황후는 좀 아닌 듯 하네요.
    기황후가 1333년에 원나라 궁녀로 갔고 1340년에 황후가 됩니다.
    그리고 원나라가 1368년에 멸망하죠.
    궁녀가 되려면 15살은 되야 한다고 보고 원나라가 멸망해야 명나라 황비가 될 거 아닙니까?
    궁녀가 되고 35년 만에 망했습니다. 그럼 15+35는 50살입니다. 할머니죠...^^!
    할머니를 대려다가 황후를 삼는다는 것이 상식선에서 이해가 안 갑니다..^^!
    저는 50먹은 할머니가 같이 안 살면 때려 죽인다고 해도 그냥 마자죽을껍니다...^^!

  • 14.08.08 18:51

    공비가 기황후라 예측하는 기록들에도...기황후의 나이에 대해 거론하기도 합니다.
    오십세가 돼도 기가멕힌 녀자들 많습니더...ㅡ. .ㅡ
    마포대사님은...그저 젊고 좀 이쁜 아가씨들에 맘이 끌릴까여...전인화나 황신혜에게 끌릴까요...?
    늙거나 말거나..나라 여자가 다 내여자인 황제의 입장에선...그 명성 때문에라도 기본 옵션으로 취하고 볼 겁니다.

  • 14.08.09 19:11

    @궐한 구한말 까지 조혼을 했죠. 남자는 18살, 여자는 16살 넘어가면 노자가 앞에 붙게 되죠.
    조혼을 하게 되면 어린 나이에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게 되고 더 많은 출산이 가능하여
    쉬 늙게 되죠. 1980년대 60대는 완전 노인네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죠? 70대가 되어야
    비로서 노인네가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령인구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지요. 그것은
    결혼이 늦어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의학이 발달해서 인간이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조혼을 하지 않아서 수명이 늘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기황후 시대 50대면
    지금 50대로 볼 것이 아니라 지금의 60대로 보아야 합니다.

  • 작성자 14.08.05 19:48

    기왕후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고려여인으로 원나라 말기에 뽑혀 갔다가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쫓겨나, 순제는 저 멀리 사막밖으로 도주했다고 하니, 아마도 주원장군대에 포로로 잡혀 주원장의 후비가 된 것이라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자세한 문헌상의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조선사에서도 대륙사에서도 모두 숨겼다는 것인데, 아마도 성조(주체 : 영락황제)의 생모이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성조는 주원장과 마황후의 네째아들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하는데, 마황후는 죽을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 하니, 정통성에 문제가 될까봐 그랬겠지요. 다른 곳에서는 또 자신의 생모가 고려인 공비라고 했다고 하네요.

  • 14.08.08 18:57

    기록이 없다니요...?
    제가 전에 틀림없이 올렷습니다.
    순제와 기황후는 사막으로 도망쳤다가 명나라군이 급습할 당시는...
    아유시르다라만 하라호름으로 갸우 도망쳤다 명기됐고...
    급습해 보니...이미 순제는 이질병으로 죽은 후였고...
    왠 황제로 ...원비(元妃.황후)와 여타 환세손들이 포로로 잡혓다 명기했습니다.
    물론...극히 일부 사서들이지만...기록이 아예 없진 않은 겁니다.

  • 작성자 14.08.09 20:15

    @궐한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기황후를 마포대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설명입니다. 명군에 일부 궁녀들과 비빈 및 황자들도 포로 잡혔다는 근거는 예전 제가 원사와 명사를 일부 번역, 설명하는 곳에서 이미 설명드린 내용입니다. 위에서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다고 한 것은 "공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14.08.06 01:17

    어디서 보니 경주이씨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신상은 더 이상 찾진 못했습니다.

  • 작성자 14.08.06 15:22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역사서를 있는 그개로 보는 것도 좋으나, 그 이면이 더 중요한 시기도 있다고 봅니다. 역사서란 당연히 승리한 자의 몫이니, 그 배면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기록은 아주 귀할 정도로 서로간에 피했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여 기록치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 것 아닌가 합니다. 또 명이란 나라가 조선이의 다른 이름이냐, 아니면 사천성과 감숙성 일부지방의 제후국이었느냐 하는 것에 따라 또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경우겠죠.

  • 14.08.08 19:00

    찾아 보면 찾아 볼수록...
    명(明)은...조선이 내내 모신 상국이지...조선의 조대명도 아니요...조선의 제후국도 아닌건 전 분명하다 봅니다.

  • 작성자 14.08.08 20:31

    @궐한 사천성에서 황제를 참칭했던 자들을 체포하여, 고려 국왕에게 보낸 처사는 무슨 이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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