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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불이 自他不二 |
자타 自 他 |
진공 |
묘유 |
자타불이이면서 자타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불이만
압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진리는 진리고 나는 나다. 그래서 내
자력을 길러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참 자력을 타력이 절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고, 아무리
타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자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중에서 너무 맹신적 타력에 의존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지금 원불교의 문제는 너무 자력을 생각한 나머지 타력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종종 봅니다. 그것은 결국 신앙부분에
있어서
< |
보이는 = 사은 |
보이지 않는 = 법신불 |
‘보이는’ 이것을 ‘사은’ 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이것을 ‘법신불’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법신불 사은이시여’ 이렇게 표현하지요.
이걸 하나로 묶어서 사실은 법신불이 ‘보이는’ 에 포함되고 사은이
‘보이지 않는’ 에 포함 됩니다.
그런데 ‘법신불 사은이시여..’ 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사은’이시여 아니면 ‘법신불 이시여’ 하지. 왜? 법신불 사은이시여 라고
그럽니까? 법신불은 보이지 않는 전체 위력 마치 빙산과 같습니다.
빙산의 물위로 보이는 부분이 사은이고 물 밑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부분이 법신불입니다. 보이지 않는 음계의 위력이라고 합니다.
사은에 불공하는 것은 실지 불공이라고 하고 기도는 진리불공입니다.
즉, 기도는 법신불에 불공하는 것입니다. 법신불 전에 하는 것이
기도이고 허공법계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인선진님이 영산에서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하는 기도를 올린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허공법계에, 진리 전에, 음계에 하는 것입니다.
불공은 양계와 음계가 하나가 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양계
보다는 음계에 하는 것이 주가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진리불공이 주인데, ‘뭐, 법신불이
사은인데, 사은 당처에만 잘 하면 되지..’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타난 것보다 더 큰 것이 보이지 않는 음계의 세상입니다. 여기에
주로 맥을 대서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럼 여기서 기도의 원리는 무엇인지 설명을 해야겠죠? 원문을 하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심고라는 것은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비는 것이고, 기도는
마음으로 비는 것은 물론이요, 실지로 어떤 현상이나 대상, 그리고 대중
앞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심고 라고 할 때는 조석 심고, 즉, 혼자 어려울 때, 힘들 때 비는
것이고, 기도는 대중 앞에서 실지기도도 있고 묵상기도도 있고
다양합니다. 묵상기도는 심고와 통한자리입니다.
심고하는 원리가 앞에 나오는데 <사람이~ > 이것은 무슨 소리에요?
기도는 사람이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야기 하면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출세하여~ > 출세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라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기로 하면
< 자력과 타력이 같이 필요하다 >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 자력은 타력의 근본이 되고 타력은 자력의 근본이 되나니 > 라고 되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자신할만한 타력을 얻은 사람은 > 자신할만한
타력이란 두 가지, 보이지 않는 음계의 법신불과 보이는 양계의 사은을
말합니다. 그래서 법신불 사은을 자신할 만한 타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 얻은 사람은 마치 나무 뿌리가 땅을 만남과 같은지라, >
나무뿌리가 땅과 물과 영양분을 만난 것입니다. 만약에 만나지 못하면
말라 비틀어져서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할만한 타력을 만나셨나요? 사은님 만났잖아요.
그리고 사은의 이면에 음계가 있는 것입니다. 사은 안에 음계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법신물의 위력과 사은의 위력, 그리고
우리는 그 법신불 사은이 하나되는 위력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나무 뿌리는 나를 의미하고 땅을 만났다는 것은 내가 타력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나무 뿌리인 내가 타력인 땅을 못 만나면 힘을 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내가 법신불 사은의 타력을 만나지 못하면 땅을 못 만난 나무 뿌리같이
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 자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타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젊을 때는 그 생각을 잘 못합니다. 젊을 때는 ‘내가 잘하면 되지’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나서 창조적이고 주체적이고 개성을 중요시하고
‘나는 아니오’ 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아 보면 나는 정말 타력
속에 사는 사람이고 타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통 범부는 인맥의 타력, 또는 권력의 타력, 아니면 인연의 타력,
원근친소에 끌리는 타력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타력입니다만,
더 중요한 건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타력을 말하듯이 우리는 법신불의
타력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이름을 하느님이 아닌 법신불이라고 해도 똑 같은
분입니다. 기도교인들이 하느님을 찾고 기도하면 위력을 많이 주고
원불교인이 법신불을 찾고 기도를 하면 위력이 없겠습니까? 그분이
그분입니다.
