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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삼국지를 보는 하나의 시각
며칠 전 TV에서 [적벽대전 2]의 광고가 요란하였다. 잠깐 스친 화면 속의 전투 장면에는 양쪽 진영에서 적진을 향해 새까맣게 쏘아 올리는 화살과 대함대가 서로 격돌하는 사이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한 쪽의 전세(戰勢)가 유리하게 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은 바로 나에게 이와 관련된 한 가지 연상(聯想)을 떠 올리게 하였다.
8,9년 전인가 한 신문에서 흥미 있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중국의 5.4운동 81돌을 맞아 중국과 대만을 통틀어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을 근대(近代)와 고대(古代)로 나누어 조사한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근대 인물로 중국과 대만 모두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孫文)이 1위로 뽑혔고 2위에는 ‘중국인의 영원한 총리’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주은래(周恩來)가 선정되었으며 중국대륙 개방의 풍운아 등소평(鄧小平)이 4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모택동(毛澤東)주석이 중국대륙 쪽에서는 당연히 앞의 순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뜻밖에도 겨우 6위에 올라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가장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고대 인물로 제갈량(諸葛亮)을 꼽았다는 사실이다. 만대의 사표인 공자(孔子)나 중원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누르고, 그가 간지 177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국인의 가슴에 가장 큰 불꽃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불세출의 영웅임에 틀림없으나 과연 중국의 고대 역사를 통틀어 중국을 대표할 만한 가장 위대한 인물일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소설에 의해 미화되고 부풀려진 그의 행적과 역사적 실체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곧장 서점으로 달려갔다. [제갈량집(諸葛亮集](홍익출판사.1998)이라는 책을 우선 구입하였다. 제갈량이 쓴 글과 후대에서 제갈량과 관련된 병법을 모은 <장원(將苑)><편의십육책(便宜十六策)><삼국전례(三國戰例>를 번역하여 한권으로 묶은 책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제갈량의 병법(兵法)에 관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그의 병술이 녹아있을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우리가 읽었던 책들 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해 무수하게 언급되어 있어 우리의 생각 속에 이미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문부분 보다도 오히려 번역자가 책 앞머리에 쓴 <제갈량의 생애>라는 글이 나의 주목을 끌었다.
17쪽부터 40쪽까지 쓴 꽤 긴 내용인데, 그것은 우리가 읽은 [삼국지연의]와는 거리를 둔 전술(戰術)과 전략(戰略)의 관점에서 서술한 객관적인 내용이었다.
번역자인 박동석씨의 이력에 눈길이 갔다. 1940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정치대학교 동아연구소에서 <중국 군사간부교육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캐나다 국가전략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였고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수로도 재직하였다. 중국 군사학과 국가전략 연구의 전문가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현대전(現代戰) 연구가가 서술한 제갈량 전기였다.
필자는 흥미가 동하여 박동석씨의 [제갈량의 생애]의 줄거리를 근간으로 취한 뒤 다시 요약하고 거기다 그동안 필자가 사이사이 여기저기에서 읽은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고 덧붙여 내 나름의 시각으로 2000년 5월 경에 이 글을 완성하여 한 동문회보에 기고하였다.
이를 다시 다듬어 소개한다.
제갈량은 중국 후한(後漢)시대 말기에서 위진시대 초기까지, 서기 181년에 태어나 234년 54세로 오장원(五丈原)에서 최후를 마칠 때까지 유비와 유선(劉禪) 부자를 28년간 받들며 촉한(蜀漢)을 세워 한(漢)왕조의 부흥에 온 힘을 다 바쳤다.
