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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4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사전 답사 (합천→양산) ② 밀양강 청도
2020년 11월 03일 (화요일) [바이크 라이딩 & 카니발]▶ 대원 동행
밀양강 수계(水系), 경상북도 청도(靑道)
청도군(淸道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최남단에 있는 군이다. 동쪽으로는 경주시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밀양시와 도계(道界)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는 경산시와 맞닿아 있다. 청도에는 경부선이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남성현역·청도역·신거역 등이 있다. 도로는 대구-밀양을 잇는 국도가 경부선과 나란히 달리며, 창녕-경주를 잇는 국도가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난다.
청도의 자연환경
청도의 동쪽에는 '영남알프스'의 거대한 산군이 포진하고 있는 낙동정맥인 운문산(雲門山, 1,188m), 가지산(加智山, 1,240m), 문복산(文福山, 1,014m), 응강산(832m), 사룡산(四龍山, 685m), 구룡산(九龍山, 675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에서 발원한 밀양강(密陽江)의 상류인 동창천(東倉川)이 남류한다.
* ‘영남알프스’는 가지산(加智山)을 중심으로 해발 1천m 이상의 9개의 산을 말한다. 수려한 산세와 풍광을 자랑한다. 영남알프스는 울산, 밀양, 양산, 청도, 경주의 접경지에 형성된 가지산을 중심으로 해발 1천m 이상의 9개의산이 수려한 산세와 풍광을 자랑하며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은 울주군 상북면ㆍ삼남읍에 밀양은 산내면ㆍ단장면에 양산은 하북면ㆍ원동면에 청도는 운문면에 경주는 산내면에 걸쳐 있다.
가지산(1,241m), 간월산(1,06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고헌산(1,034m)의 7개산을 지칭하나, 운문산(1,188m), 문복산(1,015m)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 중에서 신불산, 가지산, 재약산(천황산포함), 운문산은 산림청이 선정한 남한 100대 명산에 속한다. 영남알프스에는 통도사, 운문사, 석남사, 표충사 등의 문화 유적지 또한 즐비하고, 절경과 전설들이 도사리고 있다.
서쪽에는 비슬산(琵瑟山, 1,084m), 수봉산(秀峰山, 593m), 묘봉산(妙峰山, 513m), 천왕산(天王山, 619m)이 솟아 있다. 천왕산(天王山)은 각남면과 풍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성현산맥(省峴山脈) 중의 하나이다. 이 산 동쪽에는 화악산, 서쪽에는 묘봉산, 수봉산 등이 솟아 있다. 청도천이 이 산곡에서 발원한다. (밀양시의 서쪽에 위치한 밀양시 청도면에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그 ‘청도천’이 아니다.)
청도(읍)의 남쪽에는 억산(億山, 944m), 구만산(九萬山, 785m), 철마산(鐵馬山, 630m), 화악산(華嶽山, 932m) 등이 솟아 있다. … 북쪽에 위치한 삼성산(三聖山, 663m), 상원산(上院山, 700m), 선의산(仙義山, 759m) 등은 금호강(琴湖江) 유역과 밀양강 유역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밀양강의 상류 지역, 청도(淸道)
청도군(淸道郡)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에 속하지만, 청도군 권역의 모든 하천은 경상남도 밀양강으로 남류한다. 청도군의 서쪽 풍각면 일대의 산지에서 발원한 청도천(淸道川, 일명 요길천, 송읍천)이 남쪽의 천왕산, 묘봉산, 수봉산, 비슬산 등에서 발원하는 풍각천(豊角川), 봉기천(鳳岐川), 각북천(角北川) 등과 합류한 뒤 군의 중앙부를 관류하여 화양읍과 청도읍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밀양강이 된다.
동창천(東倉川)은 운문면의 북부를 서남류하여 금천면 중앙을 흘러 매전면 북지리에서 북부 산지에서 발원한 춘천(春川)과 합류하여 남류한다. 청도읍 내호리에서 이 두 하천이 만나 밀양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화랑정신(花郞精神)의 발상지
청도군 운문면에 있었던 가슬갑사(嘉瑟岬寺, 지금의 운문사)에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화랑정신으로 대표되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사량부(沙梁部)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화랑에게 전수함으로써, 청도군은 화랑정신이 발상지라고 말할 수 있다. ‘화랑오계(花郎五戒)’라고도 한다.
600년(진평왕 22) 원광이 중국 수나라에서 돌아와 운문산(雲門山) 가실사에 있을 때 두 화랑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자,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 다섯 가지 계율을 내렸다. 그 뒤 두 사람은 이를 잘 지켜서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전투에서 화랑으로 싸우다 순국하였다.
