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환 高斗煥 (1894 ~ 미상)】 "일제 주구 은율 군수(殷栗) 최병혁(崔丙赫) 사살"
1894년 1월 1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속후면(俗厚面)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로 건너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이 되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던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奎)·전덕원(全德元) 등이 서간도 이주 초기 자치단체 성격으로 조직되었던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稧)·농무계(農務稧) 등을 통합해 설립한 독립군단이다. 본부 소재지는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였으며, 만주와 한국 북부 지역에 100여 개의 지단과 지부를 조직하였다.
구월산 대원들(『매일신보』 1920.9.27) [판형2] |
대한독립단은 이러한 조직을 발판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활발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였는데, 구월산대(九月山隊)도 그중 하나였다.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을 근거지로 유격 활동을 펼치기 위해 조직된 구월산대의 대장은 이명서(李明瑞)였고, 대원은 대한독립단 본부 대원 8명과 국내 지단원 5명 등 총 14명이었다. 구월산대는 1920년 8월 황해도 은율군의 친일 군수인 최병혁(崔炳赫)과 악질 친일 분자 고학윤(高學倫)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대원들은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4개 조로 인원을 나누어 편성하였다. 최병혁을 기습할 이지표(李芝杓)·홍원택(洪元澤)이 제1조, 고학윤을 습격할 고두환·김난섭(金蘭燮)이 제2조, 최병혁과 고학윤 처단 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재소에서 몰려오는 일본 경찰의 공격을 막을 대장 이명서가 이끄는 제3조, 작전을 마치고 철수할 때 대원들을 엄호해 줄 변춘식(邊春植)·박중서(朴重緖) 등이 제4조였다.
구월산 대원들이 사용한 무기(1920.9.25) [판형2] |
이같이 편성된 4개조는 8월 15일 밤, 어둠을 이용해 1조가 먼저 최병혁의 집을 기습해 그를 처단하였다. 2조의 고학윤 처단은 실패하였는데, 실행 전에 대원들의 습격을 눈치 챈 그가 도주하였기 때문이다. 1조, 2조의 작전 수행으로 주위가 소란해지자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들이 몰려 나왔다. 이에 대장 이명서가 이끈 3조와 그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던 4조 대원들이 합세하여 일제히 사격을 가하자 일본 경찰들은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해보고 도망갔다.
기습 작전을 끝낸 대원들은 황해도 내에 구축된 여러 지단원의 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추적하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였다. 그러나 신천군(信川郡) 초리면(草里面)에 있는 지단원 노성우(盧聖祐)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한 일본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구월산대 대원들은 격렬히 대항하였지만 결국 대장 이명서 등 6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체포되고 말았다.
부상을 입고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총상을 입은 데다 심한 고문과 오랜 옥고로 병약해지자 일제는 수감의 필요성을 더는 느끼지 못하고 형기를 12년으로 감형시켰다. 1932년 12월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94년 1월 1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속후면(俗厚面)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로 건너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이 되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던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奎)·전덕원(全德元) 등이 서간도 이주 초기 자치단체 성격으로 조직되었던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稧)·농무계(農務稧) 등을 통합해 설립한 독립군단이다. 본부 소재지는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였으며, 만주와 한국 북부 지역에 100여 개의 지단과 지부를 조직하였다.
구월산 대원들(『매일신보』 1920.9.27) [판형2] |
대한독립단은 이러한 조직을 발판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활발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였는데, 구월산대(九月山隊)도 그중 하나였다.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을 근거지로 유격 활동을 펼치기 위해 조직된 구월산대의 대장은 이명서(李明瑞)였고, 대원은 대한독립단 본부 대원 8명과 국내 지단원 5명 등 총 14명이었다. 구월산대는 1920년 8월 황해도 은율군의 친일 군수인 최병혁(崔炳赫)과 악질 친일 분자 고학윤(高學倫)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대원들은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4개 조로 인원을 나누어 편성하였다. 최병혁을 기습할 이지표(李芝杓)·홍원택(洪元澤)이 제1조, 고학윤을 습격할 고두환·김난섭(金蘭燮)이 제2조, 최병혁과 고학윤 처단 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재소에서 몰려오는 일본 경찰의 공격을 막을 대장 이명서가 이끄는 제3조, 작전을 마치고 철수할 때 대원들을 엄호해 줄 변춘식(邊春植)·박중서(朴重緖) 등이 제4조였다.
구월산 대원들이 사용한 무기(1920.9.25) [판형2] |
이같이 편성된 4개조는 8월 15일 밤, 어둠을 이용해 1조가 먼저 최병혁의 집을 기습해 그를 처단하였다. 2조의 고학윤 처단은 실패하였는데, 실행 전에 대원들의 습격을 눈치 챈 그가 도주하였기 때문이다. 1조, 2조의 작전 수행으로 주위가 소란해지자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들이 몰려 나왔다. 이에 대장 이명서가 이끈 3조와 그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던 4조 대원들이 합세하여 일제히 사격을 가하자 일본 경찰들은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해보고 도망갔다.
기습 작전을 끝낸 대원들은 황해도 내에 구축된 여러 지단원의 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추적하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였다. 그러나 신천군(信川郡) 초리면(草里面)에 있는 지단원 노성우(盧聖祐)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한 일본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구월산대 대원들은 격렬히 대항하였지만 결국 대장 이명서 등 6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체포되고 말았다.
부상을 입고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총상을 입은 데다 심한 고문과 오랜 옥고로 병약해지자 일제는 수감의 필요성을 더는 느끼지 못하고 형기를 12년으로 감형시켰다. 1932년 12월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