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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1 통권 574 호 신동아 | |
[현지 심층 리포트] |
‘절망의 도시’ 자학 떨쳐낸 大邱 |
“빈 가슴 채웠으니 이제 주머니 채울 일만 남은 기라”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
때이른 무더위가 시작된 5월30일. 서울역을 오전 9시에 출발한 KTX 열차는 10시43분 정시에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교통정체가 극심했던 이날 아침 기자가 경기도 평촌의 집에서 서울 서대문 동아일보 사옥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30분. 회사 출근하는 데 걸린 시간과 대구까지 가는 시간이 별반 차이가 없다. 다른 게 있다면 KTX에선 잠을 잘 수도,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이제 대구와 서울은 완전한 1일 생활권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진 대구의 인상은 해마다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우는 찜통더위, 광역시도 중 가장 가난한 도시, 보수성과 폐쇄성, 유신정권과 5·6공의 정치적 토대, 대형 사고의 도시, 맵고 짜기만 한 음식, 유교 양반의 도시, 소비의 도시 등이다. 20여 년 전까지는 사과의 도시, 10년 전까지만 해도 섬유의 도시라는 닉네임이 붙었지만 이미 대구에는 사과 농가가 없고,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해오던 대형 섬유업체들은 IMF 관리체제 이후 몰락했다.
최근의 대구는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지역구가 대구 달성군에 있고, 같은 당 경쟁자인 이명박 전 시장은 한반도 대운하 최대의 수혜지가 대구라고 밝혔다. 정치적 기반이 비슷한 ‘빅 2’에게 대구 민심(民心)의 향배는 이번 경선에서 큰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전체 경선에서 이기더라도 대구에서 질 경우 지역구에서 패배했다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숲의 도시 동대구역을 빠져나온 기자는 먼저 대구의 공기를 몸으로 느껴봤다. 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 낮은 습도의 신선함, 서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싱그럽다. 그날 그 시간대 기상청이 발표한 대구의 온도와 습도는 서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과연 무엇이 그런 느낌을 자아내는 것일까. 아마도 동대구역 양편으로 펼쳐진 이국적 풍경의 공감각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대구 최고의 ‘미인 도로’로 꼽히는 동대구로에는 수령(樹齡) 5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히말라야시다 숲이 왕복 12차선(폭 70m) 중간 중간에 조성돼 도로에 햇볕이 잘 들지 않을 정도다.
10여 년 전 대구시는 동대구로의 히말라야시다 숲 철거를 두고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시민들은 결국 교통의 편의보다 숲의 아름다움을 선택했다. 그만큼 대구 사람들은 나무를 아낀다. 대구에 몇 달간이라도 거주해본 사람이라면 대구 도심에 정말 나무가 많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대구시는 문희갑 시장이 재직하던 1996년부터 도심 나무 심기운동을 벌여 지난해 상반기까지 11년 동안 1042만 그루의 나무를 새로 심었다. 그중 시민이 직접 심은 나무만도 471만 그루에 달한다.
범시민적 나무 심기 운동은 대구를 상징하는 혹서(酷暑)도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35℃가 넘는 날이 1994년엔 43일에 달했지만 2000년엔 1일, 2001년과 2002년엔 5일, 2004년엔 8일, 2005년엔 6일로 급격하게 줄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해에는 12일이 넘었으나 전국 평균치(13일)보다는 적었다. 이렇게 보면 대구는 더 이상 폭서의 도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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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로를 따라 걷다 ‘벼룩시장’을 들추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포항에서 10여 년 살다 3년 전 대구로 이사했다는 송혜선(44)씨. 송씨는 빨간 사인펜을 들고 벼룩시장에서 미용실 매물과 직원 구인 광고를 열심히 훑고 있었다. 5월30일부터 6월5일까지 대구에서 머문 기자는 만나는 시민마다 ‘대구가 살기 좋은가’ ‘먹고살기는 어떤가’ ‘이명박· 박근혜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가, 그리고 지금 선거를 한다면 누구를 찍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송씨에게도 그랬다. 대개 그렇듯 똑 부러지게 단정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으나 대강의 민심은 엿볼 수 있었다.
“대구는 사람 살 만한 도시가 못 됩니더. 내가 10여 년 전 대구를 뜰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다시 돌아와 수성구에 미용실을 냈더니 손님이 하도 없어 바로 망했지예. 먹고살 수가 있어야지예. 그래서 이렇게 먹고살 궁리를 하고 있는 것 아입니꺼. 박근혜가 더 좋긴 한데 실제로 찍으라면 고민 좀 해야지예. 당장 먹고살 거리를 만들어줄 사람을 찍어야 하니까. 언론에서 자꾸 대구를 ‘꼴찌 도시’ ‘절망의 도시’라고 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예.”