< 우리는 자신할만한 법신불사은의 은혜와 위력을 알았으니,- >
우주만유의 본원이라고 합니다. 자신할만한 타력.. 그러니까 봄이 오게
하고 여름이 오게 하고 비가 오게 하는 분이 법신불입니다.
음계는 법신불의 은혜, 더 들어가서 양계로 나눠보면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라는 사은의 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엊그제 천주교에서 강의하면서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아시는 분?’
하고 물었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 말고, 내 눈앞에 계신
하느님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겠다’ 고 했습니다.
음계 |
법신불 은혜 |
양계 눈앞에 있는 하느님 |
천지 |
부모 | |
동포 | |
법률 |
그것은 바로 첫째, 천지다. 여러분이 먹고 마시고 밝은 빛을 얻고
풍운우로상설로 살고 있는데 그 은혜와 위력이 없이는 우리가 일분
일초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얼마나 위력이 있는 하느님 아닙니까?
양계에.., 천지에 기도를 한 사람은 천지가 보호를 해줍니다.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동기상응이라는 이치가 있습니다.
이 중에 어떤 사람의 기운이 밝은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의 기운이
밝아집니다. 밝은 기운이 따라 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얼굴이
칙칙하고 어두우면 주위의 기운을 어둡게 만듭니다.
운전을 하는데 옆 사람이 졸면 운전사도 같이 졸립니다. 그것이
동기상응입니다. 같은 기운은 서로 응해준다는 것입니다. 천지님한테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운이 응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전기와 전기가 통하듯이 기운이 응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정성을 들이면 반드시 그 정성에 따른 보은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인과 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무정한 땅도 거름을 하고 밭을
매주어서 공을 들이면 곡식이 더 많이 열린다고 하잖아요? 식물에
음악을 들려 줘도 잘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령한 우리 인간이 가장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깨끗이
심신을 재계하고 사심이 없는 마음으로 천지에 기도를 하니 그 천지가
‘그래 네가 받아라’ 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세계는 참
대단합니다.
셋째, 변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얼음 조각에 불을 가져가 온도를 높이면
녹아서 물이 됩니다. 그 물에 계속 불을 떼면 수증기로 됩니다. 현상의
세계에서 햇빛의 따뜻한 기운에 의해서 얼음이 물이 되고 그 물이 다시
수증기로 되는 이치가 있듯이, 우리 사람이 간절하게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변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막혔던 기운이 풀리기도 하고
안 되는 일이 기적처럼 되기도 합니다. 기적은 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적은 초과학 이라고 합니다. 과학을 넘어선 과학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한 효자가 한 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는 부모님을 위해서
강가에서 기도를 하니 잉어가 물 위로 툭 뛰어 올라왔다고 하잖아요?
그런 예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런 함께하는 기운 또는 공을 들이는
간절한 마음에는 묘하게 변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자타력병진입니다. 모든 일과 물건과 자연적인 것들은 전부
자기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한 사람, 기어
다니는 벌레 한 마리까지도 저 혼자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리 이타로 상부 상조로 서로 화합 합력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타력에 비는 기도를 하면 그 기운이 응해 줍니다.
시험 공부하는 사람 A와 B가 있습니다. 그 둘은 평상시에도 점수가 똑
같고 똑 같이 시험 공부를 하는데, A는 기도를 하고 B는 기도를 안
했습니다. 기도를 한 A가 10~20% 정도 점수가 더 나옵니다. 하도 안
믿으니까 이런 소리까지 하는데, 사실입니다.
옛날 대연각에 불 났을 때,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미리 나와서 사는
사람이 있고, 죽으러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적이 비슷한데
시험에 붙은 사람이 있고 떨어진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실지 불공이 더
중요합니다만, 비슷할 때는 진리 불공이 겁나게 위력적입니다. 그리고
진리 불공을 하고 실지 불공을 하면 실지 불공도 더 올라갑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만 잘 하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과 기도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시험 보러 가는 사람에게
‘앉아서 시험 보기 전에 눈을 감고 기도를 하라’ 고 일러줍니다.
‘법신불 사은님 오늘 시험 보러 왔습니다. 제가 하여간 그 동안 정성을
들인 만큼, 또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다 쓸 수 있도록 밝은 지혜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과 집착과 욕심으로 떨면서 하는
사람과 같겠습니까? 스스로 마음속에서의 지혜가 솟아 나오는 것도
다르고, 주위에서 사은의 기운도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주위에 적이 많으면 안 풀리는 이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기도를 해도 적이 많으면 적을 먼저 푸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마치 밥 먹은 그릇을 깨끗이 설거지하고 새 음식을 담아야지 진짜
배고픈 거지 아니고서는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담아주면 안 먹습니다.
