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행악자와 함께 달리신 예수
누가복음 23:39-43 94, 245, 316, 262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 줌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두 행악자가 함께 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씀은 사복음서에 모두 있지만 한 행악자가 낙원에 들어가는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두 행악자와 함께 달리신 것은 구속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론을 짧은 몇 절에서 잘 말해 줍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습니다.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두 행악자는 세상의 모든 죄인을 대표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죄로 인하여 죽는 것처럼 모든 죄인은 반드시 죽습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께서 행악자들처럼 죽으신 것은 가장 악한 행악자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 내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을 보고 비방하는 행악자는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행악자는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행악자가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갔다는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죄가 크고 많아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가 작아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두 행악자는 죽어야 할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비방’이란 비웃고 헐뜯는 말입니다.
유대 관리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라고 말했습니다. 또 군인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36)고 말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도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한 것은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게된 너도 살고, 우리도 살려달라고 비방하여 말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부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네가’ 라고 말한 것은 너도 나와 같은 행악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도 자신과 같은 행악자로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용서를 빌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 행악자와 같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비방하는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다른 행악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40)라고 말했습니다. 이 행악자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비방하는 행악자에게 자신들의 행한 일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행악자는 지난 날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비방하는 행악자를 꾸짖었다는 것은 행악자로부터 예수님께서 비방을 들어야 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비방을 들어야 할 분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희롱했습니다. 그러나 이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한다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불교도들이나 이슬람교도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안다고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는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비방하고 비웃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이 행악자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은 자신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으로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날의 잘못 행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한 일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아무리 크고 흉악한 죄를 범했지라도 회개하면 흰 눈같이 희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작은 죄라고 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 값은 반드시 받게 됩니다.
다음으로 이 행악자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라고 말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특별히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장로들과 서기관들까지도 예수님의 무죄성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죄로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이 행악자가 예수님의 무죄성을 말한 것은 그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는 구주가 되신다는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구원을 요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여’라고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에게 주의 사자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고 말했습니다.
행악자가 ‘예수여’라고 부른 것은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믿는 고백입니다. 비방하는 행악자는 예수님에게 ‘네가’라고 말했지만, 이 행악자가 ‘예수여’라고 부른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분으로 알고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고 말했습니다.(42) 이 행악자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의 나라를 세우시며, 자기를 구원할 충분한 권세를 갖고 있는 분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죽음 후에 내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낙원’(43)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행악자가 ‘낙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당신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희롱하는 말을 들으며 십자가에 달려서 마치 죄인처럼 죽지만, 천국에 들어가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주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이십니다.
이 행악자는 죽음 후에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자신을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천국에 데리고 가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행악자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행악자처럼 주님 계신 곳에서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만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자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람들도 내세가 어떤 곳인가를 모릅니다. 그러나 ‘지옥에 간다’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 좋은 곳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행악자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낙원으로 데리고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없다면 감히 낙원에 데리고 가 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행악자의 구원관은 달랐습니다. 비방하는 행악자의 구원관은 세상적이었습니다. 내세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범한 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해서라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내세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부자로 사는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거나 회개할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행악자의 구원관은 내세적입니다. 내세적인 구원관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행한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낙원으로 데리고 갈 예수님을 믿습니다. 죽음 후에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죽음 후에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내세적인 구원관이 있는 사람은 죽음 후에 낙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고 소망하며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어야 합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사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죽음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행악자의 신앙적인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행악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비록 행악자로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께 자신의 구원을 간구하는 행악자의 소원을 예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행악자의 믿음의 소원대로 그를 낙원으로 데리고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이라는 말씀은 죽음 즉시 낙원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동물들은 영혼이 없지만, 사람은 몸과 영혼이 함께 있습니다.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죽음 즉시 몸은 흙으로 돌아가 매장하지만 영혼은 곧 바로 낙원에 들어갑니다.
불교나 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는 육체에서 나온 영혼은 공중에서 떠돌아다니다가 제사를 지내면 와서 먹는다고 합니다. 사십 구제를 잘 지내주어야 떠돌아다니던 영혼이 좋은 곳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허망합니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순교를 하면 그 영혼이 곧 바로 낙원으로 들어가지만, 그 외 모든 신자들은 영혼은 ‘연옥’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가족이나 아니면 천주교회에서 그 영혼을 위해 헌금을 많이 받치고 정성껏 빌어야 낙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연옥’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만든 제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실 때에도 나사로는 죽음 즉시 낙원에서 위로를 받으며, 부자는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22,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회개하고 낙원에 들어간 행악자처럼 예수님을 잘 믿읍시다. 그래서 주님 부르시는 그 날 주의 품에 안겨 낙원에 들어가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 그 위로를 우리도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