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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누가 키워?
십자가를 안테나로!
지난 9월, 청주 흥덕경찰서는 부인과 다투다 홧김에 산탄이 장착된 마취총을 부인에게 쏜 혐의(살인미수)로 김모(44)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경찰에서 "아내가 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채 일요일마다 하루종일 교회에 나가있어 ‘소는 누가 키워?’하며 화가 치밀어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안타까운 뉴스를 접하자 KBS-2TV '개그콘서트'의 '두분 토론'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남하(남자는 하늘)당 대표 개그맨 김영진씨와 여당(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당 대표 김영희씨가 출연해 다양한 주제로 매주 뜨거운 설전을 벌이지요. 그런데 개그맨 김영진은 남성우월적 보수성향을 대놓고 드러내 웃음을 자아내다가, 개그우먼 김영희씨가 불합리한 남성위주의 사회 속에서 여성의 입장을 당당하게 주장할라 치면 "아, 그럼 소는 누가 키워?"라는 말로 그녀의 말문을 번번이 막아버리곤 합니다. 이는 남하당 대표 김영진씨의 사고방식이 6~70년대의 농경사회에 멈춰져 있어서, ‘여자가 집안일이나 하고 또 집에서 소나 키워야지 여자들이 모두 사회로 나가면 도대체 집에서 소는 누가 키우냐?’는 억지논리인데 의외로 많은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곤 합니다.
아무튼 우리 사회나 가정이 더 이상 ‘소를 키우는 문제’로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합심하여 소를 잘 키우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길 바라면서 고 민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흰 소가 끄는 수레’와 소를 팔러 갔다가 오히려 소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는 영화 ‘소와 함께 여행을 하는 법’을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흰 소가 끄는 수레/ 고 민요셉신부>
록카페가 있습니다. 디스코텍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십대 초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입장을 거부하는 카페, 그곳이 바로 디스코텍입니다. 저는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페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시면서 춤을 추고 싶은 사람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젊음을 요구하다니! (잃어버린) 젊음을 순간이나마 되돌려 받고 싶어 그곳에 들어가 보려하지만 ‘물 버린다’고 입구에서부터 들여주질 않습니다. 돈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록카페, 디스코텍,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 갈 수 없는 곳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습니다. 어느 사이에 육체적으로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의 징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지게 마련인데….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록카페에, 디스코텍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젊어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 젊어지자!
전화로 한 자매의 꿈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는 꿈속에서 매우 복잡한 길, 즉 미로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난감한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앞이 깜깜하여 그만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부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미로에서 헤맬 때마다 신부님이 나타나서는 어려움을 풀어주고 길을 안내하여 주셨습니다." 가만 그 꿈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나는 자매의 꿈속에서 미로를 헤치며 길을 안내해주는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꿈에서의 나처럼 살아가라는 가르침, 역설적으로 내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나에게 바라는 바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는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페다고지(Paidagogos)’의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페다고지’란 큰 집안의 하인으로서, 그 집 아이를 어릴 때부터 돌보면서, 그 아이와 함께 위험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학교에 가고 또 복잡한 도시 안을 돌아다니며, 그가 보여주는 모범과 그가 해주는 충고와 그가 내린 결정을 통해 그 아이가 자신이 처한 환경 안에서 살아나가는 것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박범신 선생님의 연작소설 「흰 소가 끄는 수레」(창작과 비평사 1997)가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제목이 상징하는 바의 '흰 소'와 또 '흰 소가 끄는 수레'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 이야기를 각색하여 새롭게 꾸며 봅니다:
생각이 깊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넓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되고 낡아 기둥뿌리는 썩고 흙벽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불이 났습니다. 집 전체가 불길에 싸여 버렸는데 자녀들이 안에 있습니다. 불이 났는데도 아랑곳없이 집 안에서 자녀들이 철없이 놀고 있는 것입니다. 다급한 나머지 젊은이는 "얘들아, 나오너라. 빨리!" 하고 안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불이 뭔지도 모르는 철없는 애들이라 놀이에 빠져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큰일났습니다. 다 죽게 될 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윽고 젊은이에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여기 재미있는 것이 있다.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너희를 모두 태워주마." 그제서야 애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불난 집에서 나왔고, 젊은이는 애들에게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선물했습니다.