지난해 3월 ‘월간조선’은 대구를 ‘성장이 멈춘 절망의 도시, 순환·경쟁·상호비판이 없는 동종교배의 도시’라는 분석 기사를 내보냈다. 그 근거는 1인당 지역내 총생산(GRDP)이 1993년 이후 단 한 번도 16개 광역지자체 중에서 최하위를 면한 적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 번도 정치적 지형도가 바뀐 적이 없는 보수성, 폐쇄성이었다. 또한 100명 이상이 희생된 2번에 걸친 대형 지하철 사고도 대구를 ‘절망의 도시’로 만든 재료가 됐다.
여기가 절망의 도시 맞아? 동대구로에서 택시를 타고 대구의 명소 중 하나인 수성못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잘 이해되지 않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외제차의 출현 빈도가 서울 강남에 버금갔고, 대낮에 혼자 차를 모는 여성 운전자는 서울보다 더 많아 보였다. 또 40층에 가까운 주상복합건물이 대충 헤아려도 7개가 넘었다. 택시 기사는 “곧 50층이 넘는 건물도 세워질 것”이라고 했다. ‘여기가 성장이 멈춘 절망의 도시 맞아?’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구의 8학군으로 불리는 수성구의 한 쪽에 위치한 이곳은 밤에는 아베크족이 모여드는 데이크 코스, 낮에는 시민들의 산책코스가 된다. 점심시간 수성못 인근의 레스토랑, 식당들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서울로 치면 석촌호수쯤 되는 수성못의 야경은 한강 야경을 뺨칠 정도로 예뻐 밤에도 많은 사람이 이 일대에서 흥청거린다. 수성못이 한눈에 들어오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삼겹살을 시켰다. 메뉴판을 본 기자는 깜짝 놀랐다. 삼겹살 4000원, 갈비살 10000원, 등심 12000원…. 동행한 대구 친구에게 “이거 뒤로 빼돌린 고기냐, 왜 이렇게 싸냐”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이 더 놀라웠다.
“대구에선 삼겹살이 5000원이면 비싼 편이고 갈비살도 이 집은 비싼 축에 속하는데 왜 그러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가고.”
대구의 물가는 얼추 서울의 60% 정도다. 집값도 제일 비싼 곳을 서로 비교하면 10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서울의 30~40%다. 대구 사람들은 집값이 폭등하는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을 부러움 섞인,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다시 친구의 말.
“서울과 신도시 사람들은 집만 사놓으면 일 안 해도 먹고살겠다. 그렇게 한 해에 몇억씩 오르면…. 집 없는 사람들은 배 아파서 어떻게 사냐. 대구는 많이 올라봐야 몇천만원인데…. 대구에는 진짜 먹고살 게 없다. 자고 일어나면 음식점 간판이 바뀐다. 나는 그래도 일찍 자리를 잡아서 괜찮지.”
수성못 인근에서 24시간 편의점을 운영하는 친구는 한때 잘나가는 증권사 직원이었다. 기자가 “서울에도 망하는 음식점이 많다. 우리 회사 앞에도 1년이면 서너 번씩 간판이 바뀌는 집이 숱하다”고 했더니 그는 “아무리 그래도 대구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음식업중앙회에 확인했더니 대구의 음식점 휴폐업 비율은 다른 도시에 비해 평균 이하였다. 휴폐업 음식점 속출은 외환위기 이후 전국적인 현상. 대구는 언제부턴가 엄살이 심한 도시가 돼 있었다. 다른 도시가 함께 겪는 어려움을 과대포장하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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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음식이 바뀐다
점심을 먹고 인근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수성못은 원래 일제 강점기 인근 수성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로, 수성들은 지금 대구 제일의 먹자골목과 모텔촌으로 탈바꿈했다. 일명 ‘토초세 건물’들이다. 땅 주인들이 토지초과이득세를 피하기 위해 가건물을 지어 식당에 세를 주면서 형성된 곳이지만, 토초세가 위헌 판결이 난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대구시가 공인하는 먹을거리 명소로 입지를 굳혔다. 카페촌이 줄지은 들안길은 수성들과 수성못을 경계짓는 옛길로 아직도 옛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먹자골목의 한 낙지전문점 주인은 “장사꾼이 언제 장사 잘된다고 하는 것 봤소? 여기도 맛 좋고 알려진 집은 잘되고 맛 없으면 망하는 거지”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대구에 일주일 머무르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식사를 했는데, ‘짜고 맵기만한 대구 음식’이라는 말은 옛말이 돼 있었다. 지금 전주에 와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식의 종류도 많고, 맛깔스럽고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막창집을 운영하는 P식당 이모씨는 “이제 대구 사람 혀도 ‘보리문둥이’ 소리 들을 때보다 엄청나게 까탈스럽다”고 했다.
