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에세이(4) 최종편을 올립니다.
언저리에서 거닐다
최현득
이어지는 행정대란
1990년 9월 고향 땅 대구시에 과장급으로 발령받았다.
나의 무대가 하나의 도시로 한정되는 한편, 역할과 책임은 좀 무거워졌다. 중간관리자가 되면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피라미드의 중간쯤에서 아래위를 두루 살펴야 하니까.
‘낙하산’이란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생각한답시고 해주는 말이 걸작이다. 똑똑한 사람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 서울에 남아서 고향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똑똑하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자리는 뺏기기 싫다는 말과 같았다. 눈치를 주는 분위기가 느껴질 때마다 아랫배에 ‘끙’ 힘을 준다. 공직이 무슨 동네 반상회나 친목단체인가!
행정환경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문민정부’는 이름부터 차별화를 시도했고 말끝마다 변화와 개혁을 외쳤다. 공무원들은 ‘복지부동(伏地不動)’ ‘철밥통’이란 생소한 말에 멍해졌다. 행정의 질적 변화 또한 기성공무원의 능력과 의식구조로는 따라잡기 힘들어졌다. 정보화, 세계화, 전문성과 경영마인드…. 1994년 12월, 나는 그러한 상황을 ‘행정대란(行政大亂)’으로 표현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상황 설정에서는 너무 소박하고 성급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이 대란은 새로운 대란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 되고 있는 것 같다.
1995년 7월 민선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힘의 이동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강자에서 약자로. 급기야 밀어닥친 IMF 한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 공직사회도 얼어붙었다. 복지부동으로 시작된 사자성어 시리즈는 낙지부동 복지안동(伏地眼動)을 거쳐, ‘신토불이(身土不二)’로 절정을 이룬다. 어디까지가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흙인지 모를 정도로 신토가 하나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어떤 충격에도 줄지 않던 대구시 공무원 숫자가 이때 2천여 명이나 줄었다. 21세기가 밝았다. 갈등관리와 노동조합, 협치(協治)란 말도 익혀야 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협치―, 행정 현장에서는 ‘거버넌스(governance)’란 아리송한 영어를 더 많이 썼다.
“우리 아들을 돌려주세요!”
“우리 가족을 돌려주세요!”
1995년 4월의 빛바랜 업무수첩에서 호곡소리가 들린다. 지하철 상인동네거리와 중앙로역, 대구의 하늘 아래 두 차례나 물리적 재앙이 내렸다. 감내하기 어려운 갈등의 계절들…. 2003년 2월의 중앙로역 참사는 사고 132일 만에야 합동영결식을 거행하게 되는 기나긴 터널이었다. 그 수습에 엄청난 행정력을 쏟아 부으면서 법치와 현실의 차이도 절감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장여건이 불리한 대구, 도시의 경쟁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춘래불사춘의 명암
나는 전한(前漢)의 미인 왕소군(王昭君)을 좋아한다. 흉노에게 시집간 2천 년 전 아가씨는 미모보다는 한 구절 천고의 절창으로 영생을 누린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울적함을 달래주는 말일까. 나 역시 봄이 올 때마다 되뇌었다. 승화된 감정을 추스르게 해준 왕소군에게 감사하면서. 햇수를 따지면 보직관리에서 소외된 기간과 대체로 비례하는 성 싶다.
막말로 물 먹은 기간이 십년쯤은 된다. 감투얘기여서 시답잖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굴원 이백 두보, 수많은 시인묵객들도 ‘회재불우(懷才不遇)’를 노래하였으니,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따질 정도는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의 춘래불사춘은 사실 스스로 초래한 면이 많다. 수많은 인간이 부딪히는 생존경쟁의 장, 처세와 보신 그리고 적응은 기본이면서 능력이기도 하다. 나는 엇길로 방향을 잡았다. 공직의 자세와 가치관, 조직이나 일에 대한 문제의식에 매달리면서 스스로 외톨이가 된 것이다. ‘행정문화(行政文化)’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글줄을 쓰기도 하고, 천연기념물, 대학교수 등등의 별칭이 따라붙었다. 실속은 없었지만 허황된 꿈만으로 공직을 마무리한 것도 어찌 보면 대단한 행운인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밑진 장사를 한 것 같지는 않다.
2006년 7월 행정관리국장으로 명예퇴직을 했다. 마지막 술자리에서 두루뭉실하게 ‘행운유수(行雲流水)’란 말이 생각난다고 했더니 명예스럽게도 박수를 받았다.
대구가 보수적 폐쇄적이란 얘기는 누구나 한다.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나만은 빼고’ 심각하게 얘기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를 뺀 다른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특별한 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 현실성 있는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CEO나 최고관리자들이 진정한 슈퍼스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수필을 쓰는 외도
현상이 답답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탈출구를 찾는다. 우선 남아도는 시간을 처리해야 하고, 제 나름의 끼도 발산시켜야 할 것이다.