한편 유비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해인 서기 184년, 의형제를 맺은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를 이끌고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유랑한지 23년이 지나 47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형주(荊州)를 장악하고 있던 유표(劉表)의 휘하에 몸을 맡기며 한 조그마한 현성(縣城)을 지키던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유비가 저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백면의 청년 전략가 제갈량을 휘하에 넣었을 때 그 보다 스무살이나 아래인 겨우 27세의 나이였다. 천하통일의 위업을 눈앞에 둔 조조(曺操) 나이 53세요,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은 아직 25세 때였다.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軍師)에 임명되자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전략으로 북쪽 조조의 위(魏)와 동쪽 손권의 오(吳)에 이어 유표의 형주와 유장(劉璋)의 익주(益州)를 합해 중원(中原)을 셋으로 나누어 촉(蜀)으로 한 축을 형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형주와 익주를 손아귀에 넣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천하를 삼분하는 계기였다.
조조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정(南征)에 나섰다. 목표는 형주의 유표와 유비 그리고 강동(江東)의 손권이었다. 조조는 간단히 형주를 함락하였다. 형세를 관망하던 손권은 하구(夏口)에 피신해 있던 유비의 사신으로 온 제갈량의 설득에다, 조조의 위협에 자신도 다급해진 터라 유비와 협력하기로 하였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화공전법(火攻戰法)으로 조조의 대함대를 격멸하였다. 이 장쾌한 드라마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자세히 전한다.
209년 형주에 발판을 만들어 파촉(巴蜀)지역을 장악하여 ‘삼국정립(三國鼎立)’의 형세를 갖춘 것은 5년 만인 214년이었다. 220년 천하를 풍미하던 숙적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조비(曺丕)가 위(魏)왕조를 창건하였다. 이에 유비도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221년에 성도(成都)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한왕조와 구별하여 촉한(蜀漢)이라 부른다. 이어 손권도 다음해인 222년에 오(吳)를 건국하여 명실공히 3국정립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갈량이 내정의 총책임자가 된 것은 유비가 촉한지역을 차지한 214년부터 오장원에서 최후를 맞는 234년까지 3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의 통산 20년간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에다 군총사령관을 겸직한 셈이다.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북으로 국력이 일곱배나 강한 조조의 위나라와 싸우고, 동쪽으로 신흥 강국인 손권의 오나라를 마음대로 요리하며 안으로는 엄격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치세로 나라를 이끌었다.
제갈량(181~234)
유비는 즉위하기 2년 전 파촉 전역을 수중에 넣었으나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손권과 조조가 결탁한 협공을 받다가 손권에게 붙잡혀 참살되는 아픔을 겪었다. 촉한을 건국하자마자 유비는 아우 관우의 복수를 하겠다며 형주를 치려하였다. 중신들의 반대가 만만찮았고, 특히 조운(趙雲.子龍)은,
“국적은 조비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따라서 위를 쳐부수는 것이 선결문제이며 사사로운 원한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직언하였다. 제갈량도 노골적인 반대는 하지 않았으나 조운과 동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동정(東征)을 감행하였다. 출병한 사이 파촉 지역을 지키던 장비가 원한을 품은 부하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비보를 접한 채 형주 깊숙이 진격하였다. 오나라 장수 육손(陸遜)은 유비의 군대가 보급선이 멀어졌다고 판단하자 화공(火攻)을 퍼부어 거의 전멸시켰다.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도망친 유비는 백제성으로 피신하여 이내 병상에 눕고 마침내 223년 63세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라를 새로 건국한지 겨우 2년 만이었다.
우둔한 그의 아들 유선(劉禪)이 대를 이었고, 다행히 그는 우둔하기는 하였으나 오만하지는 않아 아버지 유비의 간곡한 유언인,
“너는 승상(丞相)과 더불어 종사(宗事)를 의논하고 그를 아버지처럼 섬겨라”라는 타이름을 잘 지켰다.
승상 제갈량의 최대의 숙제는 위를 멸망시켜 한왕조의 부흥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오와의 분쟁을 해결하고, 다른 하나는 반란을 일삼는 남방 만족(蠻族)을 평정하는 일이었다.