먹자골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구경북연구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 김기춘(64·전직 교사)씨에게 앞서의 세 가지 질문을 던졌더니 흥분된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이곳 수성들이 일제 때 대구 시인 이상화가 읊은 바로 그 ‘빼앗긴 들’ 아닙니까. 참말로 요즘 같아선 나라 빼앗긴 것보다 더 살기가 어렵네. 박정희 때는 진짜 먹고살 만했심더. 자신감도 있었고. 전두환 노태우는 물가라도 잡았지예. 그때까진 대구가 서울 부산 빼고는 최고였다 아입니까. YS가 섬유공장 다 망하게 하더니 삼성자동차 부산으로 빼앗아가고 쌍용 구지공단 엿 먹이더니, DJ는 달성 위천 국가공단 지정 말아먹고 저거 고향에 국도만 뻥뻥 뚫어줬잖는교. 삼성상용차는 부로(일부러) 그랬는지 저절로 그랬는지 부도내고 망해뿌리고….
노무현은 고마 말도 마입시다. 비싼 점심 먹은 거 소화 안 되니깐. 자기 친한 사람들은 잘못해도 다 풀어주고, 만날 저지레 하고 싸움질만 하니 참…. 그래도 박근혜,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쪼매 안 좋아지겠습니꺼. 인물로는 박근혜가 아버지 닮아 진짜 참하고 착한데, 이명박이 그래도 먹고사는 문제는 한 수 위에 있겠지예? 운하 그거 되기만 하면 대구 사람들 절반은 먹고살낀데. 우옛든간에(어떻든지) 대구는 지금 더 떨어질 데도 없습니더.”
GRDP가 뭐길래 대구에 머물며 취재를 다니면서 25명의 택시기사를 만났다. 시장 상인, 음식점 주인, 증권사 직원, 장애인, 대학생, 치과의사, 지방지 기자, 노숙자, 중소기업 사장, 각계각층의 사람 50여 명과 짧은 인터뷰를 하거나 술자리를 함께했다. 그 결과 대구지역 장·노년층의 많은 수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구·경북 출신 정권이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30년 동안 대구지역에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근거 있는 대답을 하는 이는 드물다. 더불어 이들은 대구·경북이 정권을 놓친 이후부터 자신들이 서열 3위의 도시에서 ‘꼴찌의 도시’가 됐다면서 그 책임을 지난 15년간 정권을 잡은 정치권과 중앙정부, 지방 행정부로 돌렸다. 아직도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대구의 특성상 장·노년층 민심은 대구지역 전체 민심을 지배한다.
우연인지 ‘꼴찌 도시’의 근거가 되고 있는 1인당 지역내총생산, 즉 GRDP가 전국 최하위로 급전직하한 시점도 부산·경남 출신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1993년부터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난한 도시와 부유한 도시, 시민의 소득 정도를 측정하는 잣대로 이 통계가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GRDP는 해당 지역 내에서 생산된 최종생산물의 합계를 가리키는 지표다. 따라서 지역 내 대규모 생산시설이나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많고 적은 것을 알아볼 때는 정확한 지표 기능을 하지만, 시민의 소득이나 삶의 질을 평가할 때는 무의미한 통계치다.
GRDP는 대기업이 밀집한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 인근 지역과 국가 공단이 있는 곳이 절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대구의 GRDP는 16개 광역시도 중 10위를 유지했고, 대전광역시와 광주광역시보다 높았다(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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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1인당 GRDP는 이를 다시 지역 인구수로 나눈 값이다. 대구처럼 인근 위성도시의 주거지 기능을 하는 소비형 대도시의 경우 주소지와 번 돈의 소비처는 대구지만, 정작 생산을 하는 지역, 즉 돈을 버는 곳은 주로 구미 김천 경산 포항 등 인근 도시들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구에서 잠을 자고,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여가를 보내니 사실상 대구 사람이다.
그런데도 지역 언론, 중앙 언론 가릴 것 없이 대구시민의 소득수준과 생산성이 낮다는 증거로 이 통계를 남발한다. 한 월간지는 1인당 지역내총생산인 GRDP를 ‘지역 국민소득’이라고 오기(誤記)한 후 이를 근거로 대구를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로 결론 내렸다.