먹다 토해 버릴 수도 있고 맛이 안 납니다. 그렇듯이 기도는 참회의
깨끗한 설거지 바탕 위에 내 소원을 간절히 올려 놓는 것입니다.
교만과 아만 또는 아전인수로 욕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설거지도 안하고 음식을 차리겠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하면 거꾸로 됩니다. 비워서 채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는 안
들어주십니다. 하느님도…
누구나 원하는 욕심과 발원이 있죠? 자기가 어떤 소원이 있으니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 안 아프게 해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빨리 이 병을 낫게 해 주세요. 곧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든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를 할 때, 구체적인 욕심과 발원만 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함으로써 이 사람이 무엇을 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더
큰 원으로 기도가 같이 나가줘야 합니다.
‘낫게만 해 주십시오’ 라고 만 기도하는 것은 아프니까 건강해 져서
다시 욕심나게 살아보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건강을
통해서 다시 대중에게 은혜가 되는 일을 하고, 이 세상에 나누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보다 큰 인물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욕심에서 끝나는 일차적인 기도가 아닌 보다 큰 서원을 향해서
나가줘야 합니다. 즉, 대중과 함께하는 기도로써 나가줘야 합니다.
자기의 욕심만 챙기려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천지의 은혜 속에서 살고 부모의 은혜 속에서 삽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종교가 없어서 기도를 안 해도 자식을 위해서는 기도합니다.
옛날에
동했다고 합니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 큰 일을 하는 사람, 큰 임무를 맡은 사람은
기도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 자력만으로는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 나의 부족함 또는 내가 아직 미치지
못함을 간절하고 절실히 느껴야 내가 타력을 빌릴 수 있는 적극성도
나오는 것입니다.
내 잘난 맛에 사는 교만한 사람은 기도를 안 합니다. ‘그냥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사실 한 편으로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내가 얼마나
타력을 함께 입어야 하는 존재인가를 알 때야 비로소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수행자는 ‘저는 이런 수행의 서원을 이루고 싶습니다.’ 하는 수행의 기도,
발원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왜 합동기도가 왜 좋은지 아십니까? 분위기가 올라가니까 좋은
가요? 비행기를 탔을 때, 단순히 ‘비행기에서 안 떨어지게 해 주십시요’
라고 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조금 까닭 있는 사람은 ‘이 비행기에 함께
한 사람들이 큰 사고 없이 가고자 하는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또 운전해 주는 기장도 맑은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즉, 내 원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원을
같이 빌어 줍니다.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빌어줍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합동천도재도 마찬가집니다. 내 조상만을 위해 천도를 비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천도재에서 내 영가 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가를 부를 때마다 내 마음으로 합력해
주고 축원해 줍니다. ‘모든 영가들이 해탈 천도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같이 빌어줍니다. 그러니 기도도 함께 할 때 훨씬 위력이 있습니다.
동포가 함께 해 줄 때 얼마나 좋습니까?
축구 할 때 운동장에서 응원 잘해주면 경기력이 30% 올라 간다고
합니다. 상대에 비해서 실력이 약간 부족한 팀이라도 응원을 잘하면
오히려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함께하는 기운입니다.
우리는 이왕이면 내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천지에 기도를 해서 천지의
기운을 받고, 부모의 위력과 은혜에 함께해서 부모의 기운을 받고, 또
동포에 기운을 주고 기운을 받아서.. 같이 주고 받고 하는 것입니다.
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동포의 범위는 사•농•공•상•금수초목 다섯 가지입니다. 제가
천주교인들에게 동포은을 설명하면서 - 그 분들(천주교인들)은 산속에서
일하며 농사짓는 분들이었습니다. – 우리 스승님은 원망하면서 일하면
독사에게 물리기도 한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죽어라
웃었습니다. 원망생활을 하면 미물 곤충한테도 피해를 입는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내가 금수초목까지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바로 나한테 은혜가 되고 서로 돕습니다.
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법자, 치법자, 스승님, 보이지 않는 규범들,
또는 성자의 법에 같이하도록 기운을 합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법률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경우 없이 하면 법률이 위력을
발휘해서 벌벌벌 떨게 만듭니다. 피하고 싶은 대상이 법률이냐 정말
고맙고 보호받는 대상이 법률이냐. 그것은 내가 기도하고 그것을 잘
지키려고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법률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알아서 피하는 대상이 되고 내가 알아서 고마운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똑 같습니다. 천지도 내가 잘 보호만 해주면 천지한테 엄청난 은혜를
입는데, 내가 보호를 못하고 함부로 하니까 지금 환경이 난리잖아요?
