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온은 고정된 실체적인 마음이 아닌,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다. 우리는 이 허망한 분별심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의식한다. 분별심이라는 것은 나누어서 인식한다는 말인데, 우리 안에는 식이라는 마음이 있고, 그 식의 대상을 세계라고 나누어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명색(名色)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은 나와 세상을 나누어서 인식하고, 일체 모든 식의 대상들 즉 명색을 서로 나누고 분별해서 의식한다.
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교 서적들을 살펴보다 보면 늘 많이 듣는 말이 ‘분별심을 버려라’, ‘알음알이를 놓아버려라’일 것이다. 이 분별심, 알음알이가 바로 식이다.
앞에서 식온은 무아라고 했다. 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변화하는 모든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즉,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전혀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일으켜 쓰되 그것이 실체인 줄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분별하여 의식한다. 어떤 음식을 보고도 몸에 좋은 음식이라거나 나쁜 음식이라고 분별한다. 날씨를 보고도 좋은 날씨 혹은 나쁜 날씨라고 분별한다. 사람들의 피부색깔을 보고 상대를 편견을 가진 채 분별하여 인식하기도 한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분별하여 인식한다.
우리는 이러한 분별심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내 안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의식활동이라고 믿는다. 그 분별심에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 의식이 인연 따라 허망하고 무상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헛된 분별심임을 알지 못하고 그 분별심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별심들은 실체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나쁜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분별하여 의식하는 마음을 보고 그것이 고정된 내 마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좋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분별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상대방을 해석해서 보게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꺼려하고, 시비 걸고, 미워하던 사람이 훗날에 알고 보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큰 도움을 줄 사람이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만약 분별심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외모나, 경제력이나, 얼굴색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따지고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을 놓아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온이 무아인 줄을 아는 지혜로운 이의 세상을 보는 참된 인식일 것이다. 식온무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분별심은 전부 공하여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일으키는 알음알이의 분별심, 쉽게 말해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은 전부 분별심이며 식온의 작용인데, 이러한 생각과 분별은 전혀 실체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분별해서 세상을 바라보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해석 없이,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만이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는 말처럼 고통을 넘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