대구시 출연기관인 대구경북연구원 홍철 원장을 만났다. 대구 출신인 홍 원장은 국토연구원장, 인천대 총장을 거쳐 2004년 대구경북연구원장으로 왔다. 5·6공화국 시절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내며 신도시 건설에 참여한 바 있다. 최근 ‘진짜 대구를 말해 줘’라는 책을 낸 인물이다.
대구는 ‘꼴찌 도시’가 아니다 “유신정권과 5·6공화국 정권의 혜택을 본 것은 대구지역 전체가 아니라 특정 업체를 소유한 특정인이죠. 특히 그 시절, 타 산업 진입을 가로막았던 섬유업계 쪽에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1인당 GRDP는 지역민의 소득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허구적 통계입니다. 당장 대구가 소비, 즉 지출로는 전국 3~4위의 도시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지역민들이 모두 십수년 동안 빚을 내서 소비했다는 건데,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지역소득’이라는 통계는 아직 없어요. 그래서 정확하진 않지만 소비 지수를 소득 정도로 추측할 따름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대구는 꼴찌가 아닙니다. 4~5위권 도시죠. 그런데 민선 시장 초기에 국가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따내려는 마음에 이치에 맞지도 않은 통계를 쓰다 보니 이게 걷잡을 수 없이 와전된 겁니다. 대구민의 패배감과 위기위식을 확대 재생산하는 계기가 됐죠.”
김영삼 정권 때 열망했던 삼성자동차와 쌍용자동차 공장의 대구 유치가 물거품이 되고 그때부터 시작한 위천공단의 국가공단 지정이 김대중 정권 시절 무산되자 대구 시민은 정권에 대한 커다란 실망감에 젖는다. 이는 ‘경제적 꼴찌 도시’라는 허구적 통계와 맞물리며 정권에 대한 적대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대구민의 이런 실망감은 ‘날조된 허위의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 위천공단은 정권의 방해 때문에 무산된 것이 아니라 부산·경남의 식수원 오염 문제 때문에 물거품이 됐고, 쌍용자동차 구지공단 유치에 실패한 것은 당시 쌍용차의 역부족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다만 삼성자동차의 부산 유치는 정치적 결정의 냄새가 다분히 풍긴다. 당시 삼성그룹은 대구·경북의 거센 분노 앞에 삼성자동차 대신 삼성상용차를 대구 성서공단에 입주시켰지만 이마저도 몇 해 못가 부도가 났다. 정치적 요구를 한 것은 부산이나 대구나 다를 바가 없지만, 대구에 온 삼성은 ‘허깨비’였다.
대신 삼성그룹은 대구시가 삼성자동차 유치시 팔려고 준비했던 수만평의 공단부지를 용도 변경해 1700가구의 삼성한국형 아파트 단지를 지었다. 당연히 특혜 의혹이 일었지만 “삼성이 원했다”는 한마디에 여론은 수그러졌다. 그렇게 해서 1990년대 대구의 대기업 유치 꿈은 완전히 깨졌고 대구에는 ‘절망’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1981년 대구가 직할시가 되면서 경북과 분리된 후 현재까지 대구에는 국내 100대 기업에 드는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으며, 전체 기업의 99.7%가 중소기업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구시민들은 어떻게 전국 3~4위의 소비 도시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대구와 1시간 거리, 즉 출퇴근 거리 안에는 세계 제1의 국가공단인 구미공단(30분)이 있고, 김천에도 국가공단(40분)이 있으며 경산(30분)에는 지방공단이 있다. 세계적 기업인 포스코가 자리잡은 포항으로는 통근형 열차가 운행된다. 최근에는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뚫려 40분이면 포항에 도착할 수 있다. 울산도 1시간 거리에 있다.
대구 중심과 고속도로를 잇는 신천대로에 가면 대구 사람들의 주 출근지가 어딘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아침 7시30분이 넘으면 신천대로는 구미, 포항, 김천을 향해 빠져나가는 차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반대로 퇴근 시간에는 반대편 차선에서 체증이 빚어진다. 서울과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 이의근 전 경북지사는 지사 시절 “경북에서 생산된 돈이 전부 대구로 흘러들어간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집값이 대구에서 제일 비싼 대구의 8학군 수성구에는 구미공단 대기업의 부장급 이상이 살고, 구미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집값이 싼 북구 칠곡지역에는 일반 직원이 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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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꼭 정권 바꿔야지”
“대구는 세계의 다른 대도시와 같이 주변 공단도시의 주거형, 소비형 도심 기능을 하고 있어요. 꼭 대구에서만 생산행위가 일어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대구·경북 경제통합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령 이젠 구미에서 벌어 대구에서 쓰는 게 경북에도 해도(害道)행위가 되지 않습니다. 공단지역에 소비도시를 다시 건설하는 것은 이중투자죠. 대구가 살 만한 도시니까 대구로 모이는 겁니다.”(대구경북연구원 홍철 원장)
이런 측면에서 대구시민들의 패배감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정서는 IMF 관리체제 이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기업과 외자 유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비수도권의 다른 도시와 사정이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대구시민이 유달리 현재 상황에 대해 자학하고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1960~80년대에 정권의 중심이 대구였다는 ‘허구적 의식’과 대구가 인재 배출 면에서 큰 역할을 한 지역이라는 자긍심 때문이다.
