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에서 나온 유리 조각 -
1. 이것은 뭐지?
어느 날 문득 왼쪽 손목의 접히는 부분에 딱딱한 것이 잡혔다. 아니
이것이 뭐지?다시 한번 손으로 만져보면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그곳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외부에서 들어간 흔적이 없었다.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딱딱한 어떤 것이 만져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져도
수년 동안 그리 통증이나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안에 어떤 외부 물질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딱한 것이 만져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십 수년이 흐른 후 50대 후반이 되면서 부터는 단단한 것에 압박을 가하면 이제는 어떤 통증 같은 것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도대체 이 손목에 무엇이 어떻게 들어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1995년 1월달의
그 사건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1993년
5월 1일에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994년 2월 25일에 큰 딸 하영이가 세상에 빛을 보았다. 당시만해도 35세에 결혼한 아내는 36세가 되어 노산을 걱정해야 했다. 해산일이 가까워오자 아내는 산부인과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해산할
채비를 하고 산부인과로 간 것은 아침 9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아내는
서서히 해산의 진통을 느끼기 시작하였지만 점심이 지나고 나서도 오후 4시가 넘어서도 아이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통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아이가 세상에 나오려 하지 않아 김호철 산부인과 선생님은 산모의
나이가 많음을 고려하여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수술을 하였다. 아이가 세상을 본 것은 2월 25일
오후 5시경이었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아이의 돌을 한달쯤 남겨두었을 무렵 아내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 가고자 했다. 그 동안 기도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다녀왔으면 하였다. 친구인
최헌규 목사도 함께 가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아침 일찍 최목사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같이 가기로 하였던 최목사의 차량이 문제가 생겨 아침에 차량 수리를 맡겼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상황이 이런데 억지로 가지말고 다음에 가자!고 하였다. 아내는 기다려보자. 차가 곧 고쳐질 것이라며 고쳐지면 그때 가자고
하였다. 오후 4시가 넘어 차가 수리되어 나왔다. 오후 네시가 넘어 우리는 태백 예수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겨울이라 생각보다 일찍 밤이 찾아왔다. 운전을 좋아하는 최목사가 운전을 하느라 고생을 하였다. 아내가 준비한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며 굽이굽이 길을 돌아돌아 가고 있었다. 차 안에는 운전하는 최목사와 나와
아내 그리고 돌을 맞이하는 하영이가 다였다. 하영이를 품에 앉고 가던 아내는 팔이 아프다며 하영이를
나에게 건넸다.그리고는 앞자리의 조수석에 앉아 최목사가 졸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였다. 경기도 양평을 지나고 충청도의 제천을 지나고 강원도 영월을 지나고 태백에 들어선 것은 12시를 10분 정도 남겨둔 상황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칠흙 같은 밤이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지만 길은 4차선의 넓은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피곤해서인지 최목사는 거의 직선 같은 도로였는데 휘어진 도로로 착각하였다. 그래서 갑자기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빨리 달리지 않아서 그만한
것이 다행이었다. 관성의 힘을 이기지 못한 봉고는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하다가 옆으로 전도되면서 일정한
부분 앞으로 끌려갔다. 아내는 머리를 앞 차 유리창에 박았으며 최목사는 운전대를 잡고 포기하듯 하였다. 순간 아내는 “안돼요! 하나님”을 외쳤다. 앉아서 딸 하영이를 보듬고 있던 나는 옆으로 전도된 차
안에서 하영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의 유리들이 튀었고 하영이를 싸고
있던 포대기도 바닥에 끌려 찢어졌고 그 밑을 바치고 있던 나의 왼팔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하영이를
감싸고 있던 포데기 덕분에 그리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 나중에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차가 전도되면서
나의 갈비뼈 두개가 나갔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런 사고에도 하영이는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고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고 잠들어 있었다. 뒤를 따르는 차가 없었기에 2차적인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차의 앞 유리에 머리를 부딪친 아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우린 괜찮아 하면서 최목사를 재촉하여 빨리 나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차가 옆으로 누워
있기 때문에 앞문이 쉽게 열려지지 않았다. 나에게도 괜찮냐며 빨리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였다. 나는 왼손에 피를 흘려서인지 더욱 춥게 느껴졌다. 나보고 빨리 빨리
나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아이를 받아 들었다.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영화에서 보면 사고 후에는 차가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막 서둘렀다. 감사하게도 얼마 후에 차 한대가 와서 뒤에서
멈췄다. 그들은 비상등을 켜놓고 우리 차에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재빨리 다가왔다. 그리고는 괜찮냐?고 물으며 차가 옆으로 누워 있어서 잘 안열리는
차 문을 밖에서 열어서 우리는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 차의 운전사에게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냐고 하였더니 가까이에 장성 병원이 있다고 하여 운전자는 그곳으로 안내하여 주었다. 우리는 장성
병원의 응급실로 들어갔다. 장성 병원은 주변에 탄광이 많아서 주변에서는 유명한 병원이었다. 우리는 예수원에 교통사고가 나서 가지 못하게 되었고 지금은 치료하느라 장성 병원에 있다고 연락을 하였다. 갑자기 연락을 받은 예수원 식구들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에 장성병원으로 우리를 방문하여 주었다. 아내는 예수원에 가서 하영이의 돌잔치를 하려고 준비했던 것들을 그들 편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최목사님 댁이 있는 신림동 주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곳에서 거의 한달을 입원하였다. 하영이의 돌잔치는 병원에서 하게 되었다.
왼쪽 손목 근처에 딱딱한 것이 만져지는데
통증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목 부근을 누르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금씩 진물이 나기 시작하였다. 일부러 눌러보았더니 누런
곪은 물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고민이 되었다. 엑스레이를
찍는 병원 앞까지 갔으나 나는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주변에 있는 클리닉에 갔다가도 그만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왔다. 탁구를 칠 때면 그 부분에 통증이 느껴졌다.
차를 타고 오는데 손목 부근에 통증이 왔다. 그리고 주변에 고름도 자주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한 생각이 들었다. 손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힘을 다해 짜보고 싶었다. 그
부근에 누런 색갈이 있어서 손으로 짜면 무엇인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여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는 안경을 닦는 수건을 준비하고
오른손으로 주변을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조금이 통증이 있었지만 손에 힘을 주어 그 부근을 눌렀다. 고름이 나오더니 이네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피가 나고 무엇인가
안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있는 힘껏 주물렀다. 그러자 그
안에서 차유리 깨진 조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프기는 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눌렀다. 한바탕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유리 조각이 나왔다. 작은 차유리 조각의 파편이었다. 내 몸안에 20여년 동안 있었던 것이다. 손목의 통증도 없어졌다. 유리가 나오고 난후 그 자리에는 오랫동안 유리를 간직했던 그곳에 유리를 내보낸 흔적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