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에서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열강의 이권 쟁탈장으로 변하였다. 영국의 홍콩조차,러시아의 여순항 점령, 독일의 청도 점령,일본의 대만 점령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만주를,프랑스는 광동-광서-운남을, 독일은 산동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았고 영국은 양자강의 전 유역에서 권리를 확보하였다.
중국 영토를 오이 나누듯이 분할하는 위기의 시대가 온 것이다.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의 실패로 중국을 변화키려는 노력은 민중에서 싹트고 있었다.
독일의 산동침략과 그에 따른 철도 개설 및 이에 필요한 토지 매입,분묘파괴,민가철거 등으로 인해 흉흉한 민심과 때마침 일어난 산동지역의 자연재해와 기근이 겹치면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의화권은 권술과 이단 종파가 결합하여 민간사회에 뿌리를 내린 화북의 전통적 비밀 결사로 1898년경부터 주위의 농민, 실업자를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공개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운동은 산동지방뿐만 아니라 인근의 하남과 직예에도 확산되어갔고 부청멸양(扶淸滅洋)이란 구호를 내걸고 천진과 북경으로 진출하면서(1900년) 기독교와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의화권이라는 무술로 洋人들이 사용하는 총,포탄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서태후도 이들의 힘을 빌어 양인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들을 지원하게 되고 열강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독일,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 8개연합국은 자국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공동 출병하여 북경으로 들이닥치자 서태후와 광서황제는 도망을 간다.
이에 따라 의화단 운동도 종결을 맞이하였다.
연합국의 무력에 굴복한 청정부는 열강과 신축조약(1901년)을 맺었으며, 이 조약에는 의화단 책임자 처벌,북경과 그 주위의 외국군 주둔 인정,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30년간의 9억 8천만량의 배상금 지불, 새로운 통상조약 체결등이 들어있다.
비록 의화단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민중의 힘에 전율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고 청조를 인정한 이유는 의화단 사건으로 나타난 중국 민중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열강의 중국 분할 쟁탈전으로 인한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는 안전판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청조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초 선전포고시 각 지방 督撫에게 경내의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고 군대를 북상시켜 북경을 보호하라고 지시했지만 대부분의 지방장관은 이 명령을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전란은 북경일부 지역에 한했으며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고, 중앙정부의 명령을 지방관이 불복해도 된다는 정도로 국가의 정세가 어지러웠다.
결국 중국은 열강에 의한 영토의 분할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이 중앙통치권을 잠식하는 사태로 나아가게 된다.
비록 수 많은 농민이 제국주의의 대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으나 이 전란으로 청조의 보수세력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그 반동으로 정치적 혁신운동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
또한 중국 인민들은 만청정부가 중국 민족을 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만청정부 타도를 위하여 총궐기하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아편전쟁에서~의화단 운동까지 근대 중국 역사의 일부분 이군요? 잘 보고갑니다.계속 이어질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