대구 사람은 무슨 일 하나에 매달리면 무서우리만큼 집착하지만, 한번 기대가 무너지면 “치아뿌라(그만두라)”고 돌아서는 기질이 있다. 대구시민이 이번 대선에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이런 패배감을 정치적으로 회복하려는 의지에 다름아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지역구이자 이명박 전 시장이 운하 중간 선착장을 만들겠다고 한 대구시 달성군 화원유원지 인근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반드시 정권 바꿔야지예. 박근혜는 딸린 식구들이 없어 청렴할 것 같지 않습니꺼. 이명박은 기업인 출신이라 좀 냄새가 나고. 그런데 막상 찍으라고 하면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심더. 내가 경선에 투표인단으로 나갈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박근혜가 조금 나은 것 같구만.”
대구에서 만난 택시 기사 25명 중 여당 쪽 대선후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겠다는 사람은 2명뿐이었다. 다들 한나라당 빅2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한나라당이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누가 좋아서 한나라당 찍나. 노무현 싫어서 그런 거지”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이렇듯 대구의 정서는 친(親)한나라당 정서라기보다는 반(反)노무현이었다. 그들에겐 ‘노무현=범(汎)여권 또는 범 개혁세력’이다.
대구의 민심은 사실 한나라당 일색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다. 지난해 대구시장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이재용 국민건강관리공단 이사장은 1998년 무소속 시민후보로 출마해 낙선하긴 했지만 40%에 가까운 득표율을 얻었다. 친한나라당 성향이 그만큼 옅어진 것이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간판을 달고 다시 출마한 지난해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20.5%에 그쳤다. 한나라당 열성 지지자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지역적 패배감과 중앙정권에 대한 불만이 ‘미워도 한나라당밖에 없다’는 심리를 광범위하게 확산시켰다. 이는 각종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달성군의 최중심지 화원읍에 도착해 부동산 사무실 몇 군데를 돌아봤다. 부동산업자 김규광(66)씨는 “높은 분이 지역구 의원 되는 게 지역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따졌다.
“운하, 그거 되겠소?” “달성군에서는 예전부터 박준규(전 국회의장), 김성곤(전 쌍용그룹 회장, 작고), 김석원(쌍용그룹 회장) 같은 이가 국회의원이 됐는데 이 지역에 직접적인 연고도 없고, 너무 높은 양반들이라 지역에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박근혜도 마찬가지지. 이명박도 지난해 운하 만들겠다고 한번 왔는데, 그건 그때뿐이고 대통령이 돼봐야 알지. 그때 반짝 집값 들먹이더니 이젠 조용해. 워낙 많이 속아서 이젠 못 믿겠어.”
‘이명박 운하’에 대한 반응은 ‘과연 되겠나, 된다면 밀어준다’로 압축된다. 주유소 사장 김모씨는 지도까지 펼쳐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사실 화원유원지가 원래 조선시대 나루터였고, 그 뒤에도 물류단지를 할 부지가 마련돼 있으니 선착장이나 물류 터미널을 하면 딱인데, 그것도 진짜 만들어져야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토론하는 거 들어보니 영 시원찮던데. 기자 양반, 그거 되겠소? 된다면야 우린 무조건 이명박이지. 박근혜가 좋으면 뭐하나, 당장 내 집값 오르고, 먹고사는 게 먼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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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빅2 중 누구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이라고 소개한 한나라당 대구시당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이 함께 대구에 오면 박 전 대표 쪽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하지만 실제로 누구를 찍겠느냐고 물으면 이 전 시장 쪽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많다. 대구 정서는 박 전 대표를 ‘인기인’으로 좋아하지, 아직은 대통령감으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경선에 참여할 대의원들은 공천권이 걸려 있어 지역구 의원에 대한 충성도가 100%이고 일반 당원과 국민은 여론의 향배를 따라갈 것”이라고 전한다.