“최과장 같은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구시보》에서 「민원창구의 혁명」을 읽은 한 시민의 전화였다. 1993년도 연말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문민정부는 관청의 문턱을 낮추는데 주력했고, 전국적으로 ‘민원일회방문처리제(民願一回訪問處理制)’를 시행하면서 서슬이 퍼랬다. 시민과장인 나는 이 시책을 단순한 행정홍보의 차원을 넘어 다산(茶山)의 목민심서까지 인용하면서 ‘혁명’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의식 있는 시민들의 박수와 관심은 글을 쓰는 하나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이듬해 ‘대구시청문학회’가 결성된 것은 나 자신의 내밀한 움직임과 연관된 면도 있을 것이다.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지역 문인들과의 교분이 쌓인다. 박해수 백정혜 우호성 이수남 그리고 이영규와 산림공무원 이정웅…. 나도 많이 마셨지만 그들은 더욱 많이 마시는 것 같았다. 만촌동에 있던 이영규의 일봉출판사, 그 어두컴컴한 지하실은 추억의 주점이 되어버렸다. 두 차례 ‘죽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 진단에 나는 좀스럽게 항복하고 말았지만, 간 큰 이영규는 계속 마셔댔다. 2006년 6월 어느 날 죽는 그날까지 그는 매일 소주 두 병을 해치웠다고 한다.
나의 경우 문학과 공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처세와 보직관리에 좀 대범하게 된 반면에, 훈화성의 건조한 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나의 주장 나의 외침을 위해 문학을 당의정(糖衣錠)으로 이용하겠다는 불측한 의도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퇴직한 후 많지 않은 글들을 정리한 수필집 『창문을 열고』를 발간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공무원과 시민, 일상과 일탈의 경계를 넘나들고자 했던 고민의 흔적들, 변화나 문화에의 욕구가 행간에서 읽혀지기를 바랐다. 하여튼 글 쓰는 공무원이 된 것은 예기치 못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필보다 바둑이나 중국어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했을 것이다. 수십 년이나 답보상태에 있지만 아마5단의 실력 탓으로 자연히 시청 바둑의 간판으로 행세하게 된다. 국수(國手)를 지낸 하찬석 9단과의 친분으로 바둑계를 알게 된다. 언젠가 매일신문사 주관의 여성바둑 타이틀매치가 대구에서 열렸고 전야제 행사에 참석했을 때다.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 부부와 마주한 자리, 주위의 바둑 단수를 헤아려보니 프로 50단은 되었다. 근래 바둑판을 통해 동양 삼국의 쟁패를 보는 것도 취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일본처럼 ‘예술’까지는 뭣하지만, 세상을 보는 창이랄까 시야를 넓히는 외도(外道)였다는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
지산동에 있는 대구시 교통연수원을 아는 시민은 별로 없다. 웅장한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난 7월에 3년 임기를 마쳤지만, 이곳 원장을 지내면서 내 호칭은 ‘원장’으로 굳어진다.
사업용 차량 운전자에 대한 친절소양교육이 임무다. 택시를 타면 “어서 오세요, 어디 가십니까?” 정도의 소리는 들려야 하고 버스기사의 불친절과 화물차기사의 과속운전도 바로잡아야 한다. 원래 편한 자리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작지만 피부에 직접 닿는 영향을 준다. 나는 힘들었다. 고객중심의 교육, 교육의 효과, 이런 명제들을 떠올리면 그다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술 한 잔 먹으면 호기를 부렸다. 신라시대를 조선시대 정도로는 바꾸어 놓았다고.
지금도 버리지 못한 당시의 버릇이 있다. 택시를 즐겨 탄다. 웬만하면 탄다. 다만 이제는 기사가 인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괜한 가슴앓이를 하지는 않는다. 해방되었으니까. 택시비가 많이 나올수록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어떨 때는 일부러 기사 양반이 기분 좋을 지점에 내린다. 걸어서 건강에 좋은 건지 고객만족을 역으로 실천하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직장을 떠난 지 석 달. 먼저 나온 동료들은 대체로 바쁜 모양이다. 악기를 만지는 사람, 헬스장에서 시간 보내는 사람, 골프나 스키에 맛들인 사람, 스포츠댄스를 한다는 사람, 농사에 올인하는 사람….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엄살은 유행어가 되었다.
여전히 세상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나이가 들수록 원숙해지기 보다는 긴장과 체력이 떨어져 도리어 유치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요즘 세상이 경험자나 노인의 지혜를 요구하는 것 같지도 않고. IT와 디지털이 판치는 곳에, 지긋하게 말년을 즐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못 죽어 사는 사람’이 대구에도 몇 십 퍼센트라는 우울한 통계가 들린 지도 여러 해째다. 예고된 노령시대의 달갑지 않은 전망들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십여 년 전쯤이었다. 출세한 사람들이 모인 술자리에 끼었는데, 한 마디를 해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출세가 늦은 데 대한, 아니 못한 데 대한 변명이 있어야 했다. 그때 불쑥 나온 말이었다. 미리 준비된 것처럼.
“꼭 정상에 올라야만 등산하는 맛이 아닐 겁니다. 언저리에서 거니는 기분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면 나의 삶 자체가 언저리 등산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어느 언저리에서 맴돌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언저리는 매우 넓을 것 같다.
- 대구문학 2009년 겨울호
첫댓글 친구야 그동안 잘있제? 퇴직후 새로운 삶자체를 그 간의 소재로 문학 활동을 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말년에 건강도 챙겨가면서 취미생활도 활발히 하기를.... 건투를 빈다.
같은 정부미라고 관심이 남다르군.ㅎㅎ 역시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