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자락 대한불교 조계종 천년고찰 진관사 #1
2023.6.19(월) 오전 6시 부터 3시간이 소요된 의정부 사패산(552m) 산행을 종료하고
서울특별시 은평구 북한산(北漢山) 자락의 고려 제8대 현종이 승려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사찰인 진관사 탐방에 나선다
<진관사 전각도>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진관사의 역사>
고려 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왕욱(王郁: 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090년(선종 7)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이를 본받아 척불왕이던 태종도 1413년(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었다.
그 뒤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1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하였다.
1879년(고종 16)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1964년부터 진관(眞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나한전·독성전(獨聖殿)·칠성각·홍제루(弘濟樓)·종각(鐘閣)·일주문·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진관사의 수륙재는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한전에서 발견된 항일독립운동승려 백초월(白初月)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201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는 2002년 지정된 소삼존불상(塑三尊佛像), 소십육나한상(塑十六羅漢像),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칠성도(七星圖, ․명호스님초, 산신도(山神圖)가 있다.
문화재자료로는 2002년 지정된 석불좌상, 소 독성상, 독성도와 2006년 지정된 칠성각, 독성전 등이 있다.
<삼각산 진관사 일주문>
09:45 일주문을 지나 경내 주차장에 주차(주차비는 무료)
일주문을 지나 진관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보도와 차도로 구분 지어놓은 두 갈래의 길이 뻗어있다.
입구에는 빨간글씨로 "하마(下馬)'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가라는 의미이다.
진관사가 지향하는 모든 의미가 담겨진 마음의 정원 품으로 들어가는 길.
종교를 넘어서, 마음의 정원, 진관사
진관천 위로 놓인 극락교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사용하여 싸여져 있는 독립신문 등 20여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태극기는 1919년 3.1운동 당시 기관이나 단체가 제작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것으로 태극기 및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신대한신문 2, 3호가 최초로 발견되는 등 신대한신문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등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제작된 다수의 사료가 발견되었다.
이 태극기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훌륭한 정신과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진관사 진입 구간에 '백초월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하였다.
극락교 좌우에 북한산을 오르는 등로가 있다.
우측은 향로봉방향이며, 좌측은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응봉방향이다.
삼각산 진관사 공적비와 사적비
진관사 부도군
해탈문
진관사 마음의 정원
진관사 마애 아미타불 좌상
룸비니 동산
사무를 보는 종무소인 보문원
전통찻집 보현 다실
산사음식 체험관인 향적당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해우소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진관사 장독대
동정각(動靜閣)
나가원 아래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 지붕의 목조건물로 1975년에 진관 스님이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계단석이 있는 가구식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사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기둥에는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어간에 근대 불교계의 대강백(大講伯) 탄허(呑虛) 스님이 쓴 동정각(動靜閣)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기둥 외부로 주련(柱聯)이 있고 건물 내부는 진관사의 범음을 전달하는 범종(梵鐘)이 걸려 있는데,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60㎝, 구경 91㎝, 300관의 대형 범종이다.
요사채인 나가원
거북이 석상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