대구지역의 국회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를 포함해 모두 12명. 이 중 6명은 박근혜 전 대표, 4명은 이명박 전 시장 지지를 밝혔다. 강재섭(대구 서구) 한나라당 대표와 이한구 의원(대구 수성갑)만 중립을 표방한 상태다. 대구지역 경선에 참여할 9400여 명의 선거인단 중 대의원 2300명은 지역구별 당원협의회에서 선정하기 때문에 의원의 뜻이 100% 반영된다. 당심(黨心)은 박근혜, 여론조사는 이명박이 조금씩 앞서 있는 상황에서 강재섭 대표와 이한구 의원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셈이다.
박 대표 대구캠프 대변인인 이경호 대구 시의원은 “이명박 캠프에는 지금 지방선거 공천 탈락자들만 모여든다. 박 전 대표는 누구에게 매달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 캠프는 지금까지 총력을 다해왔지만 우리가 6대 4로 앞서고 있다. 박 전 대표가 마음먹고 막판 스퍼트를 하면 7대 3까지도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에 반해 이명박 전 시장의 대구캠프인 선진한국 국민포럼 김기택 회장(전 영남대 총장)은 “현재 여론조사에선 이 전 시장이 10% 정도 앞서 있지만 운하의 효용성이 제대로 알려지고 운하가 대구 경제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그리고 이 전 시장의 지도자적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면 박 전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는 6대 4로 벌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수입차 타는 시장 상인들
다음으로는 대구지역 ‘서민 경기’의 바로미터라고 알려진 서문시장을 찾았다. 2005년 대형 화재로 소실된 2지구도 대구시와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곧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시장 상인들에게 “오늘 많이 팔았어요? 경기가 어때요?”라고 물었다.
“아직 마수도 못 했구마. 정말 미치겠네.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 거지 되는구마. 기자 아저씨, 쓸데없이 장사 방해하지 말고 가소.”
오후 5시가 넘었는데 물건 하나 못 팔았다니…. 10개 점포 중 3곳에서 같은 답이 돌아왔다. 서민 경기가 정말 파탄 지경에 이르렀나 하는 생각에 서문시장 상인연합회를 찾았다. “아직도 대구 경기가 많이 힘든 모양입니다. 이 시간에 마수도 못한 집이 여러 군데네요”라고 했더니 상인연합회 박병일 사무국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요즘 서문시장 상인들이 전라도 사람 닮아서 엄살이 좀 심합니다. 누가 마수도 못 했다고 그래요? 조금 있으면 상가 문 닫으니까 그 사람들 어떤 차 몰고 나가는 지 보세요. 대구에서 제일 좋은 차 타는 사람들입니다. 서문시장 경기는 최근 들어 조금씩 살아나고 있습니다. 잘되는 점포는 늘 잘돼요. 점포 값과 점포세가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안 해요. 장사가 된다는 이야깁니다. 요즘 시에서 재래시장 상품권이 나왔는데 그것도 회수율이 높아요.”
아까 ‘죽는 소리’를 하던 상인들이 어떤 차를 타고 퇴근하는지 지켜보기로 하고 시장 주차장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박 사무국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자에게 짜증을 내던 상인들이 하나같이 대형 수입 외제차를 몰고 퇴근했다. 대구 사람 기질도 변해가고 있었다. 하나를 하면 열을 했다고 과장하는 게 경상도 사람 기질인데, 이젠 자기들이 비아냥대던 서울 사람처럼 ‘깍쟁이’가 다 돼 있었다.
외환위기 직후 대구는 지역을 상징하던 기업이 대부분 몰락했다. 동국무역과 갑을로 대표되던 섬유 대기업과 청구, 우방, 보성과 같은 주택건설 업체들도 부도를 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대구에선 섬유와 주택건설 대신 자동차·기계부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지역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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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프로젝트니 뭐니 섬유산업 부흥시킨다고 그간 수천억을 쏟아부었는데 정작 섬유산업은 모두 망했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며 묵묵히 자기 일만 하던 자동차 부품이 대구를 먹여 살리는 것 보십시오. 그중에는 1조원대 매출을 내는 회사도 있습니다. 이젠 정권에 의존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우리끼리 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습니다.”
전 시의원이자 명성산업 대표인 윤병환씨는 대구의 ‘정권 의존형’ 발상을 이렇게 공박했다.