세속오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이충(事君以忠)’과 ‘사친이효(事親以孝)’는 유교적인 충·효를 각각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든가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난다.(忠臣出於孝子之門)’는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경우 충·효는 그 순서가 바뀌어 있다. 여기서 유교의 일반적인 사상과 달리 효보다 충을 앞세웠던 당시 신라인들의 강렬한 공동체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김유신(金庾信)과 그의 아들 원술(元述)과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역시 평범한 차원에서 유교적인 신의(信義)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나타난 내용이나 사다함(斯多含)의 경우에서 보듯이, ‘죽음을 서약한 친구(約死友)’로서 이것을 충실히 지켜낼 수 있는, 유교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종의 신앙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임전무퇴(臨戰無退)’는 강렬한 공동체 의식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숭고한 희생정신의 표현인데, 화랑 관창(官昌)이나 김흠운(金欽運)의 경우가 이에 대한 좋은 예라 하겠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은 불교적인 요소라 하겠으나, 불교에서의 ‘불살생(不殺生)’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실제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역사적 의의(意義)
세속오계(世俗五戒)는 고신도사상의 무속신앙을 통하여 신(神)과 인간(人間)이 합일할 수 있는 차원에서, 그 순수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정신, 숭고한 희생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랑도사상의 구체적 실천 덕목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이념적 체계를 가다듬게 함으로써, 화랑도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직접적으로는 신라(新羅)로 하여금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을 성취하고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천년왕조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고, 간접적으로는 후대에 와서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 민족 특유의 순수선량하고도 의연한 민족성(民族性)을 이어오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적 전통사상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고려왕조의 처절한 항몽정신(抗蒙精神)과 조선왕조의 의리사상(義理思想), 한말의 의병활동(義兵活動), 그리고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獨立運動) 등으로 이어지는 불굴의 민족정기의 맥락은 모두 이 세속오계의 정신을 통해 다져진 것이라 하겠다.
‘새마을운동’의 발상지, 청도
새마을 운동은 1969년 8월 초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에서 수해 복구 현장을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1970년부터 시작됨으로써 경상북도 청도군은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가지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의 새마을'을 만들려는 ‘새마을운동’의 기본이념은 국민 개개의 생활향상과 자유로운 성장은 물론,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중흥을 이룩하려는 조국근대화 이념의 실천운동이었다. 지역사회 주민의 자발적이며 자조적인 협동노력에 의해 주민들 스스로가 생활태도와 정신자세를 혁신하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환경을 개발·발전·개선해나가는 지역사회개발운동이며 사회혁신운동이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의 제1단계, 1980년부터 1988년까지의 제2단계, 1989년부터의 제3단계로 나눌 수 있다. 20년 동안 진행되어온 운동이기 때문에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부침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정부의 농촌근대화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점, 지역균형개발전략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의식개혁운동의 하나였다는 점 등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소싸움’ 축제는 청도군에서 매년 3월경에 열리는 축제이다. 대한민국 내에서 열리는 소싸움 축제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99년,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대한민국의 10대 지역문화관광축제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내 황소끼리의 경기 외에도 외국 소와의 친선 경기, 로데오 경기, 초대 가수 콘서트, 디카 사진 콘테스트, 루미나리에 등 다양한 볼거리와 재미로 매년 4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청도군 이서면 서원천변에 개최되었으나, 2009년부터 청도 소싸움 경기장에서 개최 되고 있다.
[청도=뉴스] 공정식 기자 = 21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청도소싸움경기장에서 열린 '2021년 청도소싸움경기'에 출전한 싸움소가 격돌하고 있다. 청도공영사업공사는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됐던 소싸움경기를 지난 20일 재개해 오는 12월 25일까지 매주 토·일요일 12경기씩 진행한다. (2021.3.21)
청도팔경(淸道八景)
* [유등연지(蓮池)] ▶ 유호 연꽃은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있는 연못으로, 일명 ‘신라지(新羅池)’라 부르며 둘레는 약 700m, 깊이 2m 정도이다. 특히 추석을 전후하여 시집간 여인들이 친정에 돌아와서 이곳에서 만나는 장소로 이용 되었으며, 선남선녀들이 한복(韓服)을 곱게 차려입고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많이 찾는다.
* [낙대폭포(瀑布)] ▶ 낙대폭포는 청도역에서 약 3 km 떨어진 남산 중턱에 있는 높이 30여m의 폭포다. 대기암괴석의 깊은 계곡에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가운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물소리와 함께 일대 장관을 이룬다. 낙대폭포는 사계절 내내 절경을 이룬다. 봄에는 만개한 벚꽃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와 깊은 계곡에서 밀려오는 바람이 오싹 추위를 느끼게 하면서 절경을 이룬다. 또 가을이면 오색 단풍이 풍벽을 이루는가 하면, 겨울에는 흐르던 폭포수가 그대로 얼어붙어 흡사 은병풍(銀屛風)을 연상케 한다.
