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필의 문제점
어떤 수필들을 읽을 경우에 우리가 수필이라는 장르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수필은 픽션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크게 가공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상상력을 쥐어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이야기'라는 말이 스스로 함정이 됩니다. 가령 소설가는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무슨 이야기를 하든 일단 픽션으로 접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수필은 읽는 순간 수필가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읽습니다. 내적인 은밀한 이야기는 자칫 루머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연유로 필화 아닌 필화를 겪어보지 않은 수필가가 드물 겁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밀한 이야기들을 피하게 됩니다. 가장 치열해야 할 내적 독백이 무익무해한 주변 한담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미담 수준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볼 힘을 잃게 되어 버립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진솔한 이야기가 나의 수치가 되고 불명예가 되어버리는 기묘한 역설이 성립됩니다. 이러한 압박 하에서 수필은 자칫 예쁜 자기 포장의 글이 되거나 오히려 자아가 빠진 제3자적 글쓰기로 달아나 버립니다. 우리는 어쩌면 진실의 힘을 픽션에게 내어줘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시에서 산문(수필) 쪽으로
문학은 상상력의 예술입니다. 수필의 문학적 근거 중 하나는 시적 상상력입니다. 이미 우리는 산문시(시적 산문)라는 하위 장르 개념을 시인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산문시라는 영역을 시인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은 저의 기우에 불과할까요? 지금은 탈장르의 시대입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도 산문시 영역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산문시의 본질이라든가 정체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왜 시인들은 시에 산문성을 도입했는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수필가들은 어떻게 시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 현대시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많은 독자들을 잃고 있습니다.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시가 너무 난해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단은 한 시인이 난수표 같은 시를 써 내놓으면 나머지가 그 해독에 열을 올리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추상미술의 늪과 비슷합니다. 이해하는 척 포즈라도 잡아야 하나 엉거주춤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제목이 그림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제목으로 희미한 그림자라도 찾아서 작가의 숨은 의도를 짐작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시인들도 일종의 자구의 노력으로 시에 산문성을 도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선 산문은 고도의 압축이나 생략, 또는 비유가 없는 일반적인 풀이 글입니다.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란 의미죠. 두번 째, 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떤 서사를 도입하기가 시의 형태보다는 산문의 형태가 보다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추상미술에서 희미한 형태의 그림자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었듯이 서사적 요소는 시의 이해에 많은도움을 줍니다. 물론 시적 서사는 소설적 서사와는 많이 다릅니다. 인물, 배경, 정황 등이 중요한 요소이지만 소설적 서사만큼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시에 등장하는 인물을 예로 들어 봅시다. 백석의 경우 무너진 정주 성터를 넘어오는 청배 장수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의 또다른 시 '고향'에서는 진맥을 하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흰수염을 길게 기른 한의사가 등장합니다. 이 인물들 만으로 우리는 끝모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시가 주는 메시지에 공감하게 됩니다.
단지 어떤 정황이 서사가 되기도 합니다. 이상의 '오감도'에 13인의 아해가 나옵니다. 어떤 사건이나 갈등도 없습니다. 다만 두려운 아해와 두려워하는 아해가 있다는 정황만 주어집니다. 무서운 귀신 이야기처럼 누가 귀신인지 모를 따름입니다. 요즘 인기있는 좀비 영화는 오늘날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어떤 놈이 총질을 할지, 칼부림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상의 '13인의 아해'는 단지 어둠 속에 아해들이 있다는 정황만으로 캄캄한 절망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백석과 이상을 가장 중요한 산문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에 서사적 요소를 도입하여 성공한 전범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시의 서사란 차라리 '이미지 서사'나 '상징적 서사'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서사적 요소의 도입은 시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자연스레 산문에 의존하게 되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산문시를 쓰게 됩니다.
3. 산문에서 시쪽으로
우리는 좋은 시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어의 연금술사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닳고 닳아서 실용적인 의미만 남아있는 언어들입니다. 언어의 원초적 생명력이 많이 감소돼버린 상태죠. 시인들은 이 언어들을 조립하고 재배치합니다. 압축하거나 생략하여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새로운 감각을 유도합니다. 연금술사들이 끝없이 시도하는 화학적 실험을 방불케 합니다. 또한 시인들은 새로운 시각을 열어줍니다. 사회적 통념이나 굳어버린 상식들을 전복시켜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사실 새롭지 않으면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신변잡기로 흐르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의 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시적 상상력은 곧 언어적 상상력입니다. 같은 언어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시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몫이 있고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를 단지 풀어쓰거나(paraphrase) 해설하는데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시에 의하여 촉발될 수 있는 사유를 독창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시가 자칫 언어 유희나 관념의 나열에 그치지 않도록 생生의 철학을 더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배가 너무 가볍게 뜨거나 혹은 가라앉지 않게 흘수선을 유지하도록 적정한 무게의 짐이 더해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철학을 결합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경험케 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가능성 중 하나일 것입니다.
4. 결어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저를 항상 딜레머에 빠지게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이나 '참된'이란 수식어까지 붙게 되면 아예 답변 불능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종교란 어떤 준엄한 가치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저 개인의, 또는 우리라는 집단의 신념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스로 유미주의자라고 천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미가 모든 가치들의 우위에 있다는 예술지상주의 이론을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신념의 문제일 뿐입니다. 미가 모든 가치를 총괄할 수 있다는, 모든 진실의 힘을 통합할 수 있다는 저의 신념과 소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패배마저 미로써 승화시킬 수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에 따른 발언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산문시 또는 산문의 형태로 쓰여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첨예한 시대 정신과 심오한 사상이 결합되면 아름다운 산문 문학이 탄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산문 작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그의 신들메를 묶어줄 예언자 역할을 할 분들이 나타날 겁니다. 나는 신들메를 묶는 자의 신들메라도 묶어주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반드시 수필가 또는 산문 작가라는 이름으로 탄생할 것입니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위대한 산문 시대의 도래'라는 말은 한없이 유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