우리가 천지에 기도하고 보은하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부모님께 효도했건만은 사람들은 나에게 효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부모님께 불효를 하고 다른 사람한테 어떤 피해도 안
주었는데도 다른 사람은 나를 불효자다. 못된 놈이라고 합니다.
내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불효하니까 내 부모가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사은 전체가
효도를 하냐 불효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기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삼세로 들어가면, 내가 내 부모한테 잘했건만 내 자식도
나한테 잘하고 내생에 나는 좋은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알고 보면
인과로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이 원만한 사은으로써 신앙을 근원으로 삼고 > 라고 했죠. 그런데
즐거운 일을 당할 때 보통 어떻게 해요? 야호! 한 잔? 보통 사람은
즐거운 일을 당하면 술집이 거덜나죠? 대종사님은 즐거운 일을 당할 때
뭐 하라고 했어요?
내가 청년들 생일 맞이하는 거 보면 웃겨 죽겠습니다. 그 생일을 맞이
하려면 부모의 정성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엄마는 오랫동안 뱃속에서
키우고 출산 할 때 얼마나 큰 고통을 이기고 낳았습니까? 그리고 사은의
엄청난 은혜 속에서 태어난 몸입니다. 그러면 생일이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사은님 고맙습니다.’ 라고 기도하고, ‘부모님 고맙습니다’ 라고
부모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사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기도도 올리고 기도비도 내서
사은에 대해서 보은 행위를 해야지, 생일이라고 좋아하면서 한 잔
하자고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것은 사은으로써 신앙의 근원으로 삼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일에 기도도 하지 않고 기도비도 안 내면서
무슨 신앙의 근원으로 삼겠습니까?
결혼을 해도 마찬가집니다. ‘법신불 사은님 제가 사은님의 은혜 속에
여태 자라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서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일이 있을 때, 제가 법신불 사은의 위력에 최대한 감사와 보은 생활을
하고 또 수행을 통해서 사은님과 함께하면서 살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고 결혼하는 것은 사은의 은혜와 보은을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즐거운
일을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도 안하고 둘이 좋다고 정신 없이 살면서 서로 자기 요구만 하면서
기운 싸움합니다. 서로 이기심으로 결혼해서 치고 받고 하니까 몇 년
안에 30% 이상이 이혼하는 것 아니겠어요? 자기가 잘 나서 시험에
합격하고, 자기가 잘 나서 결혼을 하고, 자기가 잘 나서 생일을
맞이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생일 때, 핸드폰 문자나 카페에 올리는 글을 보면 압니다. 저는 항상
‘너를 만나게 해주셔서 사은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문자를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원만한 신앙의 근원을 삼은 사람이죠. “야호! 생일이다’
라며 축하해주고 케이크 사다가 ‘~축하해! ~축하해!’ 하는 것은
사은으로써 신앙의 근원으로 삼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뻐하되 그 즐거운 일의 근원이 무엇이냐? 바로 사은의 은혜 속에서 그
즐거운 일이 나오지 않았느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생일을 맞이해서 위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생일이라고 한 잔 하는 사람은 생일을
맞이해서도 위력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은님은 위력을 잘 줍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주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줍니다. 생일날에 붕붕
떠서 헛 짓거리 하다가 위에 구멍이 난 사람도 있습니다. 달라고 하는
데로 줍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것이 있는데, TV 보면 상 받고 ‘어머니에게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하고 하는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누가
상을 받고는 ‘PD님 감사합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 ‘ 그런 소리를
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뭐를 많이 주워 세냐?’ 고 하지만, 사실 주워
세야 맞습니다.
왜? 그런 은혜 속에서 자기가 상을 받았거든요. 사실 그렇잖아요? 그
은혜를 모른 사람은 ‘뭐가 저렇게 복잡하게 말을 하냐’ 고 하지만,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이 상을 받기 위해서 아주 많은 사람이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합력하고 공을 들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줄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귀찮은 사람은 은혜를
잘 모릅니다.
즐거운 일을 당할 때는 사은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은님, 제가 오늘
이렇게 기쁜 일이 있는데 사은님 덕택입니다. 사은님 은혜 속에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 감사의 기도를 올린 사람은 더 큰
즐거움이 계속 오게 됩니다.