* [공암풍벽(孔巖楓壁)] ▶ 공암풍벽은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운문면 공암리에 자리 잡고 있는 높이 30여m의 반월형 절벽을 말한다. 1985년에 운문댐이 건설로 인해 지금은 '바라보는 절경'이 되었다. 공암풍벽에는 봄이면 진달래를 비롯한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이면 운문천의 맑고 푸른 물이 곡천대를 감돌아 흐르는 모습을 보면 더위를 잊게하여 과연 절경이다. 특히 가을이면 풍벽(楓壁)이란 이름과 같이 오색의 단풍이 하나의 벽을 이루고, 겨울에는 주위송림의 푸른 기상은 우리고장 선비들의 고절을 상징하는 듯하다. 공암풍벽의 사이에는 옛날에 용이 살았다는 용혈(龍穴)과 학이 떼 지어 놀았다는 학소대(鶴巢臺)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산정에 있는 석문(石門)은 예전에 청도에서 경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공암풍벽의 일부가 수몰되었지만 넓은 호수와 함께 어울린 모습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자계제월(紫溪霽月)] ▶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자리하고 있는 자계서원의 앞을 흐르는 냇물은 청도천인데 이 냇물은 앞내 또는 운계(雲溪)라 하였다 한다. 옛날 탁영 김일손이 무오사화를 당해 참화를 입었을 때 이 냇물이 3일 동안이나 거꾸로 핏빛으로 흘렀다 하여 그 후부터 자계(紫溪)라 하였는데 수면이 거울 같고 보름달이 물에 비치는 그림자는 하늘의 달같이 황홀하였으며 동쪽 와룡산 기슭의 연못을 얼싸안은 서원의 모습은 시정에 넘치는 아름다운 월경이다. 지금은 냇가의 모습도 물결도 달라졌으나 맑은 하늘에 둥실 뜬 보름달이 비춰주는 서원과 와룡산은 옛 경치 그대로여서 자신도 모르게 시상에 잠기게 하는 청도팔경의 하나이다.
* [운문효종(雲門曉鐘)] ▶ 운문사에서 울려오는 새벽 종소리와 원근의 새벽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여명이 은은하게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는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그대로 한 폭의 선경이 아닐 수 없다. 세상사 근심, 사람들의 미망을 깨우는 청아한 새벽 종소리다.
* [오산조일(朝日)] ▶ 오산은 지금의 남산을 말한다. 오산조일은 아침 햇살을 받고 떠오르는 남산의 모습을 말한다. 뒤로는 화악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이서벌의 넓은 들판을 굽어보며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함께 아침 안개 속에 잠긴 산봉우리와 산골짜기의 모습은 장엄하다. 청도 남산은 낙동정맥 지맥 중 한 봉우리로 높이 870m의 청도지방 주산이며, 청도읍, 화양읍, 각남면의 넓은 지역에 걸쳐 뻗어 있다. 또 남산에는 약수폭포, 약수터, 남산골, 시정(시정), 신둔사, 죽림사 등의 여러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 [용각묘우] ▶ 용각산은 청도읍 덕암리, 내리, 안인리, 운산리, 매전면 두곡리에 걸쳐 있으며 경산시와 분수령을 이루고 남성현 터널이 있는 곳도 이 산줄기다. 뿔 같이 생긴 지형을 산 정상에서 아주 옛날에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로 용각산이라 불리어 오며 지금도 신비로운 용샘이 있다.
* [유천어화] ▶ 청도 산서지방을 서에서 동으로 관류하는 청도천과 산동지방을 동에서 관류하는 동창천이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이곳 유천은 민물고기의 명산지로 특히 여름이면 은어가 많이 올라왔다. 은어의 입에 은색줄이 있어 은구어라고 하였는데 은어 중에서도 가장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옛날에는 왕실의 진상품이었고 왜정 때는 왜인들이 독점하였다 한다. 바람 고요한 밤, 하늘에 별빛만 총총한데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뱃전을 비추면 그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유천(밀양강)에 은어가 오르지 않아, 고기잡이 횃불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청도의 천연기념물과 고택
청도의 천연기념물로는 운문사의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 매전면 동산리 청도 매전면의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5호), 각북면 덕촌리 청도각북면의 털왕버들(천연기념물 제298호), 이서면 대전리 청도 이서면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1호) 등이 있다.