원래 오와 동맹하여 강대한 위를 친다는 전략은 오랫동안의 제갈량의 꿈이었다. 그러나 양국관계는 관우의 전사, 유비의 패주(敗走)로 인하여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갈량은 등지(鄧芝)를 두 차례나 오에 파견하여 화해를 이루어내는 외교력을 발휘한다.
오와의 관계가 복원되자 다음은 서남방 지역 차례였다. 왜냐하면 유비가 죽자 촉 정부 통치에 반감을 품어 왔던 서남부 지방의 서남이(西南夷)라 부르던 만족들은 옹개.맹획을 우두머리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이들을 평정하니 225년의 일이다.
227년, 제갈량은 마침내 촉한의 총력을 결집하여 북벌을 위한 장도에 오르게 된다. 이때 주군인 유선에게 바친 글이 저 유명한[출사표(出師表)]이다. 글귀 하나하나에 출진에 임하는 비장한 결의와 충절이 베어나는 고금의 명문장이다.
6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평관(陽平關)에 다다라 해동(解凍)하기를 기다렸다. 제갈량은 위연(魏延)에게 주력군을 주어 동진하게하고 자신은 남겨진 적은 병력으로 양평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위의 사마의(司馬懿.字는 仲達)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기습하여 왔다. 남아있던 병력으로 상황은 급박하였고 성내의 병사들은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모든 병사들에게 군기(軍旗)를 내리고 성문을 활짝 열게 한 다음 빗자루를 들고 태연히 청소하도록 명령하였다. 사마의가 당도하여 보니 성안은 텅 비어있었다. 제갈량의 계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마의는 필시 복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후퇴하였다. 후에 사실을 안 사마의는 발을 구르며 원통해 하였다. 제갈량에게 가장 아픈 허를 찔린 것이다. 이것이 삼국지에 나오는 ‘공성지계(空城之計)’라는 전술이다.
228년 봄이 되자 제갈량은 전군에게 진격을 명령하였다. 우선 조운과 등지 두 장수에게 기곡(箕谷)에 포진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우회하여 기산(祁山)으로 향하였다. 기산은 장안(長安)을 배후에서 둘러 싼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이다. 제갈량은 순식간에 이를 제압하고 여세를 몰아 남안(南安).천수(天水).안정(安定) 등 세 군을 평정하였다.
놀란 것은 조예(曺叡. 魏明帝. 제3대왕)였다. 위(魏)에서는 조조의 아들 조비(曺丕.文帝.제2대왕)가 겨우 7년 재위 후 병사하자 그의 아들 조예가 대를 잇고 있었다. 조예는 장합에게 5만의 정예군을 주어 대항하도록 하였다. 이때 장합과 맞선 촉의 장수는 마속(馬謖)이었다. 양국의 선봉대는 가정(街亭)에서 조우하였다. 제갈량은 실력 이상으로 자신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마속이 마음에 걸렸으나 선봉대 지휘를 자청하는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선봉군을 맡겼다. 그에게 상세한 작전 지시와 더불어 노련한 장수 왕평(王平)까지 수행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제갈량의 일대 실책이었다.
마속은 제갈량의 작전지시를 무시하고 산 정상에 진을 쳤다. 적장 장합은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여 병참선(兵站線)을 차단시켰다. 물과 식량이 끊긴 그들은 굶어 죽느니 차라리 싸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하산하였으나 모두 전멸되었고 마속만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기곡(箕谷)에 포진한 조운도 우세한 적의 반격으로 패퇴하였고 제갈량도 하는 수 없이 한중(漢中)으로 철수하였다. 이리하여 제갈량의 제1차 원정은 가정의 패전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제갈량은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하라고 하지만 이대로 간과해서는 군율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갈량은 가차없이 마속을 참수(斬首)하였다.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이다. 마속을 참수한 제갈량은 총책임자인 자신의 처벌을 유선에게 간청하였고 유선은 그를 우장군(右將軍)으로 강등시켰다.