그런데 싸가지 없이 감사도 안하고 퍼 놀아버리면, 즐거운 일이
바뀝니다. ‘해생어은’ 이라고 합니다. 은혜 속에서 해가 나옵니다. 즐거운
일 속에서 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괴로운 일을 당할 때는 뭐 하라고 하셨죠? 괴로운 일을
당하면 술 한 잔 해 버려야지요? ㅎㅎㅎ.. 여러분은 괴로운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세요? 방바닥을 치거나 문짝을 부수고, 때로는 부모를
원망하고 때로는 한 잔하고, 때로는 전화도 끊고, 때로는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고 때로는 울어버리고, 때로는 다른 이에게 나팔을
불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힘들면, 자기 혼자 사은님께 참회의 기도를 해야
하는데, 남들은 피곤해 죽겠는데 저녁 내내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 괴로운 일을 당할 때는 - 저녁 내내 나팔을 불지 말고, - 사죄의
기도를 올리고, -> 라고 했습니다. 왜 괴로운 일이 생겼는가? 그 근원을
발견해 보아라. 괴로운 일은 반드시 내가 무언가를 실수 하지 않았는가?
내가 뭔가를 잘못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괴로운 일이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시험에 떨어졌다면 내가 공부를 안 한 것 아닙니까? 오늘 축구를
보세요. 파라과이하고 일본하고 하는데, 그 전에 세 팀이 다
올라갔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이 올라갔습니다. 어쩌다가 이
팀이 올라간 것입니까? 올라갈 팀이 올라간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현상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억울한 경우가 있습니다. 갑자기 자식이
죽었다던지 갑자기 교통 사고로 부모가 떠났다거나 누구에게 말도
꺼내기가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 나에게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로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그때 돈을 잃고 건강을 상하게 합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일로만 손해를 보면 되는데, 그 일로 인해서
건강을 상하게 하고, 재산을 탕진해서 악순환으로 물고 들어갑니다.
인과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일이 왜 왔을까?’ 삼세의 긴과를 생각해 볼
때는 반드시 필요한 곡절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났을까?’,
‘내가 왜 이 여자를 만났을까?’, ‘나는 왜 이 부모를 만났고, 왜 우리
자식에게 이런 일이 생기고, 왜 우리 부모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삼세의 인과를 생각해 볼 때는 반드시 참회가 됩니다.
그러나 삼세의 인과를 모른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다 잊어버립니다. 누구에게 뭐라고 하면 자기는 잘
한 것도 많은데 왜 그러느냐? 고 합니다. 지금 잘못 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고통이 왔다는 것은 그 잘못한 것에 따른 고통입니다.
복은 복대로 즐거운 일이 오고, 죄를 지은 것은 그대로 괴로운 일로
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전생에서 온 것은 내가 이 생에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리고 현생에서도 기억 못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은 남들만 잘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불량한 사람들은 당연히 받을 것도 더 괴로워합니다. 왜? 이기적이니까..
자기가 안 하고 더 바라기 때문에.. 잘못 해 놓고는 잘못한 줄 모르니까..
그래서 괴로워하면서 조상 탓하고 묏자리 찾고 점쟁이 찾습니다.
<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결전될 심고와 혹은 설명 기도를
올리며, -> 참. 어려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람이 결정 한다는 것은
취사를 한다는 것이고, 취사를 하려면 깊은 연마가 있어야 합니다. 깊은
연마를 하려면 마음이 온전해야 합니다. 마음이 온전 하려면 기도도
하고 선도 해야 합니다.
맑은 마음이어야 깊은 생각이 되고 깊은 생각이 되어야 결정을 제대로
할 수 있죠? 그런데 보통 자기의 주관과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사고에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자타력 병진을 해야 합니다.
내가 법신불 사은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법신불 사은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다
보면 묘한 위력이 나와서 이렇게 하라는 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응답’ 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때는 지자,
단장이나 전문가에게 물어 봐서 확실하면 하고 그렇지 않다면
스승님에게 물어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진로 결정을 할 때 가장 멍청하게 결정
합니다. 그냥 쉽게 결정합니다. 기도를 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결정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학한 다음에 과를 잘못 왔네..? 학교를
잘못 왔네..? 재수를 할까..? 삼수를 할까..? 하고 난리를 칩니다. 결정할
때는 반드시 깊은 생각과 기도 속에서 나와 줘야 합니다.
결정은 쉽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정을 할 때 기도를 활용하면 큰
실수는 안 합니다. 설사 정확하게 못 짚었어도 크게 손실은 없습니다.
그 다음,
< 난경을 당할 때에는 순경될 심고와 혹은 설명 기도를 올리고, - >
난경, 힘든 일, 고비가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병이 오거나 훼방꾼이
있다던가 무엇이 안 풀리면 어렵습니다. 이때 내 자력으로 한계가
있다면 법신불 사은의 타력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훨씬 수월합니다.