건축물로는 화양읍 동천리의 청도석빙고(보물 제323호), 금천면 신지리의 청도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임당리의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8호), 화양읍 서상리의 도주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등이 있다.
청도의 유교문화재
청도의 유교문화재로는 화양읍 교촌리의 청도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금천면 신지리의 선암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이서면 서원리의 자계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 등을 비롯하여 많은 서원 및 서당이 현존하고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
자계서원은 조선 초 문신이며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중종 13년(1518년)창건하고 운계서원(雲溪書院)이라 하였고 선조 11년 중건하여 현종 2년(1661년) 자계서원(紫溪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고종 8년(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동·서재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참봉 김용희(金容禧)가 중건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은 성종 17년(148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及第)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연산군 4년(燕山君 1498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참화(慘禍)당하였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한다. 중종 반정 후(燕山君 12년, 1506년) 도승지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追贈) 되었다.
건물 배치 중심에 있는 보인당(輔仁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고상형(高床形) 집이며 겹처마 팔작 지붕에 활주가 있다. 가구는 5량가이며 연등천장에 우물마루를 깔고 공포는 익공계이다. 영귀루(1699년 중건)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석의 초석상에 원주를 세워 루주(樓柱)로 삼고 마루를 놓아 다시 누(樓)를 덧붙였다. 동재의 건축기법은 그 유례가 흔하지 않으며 청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보인당(輔仁堂) 주축 선에는 영귀루(詠歸樓)와 유직문(惟直門)이라는 삼문(三門)이 있고 보인당 동쪽에는 존덕사(尊德祠)와 전사청, 신도문이 따로 나있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3호)
이 서원의 12동 건물 중 영귀루와 동·서 양재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영귀루 옆에는 탁영 김일손 선생께서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동쪽으로 탁영 선생의 신도비와 절효(節孝) 김선생 정려비(旌閭碑)라 쓴 조부의 비가 있으며, 서쪽에 서원정비(書院庭碑)등이 있는 자계서원은 조선 초기 역사와 건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학자와 유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용강서원(龍岡書院)
용강서원(龍岡書院)은 청도에 정착해온 밀양 박씨(密陽朴氏) 문중의 그 현조(玄祖)인 충숙공(忠肅公) 박익(朴翊)과 ‘임란 14의사(壬亂14義士)’를 재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다. (경상북도기념물 제129호)
서원 내에 있는 충열사(忠烈祠)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때 의병을 일으켜 청도·밀양·경산 등지에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준 박경신(朴慶新), 경인(慶因), 경전(慶傳), 경윤(慶胤), 경선(慶宣), 선(瑄), 찬(璨), 지남(智男), 철남(哲南), 린(璘), 우(瑀), 구(球), 숙(琡), 근(瑾) 14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14의사는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 사이로 이 가운데 12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2·3 등에 각각 책봉되었고, 한 분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 되었다. 이에서 주목되는 점은 1개 사족(士族)가문의 부자, 형제, 숙질, 종반사이의 14명이 함께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궐기하였다는 점은 역사상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제향하는 용강재(龍岡齋)는 1794년(정조18)이래 후손들을 위시한 지역 사림들이 사우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관철되지 못하다가 1816년(순조16) 충열사(忠烈祠)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5)에 훼철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용강서당(龍岡書堂)이 건립되었고 1935년 요사, 관리사, 창고, 14의사를 봉안한 숭의사(崇義祠)가 충열사(忠烈祠)로, 용강서당(龍岡書堂)이 용강서원(龍岡書院)으로 개명(改名)되었다. 1960년 강당(講堂)이 건립되었다.
임란14의사(壬亂14義士) 묘정비(廟庭碑)는 1876년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시질(金是瓆)이 찬하고 천주교도(天主敎徒)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썼다. 임란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비각의 구조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난 밀양 박씨 일족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그 전통을 400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후손들의 의지는 후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금호서원(琴湖書院)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임란 때 원균(元均) 휘하에서 옥포만호(玉浦萬戶)의 신분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3도 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1562∼1610, 보물 제1212호 참조) 장군과 향산(鄕山) 이백신(李白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처음, 이운룡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명대마을(온막리)에 상충사(尙忠祠)를 건립하여 향사 하다가, 조선 순조 14년(1814)에 이서면 금촌리로 이건 한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毁撤)되고 사당만 대월산 기슭으로 이건 하여 효충사(孝忠祠)라 하였고 1947년에는 서원을 중창하고 강당은 2001년 다시 중건하였다.