삼성상용차가 떠나간 자리에는 이제 새로운 기업들이 들어서고 있고, 구지공단이 들어설 예정이던 달성군에는 달성 2차단지가 들어서며, 최첨단 과학기술 연구단지인 테크노폴리스가 조성될 예정이다. 1조원이 넘는 해외 투자도 잇따르고 있다. 지금껏 중앙정부라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던 대구는 해외라는 신품종 우량 감나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번엔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나무에 올라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정치권력에 기대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각이 시민과 지방정부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수달의 도시, 대구 대구시민들은 대구시가 얼마나 살기 좋은 도시인지를 모른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개발 모태가 된 신천 주변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심지어 신천과 금호강의 경계지역에는 수달도 살고 있다. 서울과 전국 5대 광역시 대도시 중 수달이 대도심 안에 서식하고 있는 도시는 대구뿐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이 100ppm까지 올라가 ‘똥물’이라는 오명을 얻었던 낙동강과 금호강이 수달이 살 만큼 깨끗해진 것이다. 현재 BOD는 3ppm 정도.
대구의 주거환경 개선에는 막강한 견제력을 가진 대구지역 시민단체들의 비판정신이 큰 몫을 했다. 지금도 시민단체들은 대구를 어떻게 친환경적 도시로 만들까 골몰하고 있다. 신천을 따라 올라가던 중 파리의 센강 가꾸기 사업(에스파스)에서 힌트를 얻어 조성하고 있는 신천 생태공원 사업 현장에 다다랐다. 수달이 나온다는 신천과 금호강 합류지점의 바로 옆 둔치가 공사현장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김경민 YMCA 중부관장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사업에 시 예산은 하나도 없어요. 모두 노동부 일자리 창출 예산입니다. 대구수목원을 만든 이정훈씨와 생태 전문가들이 설계와 시공에 참여하고, 일꾼 예산은 모두 실업자 예산을 쓰고 있지요. 실업자에게 일자리도 만들어주면서 이곳을 천연의 생태공원으로 조성할 것입니다. 20억원의 예산을 받았으니 신천 대부분에 생태공원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운동을 하던 심재복(56)씨는 “서울에서 살다 내려왔는데, 서울에 비하면 대구의 주거환경은 천국이라 할 수 있다. 겉만 요란한 청계천에 비하면 신천은 도시의 허파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 수달을 직접 본 적도 있는데 둔치에 생태공원까지 조성된다니 인근 아파트 가격도 뛰고 있다”고 전했다.
대구 도심 내 모든 관공서의 담장을 허문 데도 시민단체의 힘이 컸다. 대구 YMCA가 주축이 돼 대구 삼덕동 주택가에서 비롯된 ‘담장 허물기 운동’을 대구시가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면서 대구 도심의 많은 단독주택과 관공서 담장이 사라졌다. 담장이 있던 자리엔 나무가 심어졌고, 정원과 쌈지공원이 조성됐다. 대구의 차량 도심통과 속도는 전국 도시 중 최고 수준이다. 아무리 막히는 출퇴근 시간에도 신호가 두 번 이상 바뀌는 경험을 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함께 취재를 온 서울 토박이 사진기자의 입에서도 “천국이 따로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대구 8학군으로 일컫는 수성구의 대입수능시험 성적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 가운데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구의 수험생 비중은 전체의 5.6%지만 수능 1등급의 비중은 7.1%, 3등급 이상은 6.7%를 차지한다. 서울대 합격자 점유율은 7.16%. 2006~07년 서울을 제외한 지방고교 중 서울대 최고 진학률을 기록한 학교도 대구에 있다. 현재 삼성전자 임원 중 경북대 출신이 가장 많은 것도 대구가 교육에 있어서는 전국 어느 곳에도 밀리지 않는 탄탄한 인프라를 갖췄다는 근거로 꼽힌다.
문화적으로도 대구는 변방의 이미지를 벗고 서울 부럽지 않은 여건을 갖춰가고 있다. 대형 뮤지컬과 오폐라의 연평균 공연일수는 서울 수준에 육박하고 있으며, 유료관객의 비율은 서울에는 못 미쳐도 3위인 인천과 대전의 2배에 달한다. 대구시 김병규 공보관은 “관객의 40%는 외지인이며, 앞으로 대구가 ‘뮤지컬과 오페라의 도시’라는 말을 들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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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자랑스러워요” 대구시민은 대구를 살기 어려운 도시라고 자학하지만 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대구지역 일간지인 ‘영남일보’가 타지에서 파견 온 53개 기관 근무자 241명을 대상으로 대구 정주성(定住性) 분석을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구생활이 ‘매우 만족스럽다’거나 ‘대체로 만족’한다’고 한 응답자가 전체의 62.7%에 달했고, ‘근무기한이 끝나도 대구에 계속 거주하겠다’는 응답자도 39.0%에 달했다.