패전의 아픔을 치유하고 군대를 다시 정비한 제갈량은 228년 겨울, 제2차 북벌을 감행하였다. 제갈량은 이번 진공의 목표를 진창(陳倉)으로 잡았다. 작은 성인 진창을 일격에 격파하고 그 기세를 몰아 관중(關中)으로 전진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이러한 계산은 크게 빗나갔다. 이 작은 성에는 학소라는 걸출한 용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의 의도를 사전에 간파(看破)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가능한 모든 신무기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난공불락이었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20일을 경과하면서 점차 보급이 끊어지기 시작하였다. 천하의 제갈량도 여기에는 어쩔 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철수하고야 말았다. 이 전투 중간에 저 유명한 노장 조자룡(趙雲)이 운명하여 제갈량은 슬픔과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229년, 두 차례 북벌에 실패한 제갈량은 방향을 바꾸어 무도(武都), 음평(陰平) 두 군을 평정하여 북벌의 발판을 만들었고 그 공로로 승상직에 복귀하였다.
촉(蜀)의 북벌로
231년 봄,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제3차 북벌전을 위해 기산으로 진격하였다. 과거 북벌 실패의 주요 원인이 물자보급의 결함에 있었다고 판단한 제갈량은 새로 발명한 목우(木牛)로 군수품을 운반하였다. 위는 사마의(司馬懿)로 하여금 여러 장수를 이끌고 기산으로 출진시켜 반격하도록 하였다. 제갈량은 이번에도 부분적인 승리는 거두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그 주요 원인은 역시 병참선이 멀어져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서기 234년 봄, 제갈량은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제4차 북벌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제갈량으로서는 최후의 출진이 되는 셈이다. 촉한이 총력을 기울여 구성한 10만 대군의 대작전이었다. 이번에는 사곡(斜谷)에서 위수(渭水)의 남안(南岸), 무공(武功)을 거쳐 서쪽으로 향하여 오장원(五丈原)에 포진하였다. 이를 맞아 대결할 위의 총사령관은 제갈량의 영원한 맞수 사마의(司馬懿)였다. 이번이 두 번째 대결인 셈이다.
사마의는 처음부터 싸울 의사가 없었으며 지구전(持久戰)으로 끌고 가 제갈량이 제풀에 지쳐 후퇴하기만을 기다렸다. 제갈량도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오장원에 포진하자마자 밭을 일구어 식량자급과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일이 지났다. 그러나 지구전은 원래 원정군에게는 불리하다. 제갈량은 여러 차례 도발하여 보았지만 사마의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사마의는 오히려 밀사를 통해 제갈량의 일상생활 중 특히 기거(起居)와 침식을 점검해 보고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였다. 과연 그의 예견대로 제갈량은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피를 토하며 병상에 누운 몸이 되었다.
병세는 나날이 무거워졌다.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깨달은 제갈량은 양의(楊儀) 등 휘하 장수들을 불러 철수작전을 맡기고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서기 234년 8월,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리하여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중원의 통일을 이루어 영광의 한왕조(漢王朝)를 복원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현하려던 그의 꿈은 허무하게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제갈량의 죽음은 곧 사마의의 진영에 알려졌고 즉시 추격하였다. 그러나 양의의 부대가 깃발을 높이 들고 반격해 왔다. 또 하나의 계략으로 착각한 사마의가 급히 군사를 후퇴시키는 사이 촉의 군사는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仲達.사마의)을 쫓는다'라는 말의 유래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사마의야 말로 진정한 승자이다. 그는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알았다. 무작정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적의 동태와 허점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치 <손자병법>의 시계(始計)편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듯한 전법을 구사하여 제갈량을 물리친 것이다.