서원은 대월산(對月山)을 배경으로 앞쪽의 풍양지와 학산(鶴山)을 바라보며 북서향으로 좌정하고 전체배치는 2단으로 조성된 대지에 외삼문 강당 사당을 일축선상(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좌우에 동 . 서재를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이며 사당은 강당의 뒤편 높직한 곳에 토담으로 돌러 ‘현충사(賢忠祠’)라 하고 기둥 위를 연화와 봉두로 장식하고 있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로 대문간 좌우에 고방 1칸씩을 두었다. 강당은 3량가의 초익공(初翼工)집으로 정면 퇴칸의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으로 되어 2통칸 우물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양측 온돌방의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으며 마루와 방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설치하였다.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이다.
청도의 인물(人物)
오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 : 1459~1504)
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이다. 자는 천지(天支)이고 호는 오졸재(迂拙齋)이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제자로 본관은 밀양이다.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출생하였다. …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485년(성종16)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 예천현감(醴泉縣監)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고 노사신(盧思愼), 임사홍(任史洪)의 탄핵을 받았다. 연산군 4년(1498년) 왕과 훈구파에게 미움을 받아 무오사화 때 평안도 벽동에 유배되고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서울로 압송되어 희생당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 1464~1498)
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성종17년(148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及第)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 연산군4년(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중종반정 후(1506년) 도승지와 이조판사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 1912~1970), 이영도(李永道 : 1916~1976)
청도 출신의 남매 시조시인이다. 이호우(李鎬雨)의 창작 활동은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낙엽(落葉)」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40년 『문장(文章)』 6·7호 합병호에 시조 「달밤」이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 작품집으로는 첫 시조집 『이호우시조집(爾豪愚時調集)』이 1955년 영웅출판사(英雄出版社)에서 간행되었다. 이어 누이동생 이영도와 함께 낸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휴화산(休火山)』(1968)을발간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영도(李永道)는 1946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제야(除夜)」를 발표하면서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으로 「황혼에 서서」(1958)가 있으며, 시조집으로 『청저집(靑苧集)』(1954)·『석류』(1968)가 있고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비둘기 내리는 뜨락』(1966)·『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 등이 있다. 남매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청도에서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제" 를 개최하여 시조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호우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이호우시조전집 『삼불야』를 2012년에 간행하였다.
동양철학자 이기동(李基東) 박사,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1951년 청도군 각남면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일본 쓰쿠바(筑波)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1988년과 1998년 각각 대만 국립정치대학과 미국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초빙되어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정년을 맞아 명예교수가 되었다. 동양철학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강설’이라는 알기 쉬운 오늘날의 언어로 옮긴 『논어강설』 『대학·중용강설』 『맹자강설』 『주역강설』 『시경강설』 『서경강설』등 ‘사서삼경강설’ 시리즈 전6권을 상재하였다. 그 외 『동양 삼국의 주자학』 『이색—한국 성리학의 원천』 『이또오 진사이』 『공자』 『노자』 『장자』등의 동양사상서와 『하늘의 뜻을 묻다—이기동 교수의 쉽게 풀어 쓴 주역』 『만화로 보는 주역(상,하)』 『기독교와 동양사상』 『한국의 위기와 선택』 『한마음의 나라, 한국』 『진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최근 『한단고기』를 번역 출간했다.
이기동 박사는 갈수록 혼탁해지는 세상에서 동양철학의 가치를 올곧게 세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양 철학의 지혜를 전하고자 동양철학 강당 ‘동인문화원’을 열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민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바쁘고 욕심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진리를 잃고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진리가 사람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멀리한 결과이다.(非道遠人 人自遠矣) 이제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와 진리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기동 박사는 ‘동인문화원(同人文化院)’을 통하여 진리를 말씀을 통절하게 열강(熱講)해 오신 분이다. ‘참다운 삶’, ‘진정한 행복’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사심이 없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그것이 이기동 박사의 ‘한마음 철학’이다. …
도은 이기동 박사는 나의 학문적 스승이시다. 나는 이기동 박사로부터 6년 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노자(老子), 장자(莊子) 그리고 동양철학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기동 박사의 한마음 철학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 사단법인 동인문화원 운영위원과 인성교육사업단 부단장의 일을 맡고 있다.