순경될 심고는 난경에서 풀리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난경이 오면 순경이 되게 해 달라고 했죠? 그럼 순경이 오면 어떻게
되요? 간사하고 먕녕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심고와 설명 기도를
올리라고 했습니다.
순경은 잘 풀리는 것입니다. 합격도 하고 돈도 벌고 예쁜 여자도 만나고
자식도 건강하고 애들 공부도 잘하고 아파트도 로얄틍에 잘 당첨이 되고
유학도 가고 박사도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사은님을 잊고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압니다. 내가 열심히 했더니 되는 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것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주위의 타력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로, 누가 고시에 합격했다든지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땄을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TV에서 카메라가 어머니
비춰주고 아버지 비춰주고 동문 비춰주고 옛 선생님 등을 다 비춰줍니다.
그것은 그 한 사람이 시험에 합격하고 금메달을 따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도움이 되고 자기의 노력이 함께해서 그 일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때 사은으로써 신앙의 근원을 삼은 사람은 간사하고 망녕된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심고와 설명 기도를 하고 그것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
교당에서는 누가 어느 회사에 합격했을 경우에 공양을 한 번씩 하죠?
그것이 좋은 문화입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나 혼자 내 능력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정말 함께 한
것이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사은의 은혜를 알거나 국이 큰 사람은 간사하고 망녕된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은의 은혜를 모르고 국이 작은 사람은 망녕된
곳으로 가기 쉽고 도도해집니다. 심고는 커녕 바쁘다고 교당도 안
옵니다. 그리고 잘 풀리니까 해외 여행을 갈까? 스킨 스쿠버를 할까?
스키를 탈까? 골프를 칠까? 이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사은의 은혜 속에서 잘 되었으니 이 권력과 재물을 어떻게 다시
사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풀어 쓰고 이것을 이용해서 보은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싸가지 없이 가는 것입니다.
요새 대학을 보내고 유학을 보낸 시골 부모들이 많은데, 잘 가르치는
놈일수록 부모를 안 모십니다. 이것이 그야말로 싸가지 없는 짓입니다.
자신이 유학을 가고 높은 공무원이 되는 것은 부모가 소 팔고, 논 팔고,
밭 팔아서 오직 자신의 자식을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인데, 간사하고
망녕된 곳에 딱 끌려버립니다.
부모님 모시려면 귀찮고 속옷 입고 거실에도 못 나가고 외식도 잘
못하겠다 고 하면서 안 모십니다. 지금은 모시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도 안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마음만큼은 그렇게 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순경이 되어서 자기가 잘 나가면 부모를 더 안
모시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집 똥 강아지가 아프면 병원에 얼른
데려가면서 부모가 아프면 얼마 들것인지 계산기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은의 은혜를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설사 이 사람이 학벌이
약하고 좀 멍청하고 배운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좋은 일이 생기면 자신이 사은의 은혜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답이 나옵니다.
사실은 어떤 일도 사은의 은혜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사를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사은에 보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은의 은혜를 내가 입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사은이 날 잘 도와주면 내가 사은에 보은 하겠다 고 합니다.
즉, 합격 시켜주면 내가 좀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반대입니다. 사실은 사은은 이미 주고 있습니다. 내가
모를 뿐이죠. 내가 주면 더 크게 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해
하시겠어요?
낚시를 할 때도 미끼를 던지면 고기가 잘 물지 않습니다. 낚시 밥을
먼저 뿌려야 합니다. 처음에 상당히 많이 뿌립니다. 먼저 줘야 고기가
와서 미끼를 한 번 물어줍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이기적이면 안 됩니다.
< 이 심고와 기도의 뜻을 잘 알아서 정성으로 계속하면 ->
기도는 시간은 짧게 기간은 길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심고 시간은 1분을 넘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헛 생각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1분 넘어가면 벌써 딴 생각 합니다. 기도는 한 30분 정도
하고 1시간 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간은 조금 길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주일, 백일, 천일, 만일 이렇게 합니다. 하루 하다가 마는
것은 별로 효과가 적습니다.
이렇게 < 정성으로써 계속하면 지성이면 감천으로 자연히 사은의 위력을
얻어 원하는 바를 얻어 낙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라. - >
이것을 열심히 해본 사람은 지성이면 감천으로 체험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어떤 신앙적 체험입니다. 이 사람들이 대개 월초 기도나 특별
기도를 꼭 합니다. 그럼 체험이 없는 어떻게 할까요? 신심으로 해야
합니다. 신심으로 하다 보면 위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심도 없고
체험도 없으면 안 하게 되고 악순환이 됩니다.