“군사를 부린다는 것은 적을 속이는 일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 사용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듯이 보이게 한다. 가까운 것을 노리면서 먼 곳을 노리는 듯 보이고, 적에게 이익을 주는 척하며 그들을 유인하여 적들을 혼란시킨 다음 공격하여 격파한다. 적의 군세가 건실하면 이 편에서도 태세를 정비하여 그에 대처하고, 적이 강성하면 자중하여 정면충돌을 회피한다. 적을 성나게 하여 소동이 일게 하고, 저자세를 보여 적으로 하여금 교만함이 나타나게 한다. 적이 안정하여 휴식을 취하면 이를 못하도록 힘들게 해야 하고, 적들이 서로 간에 연합하여 친근감을 갖게 되면 이를 이간질하여 방해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적의 허술한 곳을 공격하여 적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점을 노려야 한다.”
그렇다면 냉철한 판단력과 사태를 단숨에 꿰뚫어보는 혜안(慧眼)에다 미래의 일까지 멀리 조감할 줄 아는 원대한 식견을 가진 제갈량이 그의 만년에 그토록 무모하리만큼 무리수를 강행하여 네 차례에 걸친 북벌의 실패로 국력을 소모하고, 마침내는 그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원인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유비가 죽음을 앞두고 승상 제갈량에게,
“그대의 재능은 조비(曺丕)의 열배나 됩니다. 반드시 나라를 지켜서 한 왕조의 부흥을 달성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내 아들 유선을 도와줄 만하면 돕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왕위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며 후사(後事)를 부탁하자, 제갈량은,
“신 제갈량은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고 충절과 목숨을 바쳐 후대를 받들겠습니다.”
라고 약속하였다. 그 임금에 그 신하였다.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등 걸출한 백전노장들이 하나둘 차례로 그의 곁을 떠나고 모든 국사의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지게 된 것이다.
유비가 생존시에는 제갈량이 제안한 전략에 대하여 그 참모들과 열띤 찬반토론과 격렬한 논쟁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어리고 미숙한 유선(劉禪)을 받던 후에는 모든 크고 작은 판단을 혼자서 내려야만 하였다.
토론을 함으로써 생각의 피드백(feedback)을 거치며 얻어지는 토론내용의 음미와 수정을 통한 사고(思考)의 성숙을 이루는 과정을 잃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비단 제갈량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하여 능력이 출중한 영웅이나 권력이 한 손에 집중된 독재자들이 십중팔구 빠지는 함정인 것이다.
모든 임무를 혼자 떠안게 되면 피로가 누적되고 그 피로는 목표달성에 대한 조급증을 불러 일으킨다. 도덕성과 의무감(義務感)의 화신(化身)이었던 제갈량은 오로지 나라 일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자기를 채찍질하고 건강이나 일신의 안위도 저버리고 휴식마져 갖지 못한채 북벌에 온 힘을 쏟다가 끝내는 시름시름 앓으며 전진(戰陣)에서 피를 토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위를 멸하고 한왕조를 복원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던 그의 이상은 그의 사후까지 무거운 유산으로 남겨져 국운(國運)개척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위에서 사마의의 둘째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권력을 잡자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위를 치자는 논의가 촉의 조정에서 일었다. 촉에서는 강유(姜維)가 군권(軍權)을 쥐고 있을 때였다.
“지난날 승상께서 천하를 삼분지계로 나누는 계책으로 여섯 차례나 기산(祁山)을 나가 중원(中原)을 도모하려다가 불행히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공을 이루지 못하셨으나 이제 승상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위나라에 틈이 생긴 때를 도모하여 친다면 진충보국하는 길이 될 것이오.”
라는 말에 하후패 등 거의 모든 장수들이 찬동하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휘하 장수인 장익(張翼)은,
“촉나라 땅이 좁고 양식마져 넉넉지 못한 터에 이제 우리가 멀리 군사를 나아가 침은 옳지 않사외다. 오직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굳게 지키며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사랑함이 이 바로 나라를 보전하는 계책인 줄 아뢰오.”