만일 아이들이 불난 집에 그냥 철없이 머물러 있었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타하는 젊은이의 사려 깊은 외침에 불난 집에서 나올 수 있었고,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흰 소가 끄는 수레에 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 즉 하늘나라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불난 집(火宅)은 바로 이 세상, 즉 생로병사와 온갖 욕심으로 불타고 있는 이 세상, 지상의 나라를 말합니다. 수레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구하는 젊은이는 말씀이십니다. 아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구원받는 아이들처럼, 비록 철없이 살아왔다 하더라도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흰 소가 끄는 수레에 낙오되지 않고 올라타길 바랍니다.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불타고 있는 집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불타고 있는 집에서 우리가 나온다는 것은 삶의 전환점을 말합니다. 이를 신앙의 눈으로 보아서는 영적 성숙에로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영적 성숙의 길을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심우도(尋牛圖)에서 빌려올 수 있습니다. 어느 절을 찾든지 대웅전 바깥벽으로 그려진 벽화를 보게 됩니다.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는 심우도는 진아(眞我), 즉 참된 나를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인 소를 찾아 나서는 것을 묘사합니다. 고독, 명상, 관상, 영적 성숙에로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연이은 그림들은 먼저 소의 발자국을 일견(一見)하기까지 환상 속에서 길을 잃은 동자를 보여줍니다.
한 동자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섭니다[심우(尋牛)]. 소의 고삐를 손에 든 동자는 소의 발자국을 만납니다[견적(見跡)].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그는 소를 발견합니다[견우(見牛)]. 소를 찾습니다[득우(得牛)]. 그런데 찾아 얻은 소는 검은소입니다. 천방지축 야단스럽게 날뛰는 검은 소를 동자는 가만히 다독거립니다. 그렇게 소를 길들입니다[목우(牧牛)]. 검은 소가 점차 흰소로 변합니다. 동자는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옵니다[기우귀가(騎牛歸家)].
이 심우도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돌아오는 과정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를 공자님의 방심(放心)과 구심(求心)으로 이야기하여 방심에서 구심, 즉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과정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는 애착에서 이탈로 이르는 즉 영적 성숙의 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소는 사라지고 그 동자 홀로 남습니다[망우존인(忘牛存人)]. 그리고는 소뿐 아니라 동자도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인우구망(人牛俱忘)]. 원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 이 상태를 만다라(Mandala)라고 부릅니다. 즉 상징적인 원[○]의 형태가 무(無)로써 대변하여 나타납니다. 관념적으로 말할 때, 심우도는 합리화(rationalization)로부터 원으로 대변되는 분화되지 않은(undifferentiated)또는 구별하지 않는(non-discriminating) 의식으로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를 편재(遍在)라고 부르기도 하고, 보나벤뚜라(Bonaventura) 성인의 표현을 빌면 ‘’Co-incidence‘라고도 부릅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애착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판본환원(返本還源)].
그런데 12세기 중국에서는 다른 그림들이 첨부되어서 정각(正覺)을 터득한 노인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시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써 끝이 납니다[입전수수(入廛垂手]. 여기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 즉 영적 성숙을 이룬 사람이 아직도 영적 침체에 빠져 있거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거리, 즉 세상으로 돌아오는 참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페다고지가 되고 싶습니다.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사람들을 태우는 젊은이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돌아오는 동자가 되고 마침내는 세상으로 나오는 노인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출처: 고 민요셉신부님의 ‘일상의 신화’중에서)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귀향하여 산골에서 소를 부리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고 있는 선호(김영필 분). 하지만 사사건건 간섭하는 아버지와 지루한 농촌생활에 그는 늘 불만이 가득하다. 게다가 다른 소보다 엄청나게 먹고 또 싸는 황소 때문에 그는 평생 쇠똥만 치우다 남은 청춘 다 보낼 처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호는 홧김에 황소를 팔기 위해 부모님 몰래 황소를 차에 싣고 우시장들을 찾는다.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가격에 황소를 겨우 팔 수 있었지만 ‘헤어지지 말자’는 듯 애절하게 울부짖는 황소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다시 황소를 데리고 무작정 여행(?)이나 하려고 길을 나서는 선호에게 뜻밖에도 7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인 현수(공효진 분)의 전화가 걸려온다. 현수는 그녀의 남편이자 선호의 친구였던 민규의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며 선호에게 장례식장에 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만난 현수는 아직도 애증이란 상처가 남아 있는 선호와 달리 여전히 담담하고 자유로운 예전의 모습. 그러자 선호는 다시 아픈 옛 기억과 현수에 대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 한다.
한편 선호는 다음 날, 현수를 장례식장에 남겨두고 황소와 함께 무작정 길을 떠난다. 그런데 선호는 길과 꿈속에서 ‘맙소사’라는 절에서도 하루 묵게 되고, 황소에게 한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소녀, 또 황소를 태워달라는 부자 등...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덧 옛 추억의 장소와 바닷가에 도착한 선호는 그곳에서 다시 현수를 우연히 만나게 되자 결국 그는 황소와 현수와 함께 아버지가 계시는 산골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말씀에 접지하기; 1베드1, 22>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http://cafe.daum.net/ds0y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