저는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오늘도 무사히> 라고 적힌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도 있죠? 스님이 기도하든, 목사님이 기도하든, 교무님이 기도하든,
불자가 기도 하든, 일반 시민이 기도를 하든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대종사님은 기도는 ‘진리로 가는 지름길’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는 신앙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수행적인 의미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할 때 ‘입정 하갰습니다’ 라고 하고
들어가죠? 그것은 기도를 할 때는 먼저 깨끗이 비우고 맑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의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빌 때
첫째, 감사하라. 둘째, 참회하라. 셋째, 나의 소원을 빌어라. 마지막
넷째는 그 원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을 반드시
같이 하라. 그것이 참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 고 하지 말고 이왕이면 큰
것부터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천권, 하늘의 권리를 잡아
쓰는 것이 기도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우주의 기운과
통하게 됩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들에게 이렇게 설명 했습니다. ‘여러분이 미사를 올리는
것은 칠식의 세계에서 팔식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고, 분별의 세계에서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 저장하는 것이 기도 입니다’ 아마도 맞는 말일
것입니다.
차분히 번뇌를 녹이고 분별심과 주착심을 놓고 상대의 세계를 넘어서서
맑고 조촐한 본래의 마음으로 기도를 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현상적인 소원을 이루어서 어떻게 더 크게 이 세상을
위해서 하겠다는 큰원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의사 고시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의사 고시에 합격해서 정말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명의가 되어서 삶의 희망을 넣어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이렇게 공부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냥 합격하게 해 주세요. 돈 벌어서 마음대로 외제차 몰고
돌아다니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가 이루어 지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 없겠죠? 여기에 딱 한 사람 있는 것 같아…
< 심고와 기도하는 서원에 위반이 되고 보면 도리어 사은의 위력으로써
죄벌이 있나니, 여기에 명심하여 거짓된 심고와 기도를 아니하는 것이
그 본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라. >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우기 마음은 습관이 일시에 고쳐지는 것도 아니요, 삼독(三毒)
오욕(五慾) 이 일시에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죠? 한 방에 안
됩니다. 탐진치를 유무념으로 잡은 사람은 쉽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법신불 사은님 제 습관을 백일 기도를 통해서 끝내 버리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잘못 된 기도요 진리에 위반된
기도입니다. 그것은 과욕이요, 이치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나쁜 놈이니 망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도 진리에 위반
된 것입니다. 또는 기도할 때 일체 생령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고는 안 하고 딴 짓거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방언 공사를 할 때 말을 잘 안 듣고 대종사님을 열
받게 한 두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한 사람은 술 먹고 방탕하다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대종사님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고 했는데 대종사님의 말을 안 듣고
달라든 사람들이 죽거나 사고를 당하니까 서서히 말을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기 전에 말을 잘 듣는 것이 좋아요.
- ㅎㅎㅎ
공적으로 발원한 사람은 묘하게도 사은이 크게 도와줍니다. 사심이
없으면 그 안에 위력이 있어서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에 훼방을 한다면 그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스스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이왕이면 그런
손해를 안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공적인 일을 순수하게 하는 사람을
비방 하거나 비난 하거나 시기, 질투 하면 그 폐해가 훨씬 큽니다.
대신에 그 사람에게 함께 빌어주라고 하면 훨씬 위력이 큽니다. 예를
들면, 종법사님께 내가 기운을 바치고 같이 하도록 하면 훨씬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종법사님 스스로 법력도 있고 우주와 기운도 통하지만
많은 사람의 기운을 받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에게 기운을
함께하고 연하면 내가 이루기 휠씬 쉽습니다. 반대로 불만이 많다면
거꾸로 위력이 있습니다. 나한텐 그런 것 없습니다. 나한테 그런
사람들은 좀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제가 완도 수련원에 근무를 할 때인데 60억짜리 큰 건물로 1800명이
거주 하는 곳 이어서 2억을 들여서 발라도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광주
양동 시장에서 청소 도구를 200~500만원씩 사는데 가게 주인이 물건을
보내주기로 하고 돈을 건네고 완도로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만 받고 물건을 안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세요. 죄송하지만 내가 성질 나면 안 되거든요. 당신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까 봐 미리 말해 주는 것이니, 좋은 말로 할 때.. ‘
- ㅎㅎㅎ
난 사실은 그 사람이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두 달에 광주에 올라갔더니 그 사장이 망해서
어느 점원으로 있었습니다. 내가 길을 가다가 만나서 ‘아줌마 내가 말을
했잖아. 나한테 그러면 안 좋은 일이 있다고.. 왜 말을 안 듣냐고..?’
라고 말하니, ‘몰랐어요. 미안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보입니다. 하물며 종법사님이나 큰 스승님들은 어떻겠어요? 알아서 해.