정부의 ‘살기 좋은 도시’ 평가에서 가장 우선적인 고려 대상은 녹지공간 확보율이다. 대구는 1인당 도시공원 면적으로는 울산과 대전에 이어 3위이지만, 숫자로는 서울시 다음으로 많고(633개소), 개발제한구역인 그린벨트 면적까지 합하면 단연 전국 1위다. 대구는 그동안 시와 시민단체가 갈등을 빚으면서도 웬만한 공공시설이 도심에서 이전해 나가면 그 자리를 모두 공원화했다. 재정자립도나 예산 규모로 볼 때 대구는 사실 주거환경 개선과 친환경도시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대구시의 이런 행보를 두고 ‘미래를 위한 용감한 투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역대 대구시장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현 김범일 대구시장은 “시민이 살기 좋아야 기업도 오고 투자도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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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고의 중심지 중구 동인동에 있는 국채보상기념공원도 그런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대구시는 1999년 옛 대구여고와 대구지방경찰청이 빠져나간 자리에 고층 빌딩을 올리는 대신 공원을 조성했다. 대구시민은 연말 제야의 종소리(달구벌 대종)를 이곳에서 듣고, 슬픈 일, 기쁜 일이 있어도 이곳으로 모인다. 담장 없이 도로와 연결된 이 공원에는 1만3000평이 넘는 공간에 1만2300그루의 수목과 3만 본의 꽃이 심어져 있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마다 지역출신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공원 전면 공연장 겸 광장에선 젊은이들이 비보이 춤을 추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다. 공원 벤치에는 연인들이 과감한 애정 표현을 하고 있다. 여성이 담배를 물면 재떨이를 치워버리던 고리타분한 대구의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 3월27일 국채보상기념공원이 그 이름값을 했어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곳 대형 전광판을 통해 대구가 세계육상대회 개최지로 확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린 정말 대구에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어요. 대구에 살면서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 대구가 이젠 뭘 해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너무 좋습니다.”(한희경·22, 대학생)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행사로 일컫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는 대구 사람들에게 모처럼 든든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사건’인 듯했다. 사사건건 대구시와 부딪치는 시민단체들도 이 대목에는 전혀 토를 달지 않는다. 대구경실련 조창현 사무처장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그 경제적 효과나 실질적 효과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대구시민의 패배감을 씻어주는 심리적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중앙정부의 도움 없이 대구시민의 힘으로 유치했다는 데서 큰 힘을 얻는 것 같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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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독수리
대구의 보수성과 폐쇄성도 많이 무뎌졌다.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대구시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미군기지와 공군기지 이전에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사례다. 대구시는 20여 년 전부터 계속돼온 주민들의 미군기지로 피해를 본다는 민원과 공군기지를 이전해달라는 요청을 ‘안보적 관점’에서 모른 척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에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대구에선 이 정도만 해도 큰 발전이다. 남구에 있는 캠프워커, 캠프조지, 캠프헨리 세 기지의 면적만 30만평, 남구 면적의 6%를 미군기지가 차지하는 형편이다.
과연 대구라는 도시의 국제적 경쟁력은 어느 만큼일까. 대구를 마케팅하는 대구전시컨벤션센터 엑스코를 찾아갔다. 북구 산격동에 자리잡은 엑스코는 유리로 된 건물이 빌딩이라기보다는 조각품 같은 느낌을 준다. 엑스코는 최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 여파 때문인지 2010년 소방관올림픽, 2013년 세계에너지총회 등 국제적 행사들을 줄줄이 유치하고 있다. 대구시는 엑스코에서 수성못까지 첨단 자기부상열차를 유치할 계획이다. 코엑스 부사장 출신인 엑스코 백창곤 사장은 “대구는 국제적으로 마케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도시”라고 했다.
“7개 고속도로가 대구를 중심으로 연결돼 있고 서울에서 대구까지 1시간40분 걸립니다. 앞으로는 1시간10분대로 좁혀질 겁니다. 도대체 이만큼 경쟁력 있는 도시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1시간 거리에 세계 최고의 국가공단과 기업이 포진해 있는 도시는 찾아보기 어렵죠. 무엇보다 깨끗하고 잘 정리된 도시환경이 대구의 막강한 경쟁력입니다. 일단 사람이 와야 기업도 투자를 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대구가 싱가포르보다 더 멋지다고 해요.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라줘서 그렇지.”
대구경북연구원 홍철 원장은 대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누가 대구를 절망의 도시라고 합니까. 대구는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연어이자 잠에서 깬 독수리입니다. 이제 자신감을 얻었으니 땅을 박차고 날기만 하면 됩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