참으로 백번 지당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이와 같은 이성적(理性的) 간언(諫言)에 귀 귀울이는 자가 없었다.
강유는 드디어 대병을 일으켜 전선으로 나아갔다. 이때 위의 장수는 등애(鄧艾)와 진태(陳泰)였다. 이번에도 단곡(段谷)전투에서 등애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만다.
이와같이 제갈량의 후예들도 걸핏하면 그가 내세운 이상(理想)과 국시(國是)를 팔아 무모한 도전으로 국력을 소진시켰다.
제갈량이 죽은 후 유비의 아들 유선은 장완(蔣琬).비위 등의 보필을 받아 처음에는 위의 압력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위의 장군 등애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불가항력임을 깨달은 유선은 스스로 몸에 포승을 묶고 항복하고 말았다. 서기 263년, 제갈량이 죽은 지 29년 후요, 삼국 중 제일 먼저 나라를 잃고 만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고 경영한지 13년, 그의 후예들이 이끈지 29년을 합해 불과 42년을 근근히 이어간 촉(蜀)은 전쟁으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나버린 나라였다. 역사에서는 한낱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과 같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한 것이다.
제갈량이라는 희대의 슈퍼스타에 의존한 국가경영은 그 스타가 사라지자 시스템으로 뒷밤침 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유비를 위시한 선대(先代)의 숱한 사나이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함께 일구고 가꾸어 온 나라가 겨우 다음 대(代)에 와 허무하게 하루 아침에 중원(中原)의 먼지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영웅 중 영웅인 조조(曺操)와 제갈량(諸葛亮), 그리고 손권(孫權)과 사마의(司馬懿) 중, 현실 세계에서의 가장 큰 실패자는 제갈량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국인들은 그에게 군신(軍神)이라는 칭호로 추앙하고 있을까?
그것은 주희(朱熹.朱子)의 [자치통감강목(自治通監綱目).1080년]과 주자학의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한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1400년] 덕분이다. 주희는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유교적 가치관과, 한(漢)나라의 부흥을 꾀한 정통성에 촉(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 조조나 사마의(司馬懿)를 하찮게 여기고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바친 유비와 제갈량에게 주자학(朱子學)의 왕관을 씌워준 것이다.
자기 일신의 안위 따위는 초개같이 여기고 중원(中原)의 먼지 속에 말을 달리고 또 달렸던 유비와 제갈량,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 등 멋진 사나이들의 땀내나는 일생을 사실이 어떠하던 간에 중국인들은 강담(講談), 희곡(戱曲), 경극(京劇), 소설(小說) 등 여러 장르로 재생산하여 중국인의 심성(心性) 깊숙히 자리잡은 가장 큰 로망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성웅(聖雄), 조조는 간웅(奸雄), 제갈량은 군신(軍神)이라는 극단적이고 고정된 상(像)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정작 주자학의 본바닥인 중국(中國)보다 주자학(朱子學)을 더 숭상했던 나라인 조선(朝鮮) 에서 [삼국지연의]가 얼마나 선비들에게 일신(一身)의 수양과 처세(處世)의 필독서로 읽혀왔는지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서 일탈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옷을 입히고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제갈량이 칠성단에서 제사를 올려 동남풍을 일으켜 바람의 풍향까지 바꾸게하여 조조의 대함대를 격파했다는 황당한 설정으로 소설의 재미를 더한 들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중국의 모든 민중이 이미 1700여년을 마음 속에 기대고 싶어 하는 전설과 한결같은 믿음 앞에 설사 그 역사적 진실을 들이 대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국의 민중들은 유구한 세월 동안 지배층의 군역(軍役)과 수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유비와 제갈량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터전을 닦아 세세손손(世世孫孫) 뒤에 오는 군주들도 어진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중들을 구원해 줄 것을 꿈속에서나마 바라 온 것이다!