‘운문사 가는 길’
운문사로 가는 길은 감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소나무 숲길, 유홍준은 이 ‘솔바람길’을 운문사 다섯 아름다움의 하나로 여겼다. 길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약 1Km이다. 길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 깨달음을 간절히 바라는 일념으로 가는 길이다. 때로는 솔길을 벗어나 개울 길을 걸어도 좋다. 산은 깊고 계곡의 물은 맑고 차갑다. 솔바람길을 걷다 보면 소나무 아래쪽에 V자 모양의 상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경 새재나 석남사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에 송유(松油)를 채취한 흔적이다. 세월이 흘러도 상처는 그대로 남는다. 잊힌다 하여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운치 있고 곡절 많은 길을 따라, 천 년 고찰 운문사로 가는 길은 우리의 마음속에 무한한 시정(詩情)을 불러일으킨다. 오직 깨달음을 얻고자, 운문사 솔바람길을 걸어가며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표현한 시가 있다. ‘윤지’라는 필명의 「운문사 가는 길」이다. — ‘길을 알려 하지 않아도 / 길을 내어주는 것들이 있었다 / 바람에 의해 젖혀진 마디마디 꺾인 팔가지들 / 제 가는 모양으로 한결같이 합장한 듯 / 그 곳은 길이 아니어도 길이었다 / 아픈 마디 꺾어 알려준 한 방향 푸른 손에서 / 열반에 들었던 신비의 묵담이 담겨있었다’(중략) 고 노래한다. 그리고 이어서 인생의 이정표를 찾기 위한 경건한 마음을 다잡아 정진하듯 묵묵히 운문사로 간다. ‘마음가짐 한결같이 길 따라 말없이 가련다. / 가라, 운문사 가는 길 / 팔다리 꺾어 바람처럼 휘휘 젓는 / 이정표 서 있는 곳.’
무엇보다 청도시조공원에 있는 유재영(柳在榮) 시인의 「운문사 가는 길」은 단연 압권이다. 천 년 고찰 운문사를 찾아가는 길목, 계절이 깊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통해 천지의 이치를 느끼기도 하지만, 인간사 사랑과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여 청정도량 운문사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마음을 담고 있다,
운문사 가는 길 / 유재영
기러기 한 쌍만이 어젯밤에 날아갔을
숱 짙은 대숲 아래 지체 높은 어느 문중
남겨둔 월화감 몇 개 등불마냥 밝구나
장삼 입은 먹바위 햇빛도 야윈 곳에
무심코 흘림체로 떨어지는 잎새 하나
가만히 바라다보면 참 아득한 이치여
사랑도 그리움도 어쩌지를 못 할 때
청도 운문 골짜기 구비구비 돌아나온
득음은 저런 것인가, 옷을 벗는 물소리
「운문사 가는 길」은 조선백자처럼 단아하고 정결하게 빚어낸 작품이다. 아름다운 현대시와 정제된 시조를 같이 써 온 유재영 시인의 절창(絶唱)이다. 시조집 『햇빛 시간』(태학사)에 실려 있다.
유재영의 시조 「운문사 가는 길」은 섬세한 언어와 맑은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투명한 언어와 정제된 이미지로 표현된 시조이다. 우선, 운문사 가는 길에서 만난 푸른 대숲에 싸인 장중한 문중 고가와 푸른 창공에 매달린 붉은 홍시(월화감)을 풍경화로 보여준다. 그리고 야윈 가을 햇살을 받으며 흘림체의 곡선을 그리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천지의 운행과 우주적 생명의 이치를 아련히 느낀다.
문제는 ‘사랑과 그리움을 어쩌지 못할 때’가 많은 인간이다. 아, 삶이란 무엇인가. 시적 화자는 어쩌지 못하는 그 인간사 아픔을 안고 ‘구비구비’ 운문사로 가는 길이다. — 운문사 깊은 골짜기 속에서 시인은 은연 중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듣는다. 청아한 계곡의 물소리! 그 차고 맑은 물소리는, 세상에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인간의 아픔을 씻어내는 정결한 언어였다. 가장 깨끗하게 정화된 그 소리는 바로 득음(得音)의 경지요 인간사 속된 마음까지 씻어 내리게 하는 청음(淸音)이 아닐 수 없다. 아아, 어쩌지 못하는 사랑과 그리움, 그 인생의 아프고 무거운 옷까지도 벗어버리게 하는 —.
시인 유재영은 1948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1970년부터 <시조문학>, <현대시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시집으로 『한 방울의 피』, 『지상의 중심이 되어』등을 펴냈다. 자유시와 시조를 넘나들며 특유의 서정세계를 펼쳐나간다. 1994년 중앙일보 시조대상, 1995년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받았다. 맑고 투명한 언어와 섬세하고 세련된 정조 그리고 달관의 어법을 구사하는 순수시인이다, …
청도시조공원 운문사 가는 길 시비 앞에서 유재영 시인과 함께한 시인들이 기념비적인 사진을 찍었다. 청도의 장국밥 민병도 시인이 주도하여 청도 출신의 이호우, 이영도 시인을 기려 청도시조공원을 조성하고 ㅡ 대한민국 현대시조단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대표작을 한 자리에 모셨으니 ㅡ 청도가 한국현대시조의 중심이 되었다. 그 가운데 유재영 시인의 운문사 가는 길은 ㅡ 청도시조공원 그 자리에 가장 적실한 작품이다!
