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작가와 작품 해설
1. 『작가』에 대하여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니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나움부르크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음악과 시를 좋아했고 이미 14세 때에 「나의 인생에서」라는 자전적 소품을 썼을만큼 조숙했던 니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권위주의적인 모든것에 저항적 태도를 보였고, 학교 수업 과정을 우습게 보고
그리스 철학 서적을 주로 탐독했다.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공부보다는 술과 여자 등 쾌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금 엄숙하고 고독한 생활로 돌아갔다. 본 대학 문헌학 교수였던
유명한 처칠 교수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가자 니체 역시 친구 로데오와 함께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 라이프찌히 대학 시절에 그는 헌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 읽고서 충격적인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그가 평소 그 음악을 좋아해 왔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후기 낭만주의의 두 대표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은 청년 니체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187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이 바젤 대학 재임시에 그는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879년 그의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10년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고,
그 이후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약 10년간을 이탈리아 해안가나 스위스 산중의 요양지를
전전하면서 병과 고독과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중에서 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루 살로메와 사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5개월 만에 헤어졌다. 병과 고독과 싸우는 이런 생활 중에서도, 점점 더 원숙해져 가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진행성 뇌마비의 발병에 의해
정신 착란에 빠질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무르익은 사상들을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
쉴새없이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889년 1월 튀린에서 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 정신 병원애서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고 가장 친했던 누이 엘리자베드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2. 『작품』에 대하여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의 발전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869년에서 1876년에 이르는 시기로서, 소위
'미학적(美學的)페시미즘'의 단계이다. 이 시기의 젊은 니체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후가 낭만주의자의 대표격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였다.
니체는 자기 시대의 주지적(主知的) 문명에 저항감을 느껴, 희랍의 미적(美的) 예술적 정신을 옹호하면서 그것을 독일 문화와 결합시켜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을
창조하고자 하는 낭만적 열정에 차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그의 처녀작『음악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1872)과
『반시대적 고찰』(1873-1876)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문화 유형으로서의 주지적인 것과 주정적(主情的)인 것, 혹은 로고스적인 것과 파토스적인 것,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구분해 놓으면서, 희랍 문명은 모럴리스트인 유리피데스, 철학적 진리 탐구를 제일 목표로 했던 소크라테스 등과
더불어 주정(主情)보다 주지(主知)가, 파토스적인 것보다 로고스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보다 아폴로적인 것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문화적인 교훈을 이해했던 것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뿐이었다고 니체는 보았는데, 그러한 문화적 교훈을
그가 자기 시대의 주지적 문명에 적용시켜 비판한 것이 『반시대적 고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직접적으로 긍정하고 천재를 숭배하며 세계와 자기시대를 미학적 예술적 시각에서 해석했던 제 1기와는 정반대로, 제2기(1876-1882)에서는 니체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바그너에게서, 현세의 삶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구원의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서 바그너적 낭만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며, 제1기에 자신이 이상화했던 모든 것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며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노골적인 저항을 시도한다.
그는 예술의 낭망적 환상들을 단죄하면서, 예술에 대한 열광 대신에 냉철한 실증주의적 과학 정신을, 그리고 천재 대신에 자유 정신을 내세우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와 권위와 이상을
파괴하고 자유 정신으로써 새로운 가치들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세울것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나온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제1부 1878, 제2부 1879)은 그 부제(副題)를 '자유 정신을 위한 책'으로 달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책 자체를 합리주의자 볼테르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나온 또 다른 저술로는, 어떤 새로운 정신의 새벽을 예고하는 『여명』(1881)과 '신(神)은 죽었다'고 처음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는 『즐거운 지식』(1881-1882)이 있다.
제3기는 1882년부터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의 6,7년간이다. 이 제 3기의 사상은 제1기와 제2기의 사상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제1기에서는 예술적 미학적 낭만적 관점에서 삶을 보면서 삶의 모든 실체들을 직접적으로 긍정했고,
제2기에서는 삶의 모든 기존 가치와 권위와 이상을 철저히 부정했지만, 그러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 제3기에 이르러 다시 삶을 용감하게 긍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나 학문에 의존하는 외재적 긍정이 아니라, 이 지상, 이 현세의 삶에 굳게 뿌리를 둔 내재적 긍정이 아니라, 이 지상, 이 현세의
삶에 굳게 뿌리를 둔 내재적 긍정이며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며 운명애(運命愛)이다. 이러한 제3기의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것이 그가 주장했던
영겁 회귀 사상, 힘에의 의지, 초인 등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시기의 그의 저술들로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을 넘어서』,『도덕의 계보학』,『우상(偶像)의 황혼』,『반(反) 그리스도』,『니체 대 바그너』, 『바그너의 경우』,
『이 사람을 보라』가 있고, 그 밖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단편들로 남겨져 있다가 그의 사후에
누이 엘리자베드에 의해 정리 출판된 『힘에의 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