적벽대전의 대승(大勝)조차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오(吳)의 명장 주유(周瑜)와 그의 부장(副將) 황개(黃蓋)가 이룬 것이다.
다만 제갈량이 외교력을 발휘하여 손권을 설득하여 유비-손권 연합군을 구성하도록 유도하여 조조의 대함대를 격멸케 한 것은 뛰어난 공적이라 할 만하다.
[삼국지연의]보다 1,100년이나 앞선 진수(陳壽)의 역사서 [삼국지(三國誌).285년]나 주희와 비슷한 시기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監).1084년]은 편견없이 위(魏)를 중심으로 한 균형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한 책들과 자료
[제갈량집] 박동석 옮김. 홍익출판사.1998
소설 [삼국지] 김동성 역. 정음사. 1984
[인물 삼국지] 모리야 히로시. 범우사. 1995
[동아시아사 연표]김안국. 청년사. 1992
김운회 '삼국지 바로 읽기'
첫댓글 우선 장대한 '제갈량의 생애'를 연구하시고 걸출하게 써주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1775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전해지는 중국 고사에서 <토론을 함으로써 생각의 피드백을 거치며 얻어지는 토론내용의 음미와 수정을 통한 사고의 성숙을 이루는 과정을 잃게 된 것>이 제갈량의 참패 원인이 됐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토론의 중요성을 알겠고 '공선지계'의 전술. '읍참마속'의 고사 등 유명한 병술도 흥미롭네요. 길어 지루해도 흥미롭게 다 읽고 댓글을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셨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좋은 글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 요즘 잠도 잘 오지 않아, 일전에 읽었던 <삼국지 용병학> 서적을 그저께부터 다시 읽고 있습니다. 좋은 자료로 활용하겠습니다. 늘 건필 하세요 -도랑-
도랑님, 영광입니다~~ 우리 카페 문필가이신 도랑님께서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랑님의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며 칠을 벼루다 오늘은 작심하고 끝까지 읽어 봤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건안 하시길..
명지님, 졸필을 애써 읽어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지금 눈이 아파서 못 읽겠구요.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
후리지아님, 오랫만이군요^^ 명문가이신 후리지아님의 방문이 영광스럽습니다.
이해가 되지않어 다시 나누어 읽어보고있습니다 날자길게 늦어지더라도 이해가되면 댓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장문을 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고맙습니다.
중국 고전을 주제로 하다보니 한문(漢文)투의 글이되어 읽기 힘드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월전리자님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마시고 너무 길면 1 편 2편 나누면 보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개인 의견일 뿐, 좋습니다.
거서리님, 이해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사는 말이 없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지기님은 그 많은 게시판의 글 들을 언제 그리 세세히 돌아보시는지 놀랍군요^^
방대한 중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셨군요^^ 삼국지는 예전에 박종화본과 코주부 김용환님의 만화로 그려진 삼국지를 보고 자란셈이죠. 요즘의 이문열 역은 가벼워 보여 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제 아는 상식으로도 촉한보다는 위나라가 더 오래 존속했고 위지 동이전에 우리의 역사도 녹아있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좋은 글 세세히 정독했습니다=^^=
피카소님, 반갑습니다. 김용환의 만화 [코주부 삼국지]는 우리 어린시절 청소년들에게 가히 폭발적 반응을 얻었습니다. 6.25전쟁이 1953년도에 끝났는데, 전쟁의 와중인 1952년 11월부터 <학원>이란 청소년 월간지에 연재되었지요. 연재 기간 동안 저도 잡지를 열심히 읽고 만화를 모사(模寫)하여 중학 2학년까지는 학내에서 소년 만화가로 통한 적도 있었지요^^, 아득한 지난 세월의 이야기이지만~~
중국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명한 제갈량이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전할 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답니다 월전리자님의 이 글은 마치 대학 논문을 쓰신 듯.. 상세한 자료를 흥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다알리아님, 끝까지 읽어주셨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