시인 유재영은 나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70년대 초반 다묵(多黙) 강운회(姜雲會) 선생을 위시하여 시인 류제하(柳齊夏)·장청(張靑)·이기라(李起羅)·김상묵(金相黙)·이청화(李靑和) 등과 「삼장시(三章詩)」 동인 활동을 함께 한 문우(文友)이다.
청도 시조공원의 시비(詩碑)
<청도시조공원>은 운문사로 들어가는 초입,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 청도천 강변에 있다. 현대 시조계의 거장인 이호우(李鎬雨)·이영도(李永道) 오누이 시인을 낳은 경북 청도에 시조공원이 조성되었다. 청도군은 최근 이 두 시인의 고향에 <청도시조공원>을 조성하고 오누이 시인을 비롯하여 이병기, 조운, 이은상 등 근현대 시조시인 26명의 시비를 건립하고 관계자들이 모여 2019년 9월 제막식을 가졌다. 세련된 조형미로 다듬어진, 각기 다른 모양의 시비들이 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건립된 시비의 주인공들은 한국현대시조를 대표하는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유재영 시인의 「운문사 가는 길」도 청도시조공원에 한 자리를 차지한 시비이다.
시비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김남환 「김시습의 푸른 기침」, 김상옥 「백자부」, 김제현 「풍경」, 류상덕 「강둑에서」, 민병도 「장국밥」, 박시교 「바람집」, 박재삼 「내 사랑은」, 유재영 「운문사 가는 길」, 이근배 「내가 왜 산을 노래하는가에 대하여」, 이병기 「난초」, 이영도 「보리고개」, 이우걸 「팽이」, 이은상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호우 「달밤」, 정완영 「조국」, 정인보 「조춘」, 조운 「구룡폭포」, 최남선 「봄길」 (가나다 순)
1920년대 현대시조부흥운동을 벌인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 시인의 작품은 위시하여 이호우, 초정 김상옥, 백수 정완영, 조운 시인의 시비가 시조단에 큰 자리매김을 하고 있고, 이영도, 박재삼, 이근배, 유재영, 박시교, 이우걸, 김제현, 민병도 등 쟁장한 중견 시인의 작품이 빛을 발하고 있다. 정완영의 「조국」과 이호우의 「달밤」은, 앞서 필자의 낙동강 종주 이야기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박재삼 시인의 사랑이 절절하고 애틋하다. 사랑에 몸살을 앓는 사내가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이 청도의 밝은 햇살을 받고 있다.
내 사랑은 / 박재삼
한 빛 黃士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기념조형물을 포함해 약 10억원이 소요된 이 시조기념화 작업은 <청도시조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민병도 시인)의 지속사업으로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호거산(虎踞山) 운문사(雲門寺)
우리나라 대부분 옛 절은 산지 가람이지만 운문사는 평지가람이다. 운문사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형상을 한 호거산(虎踞山) 아래에 있다. 그리고 운문산(雲門山), 가지산(可智山)의 거대한 산체가 절을 옹위하고 있다. 운문사는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신라 때 인근의 가슬갑사에서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린 곳이다.
그리고 고려 무신정권 초기 1193년(명종 23)에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이 ‘김사미’를 중심으로 난(亂)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사미라는 말에서 볼 때 운문사의 승려일 가능성이 있다. 그 후 운문의 김사미는 초전(현 울산)의 ‘효심’과 합세하여 대규모 농민항쟁을 벌인다. 이들은 신라 부흥을 꾀했던 이의민의 지원을 받아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지만, 결국 토벌되고 남은 농민군은 운문산으로 숨어 투쟁하는 운문적이 된다. 그들은 영남알프스 빨치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농민군은 10여 년 동안 토벌대와 싸웠다.
그 후 1282년(충렬왕 8) 72세의 일연(一然)스님이 주지로 주석하여 이곳에서 우리 문화 상상력의 보물창고인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그러다 불교정화운동 직후인 1953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어 비구니 사찰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경북 청도군에 소재한 운문사(雲門寺)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557년(신라 진흥왕 18년) 한 승려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해 도를 깨닫고 이후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600년(신라 진평왕 22년)엔 원광국사가 중창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한 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렸다. 이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雲門寺)로 불렸다.
현재는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경학을 배우는 터전이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중 최대 규모. 웅장하면서도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80호 '처진 소나무' 등 보물(寶物) 일곱 점을 간직했고, 고승대덕(高僧大德)의 영정과 문화재 등도 절 안에 다수 산재돼 있다.