ㅎㅎㅎㅎ ^^
합력을 해도 그런 큰 일을 하는 사람, 공적으로 사심 없이 온 정신 육신
물질을 받치는 사람한테 합력해 주면 위력이 훨씬 크고 나한테도 공덕이
큽니다. 나 몰라라 하면 안 됩니다.
다음은 심고와 기도를 올릴 때 방법입니다. 천지 부모는 하감지위,
아래로 내려 주시라. 굽어보고 살펴주시라는 것이고, 부모 학렬입니다.
동포 벌률은 응감지위 입니다. 응감지위는 형제 학렬이고, 응해달라는
말입니다. 동포 법률이 응해주십시오. 기운을 함께 해 주십시오.
내가 기도문을 들어보면 깜깜할 때가 많습니다. 천지하감지위 할 때는
진짜 천지가 하감 할 것 같은 느낌과 정성으로 해야 하는데, 그냥
천지하감지위, 부모하감지위 라고 읽는다면 하감하겠어요?
간절한 마음으로 천지하감지위, 부모하감지위, 동포응감지위,
법률응감지위 라고 해야 응해지지요. 그렇겠죠?
각자의 소회, ‘바 소’자에 ‘품을 회’자입니다. 품은 바 라는 뜻입니다.
소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 심고와 기도를 하되 상대처가
있는 경우에는 묵상 심고와 실지 기도와 설명 기도를 다 할 수 있고,
상대처가 없는 경우에는 묵상 심고와 설명 기도만 하는 것이니, - >
실지 기도는 병원에 문병을 가서 환자를 앞에 두고 ‘법신불 사은님
아무개 교우님이 지금 병에 걸려서 아픕니다. ~ ‘ 이렇게 실지로
그분에게 기도를 해 주는 것을 실지 기도 라고 합니다.
< 묵상 심고는 자기 심중으로만 하는 것이요, 실지 기도는 상대처를
따라 직접 당처에 하는 것이요, 설명 기도는 여러 사람이 잘 듣고
감동이 되어 각성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니라. >
묵상은 심중으로 실지 기도는 당처에.. 설명 기도를 할 때는 대중이
합동으로 감동이 되도록 한다. 그래서 설명 기도를 할 때는 대중의
공약수를 뽑아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심고 하십니까? 월초기도도 좀 하시고, 참회기도도 좀 하시고,
수행을 위한 기도도 필요합니다. 우리 단장님들이 기도문을 쓰는데 웃겨
죽을 지경입니다. 일상적인 예기만 하는데 큰 서원, 세상을 위한 기도
그리고 자기의 수행과 사은에 대한 감사 한 주의 참회가 다 골고루 들어
가야 맞습니다.
질문하세요.
n 질문과 답변 =========================================
Q_오선허 : 시험을 앞둔 친구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그 친구가
시험에 합격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나요?
A_교무님 : 그 친구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이 더 큰 생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해야죠. 기도를 작게 하면 위력이 작아요.
그래서 구인 선진님도 창세를 위해서 기도를 했잖아요? 자타 불이가
근간입니다. 나와 우주가, 나와 이 세상과, 나와 사은이 하나입니다.
그 속에서 기도를 하고 우주의 천권을 빌려 쓰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 하나의 소원만 위해서 기도하고 합격하고 나면, 바이~ 바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Q_김혜관 : 조석 심고 할 떄, 목탁을 처음에 세 번치고 끝날 때 두 번
치는데..?
A_교무님 : 신입 교도 훈련 때 나오지만, 목탁을 세 번 치는 것은 뭐
하다가 빨리 정리하고 모이는 시간에 대한 것이고, 막판에 두 번 하는
것은 첫 번째는 정신의 스승에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인사는 육신의
부모에게 하는 것입니다. 삼세의 스승님과 삼세의 육신 부모에게 하는
것입니다.
심고만 잘해도 좁쌀만한 영단이 뭉친다고 하잖아요? 첫 번째 삼세의
스승님과 기운을 통해도 스승인 제불 제성의 심인의 위력이 나한테 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사가 삼세의 육신 부모잖아요? 내가 전생에 있고
이생에 있고 또 몸을 받아서 태어나야 하잖아요? 내생의 부모까지 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기도입니까?
.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도 없이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의 성질대로 사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타이핑:
편 집:
950629_화공_61_제3 수행편_제9장_심고와 기도.doc
|
첫댓글 감사합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
교무님 법문을 경청할 수 있어서 항상 기쁘고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본문 중에서 '학렬'은 '항렬'의 오타인 듯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