운문사는 오랜 세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시대에 이곳에는 5개의 사찰이 포진해 있었는데,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를 내린 ‘가실사’가 그중 하나이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것이다. 왕건은 운문사 북방 문경-진위-청송 지역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여러 번 혈전을 벌였다. 이때 후방의 운문사 세력이 왕건을 지원했다고 한다.
고려말기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발발한 곳도 이곳이고, 한말 의병항쟁기에는 최세윤 의진의 지역분대가 운문사에 설치되었다. 1908년 권병호 의병부대도 운문산에 잠복해서 활약했다. 운문사가 위치한 가지산은 경주-울산에서 대구-경산 지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 권역을 연결하는 요지이면서 가파른 산들이 첩첩이 놓여 있어 방어전이나 게릴라 활동에 대단히 유리한 지형을 제공한다. [임용한]
오랜 역사만큼이나 사찰의 규모도 크지만 운문사는 비구니 도량답게 깔끔하면서도 단아하다. 특히 운문사에는 유명한 노거송이 있다.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수령이 400년이 넘은 ‘처진 소나무’가 그것이다. 일종의 거대한 반송(盤松)인데, 사방으로 긴 나뭇가지가 뻗어 곳곳에 그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지지대가 세워져 있다. 매년 봄이면 뿌리가 안착하고 성장을 돕기 위해 열두 말의 막걸리를 부어준다고 한다. 나뭇가지 뻗은 면적이 넓다. 40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싱그러운 모습, 운문사를 상징하는 소나무다.
운문사의 귀중한 문화재로는 금천면 박곡리의 대비사 대웅전(大悲寺 大雄殿, 보물 제834호), 청도 박곡동 석조석가불좌상(淸道珀谷洞石造釋迦佛坐像, 보물 제203호), 운문면 신원리의 운문사 대웅보전(雲門寺大雄寶殿, 보물 제835호), 운문사 금당앞 석등(보물 제193호), 운문사사 천왕석주(雲門寺四天王石柱, 보물 제318호), 운문사 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 보물 제316호), 운문사 석조불좌상(雲門寺石造佛坐像, 보물 제317호), 운문사 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
* [운문사 석조불좌상(雲門寺石造佛坐像, 보물 제317호)]▶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만들어진 석조불좌상(石造佛坐像)은 작압전(鵲鴨殿)에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와 같이 모셔져 있는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육계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다 가린 통견의(通肩衣)이며 법의 안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끼어 입은 승각기(僧脚岐)가 보인다. 불신의 높이는 63cm 대좌 높이 41cm 광배 높이 92cm 이며 광배(光背)는 폭이 넓은 주형광배(舟形光背) 이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융기선으로 구분하고 두광(頭光) 중심에 연꽃이 있고 외연에는 화염문(火焰紋)이 조각되었다.
좌대는 6각형의 특이한 형태로 하단석은 양쪽이 길며 6각형으로 18엽의 복연(覆蓮)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 위에 삼단의 고임을 각출하고 그 위에 6각의 중대석이 하대석과 한 돌로 되어 있고 측면에는 조각이 없다. 상대석은 3단의 고임이 모각 되었고 그 위에 14엽의 앙련(仰蓮)이 조각된 평면타원형이다. 불상전체에 호분이 칠해져 있어 각 선이 분명하지 않으나 코가 크고 눈과 입이 적고 상(像) 자체가 나약하게 느껴지고 삼도가 분명하지 않은 점등을 들어 9세기 불상을 답습하려고 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불상양식인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고 청도군에는 화양읍 송금리의 대적사 극락전(大寂寺 極樂殿, 보물 제836호), 풍각면 봉기리의 청도 봉기동3층석탑(淸道鳳岐洞三層石塔, 보물 제113호), 매전면 장연리의 장연사지3층석탑(長淵寺址三層石塔, 보물 제677호) 등이 있다.
청도와 밀양을 생각하며
낙동강 강안에서 지천인 밀양강을 거슬러 올라와 밀양과 청도의 문화유적지 명승을 두루 살펴보았다. 경상남도 낙동강 권역에 위치한 밀양과 청도는 높은 산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천혜의 땅으로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청도는 저 멀리 신라시대의 화랑정신에부터 현대사의 새마을운동이 발상한 곳이며, 밀양은 조선시대 도학의 조종 점필재 김종직과 임진왜란을 당하여 구국의 기치를 든 사명대사가 태어난 곳으로, 구석구석 유서 깊은 고적, 아름다운 경관과 풍류가 살아있는 곳이다. 영남루를 비롯한 무수한 역사 유적은 그 세월만큼이나 도저한 품위와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