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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방장 원담 대종사 원적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진성 대종사가 오늘(18일) 오후9시 주석 중이던 수덕사 염화실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3세, 법랍 76세.
진성 대종사는 원적에 들기 직전 문도들에게 "그 일은 언구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 (주먹을 들어보이며) 이것이로다"라고 마지막 가르침을 전했다.
김선두 허정철 기자
<사진> 18일 오후9시 원적에 든 수덕사 방장 원담 대종사
다음은 진성 대종사의 임종게다.
來無一物來
去無一物去
去來本無事
靑山草自靑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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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은 원담대종사의 원적 소식이 전해지면서 애도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조계종 종정 법전예하는 지난 19일 “인연 따라 모습을 나투고 세상을 종횡무진하더니, 오늘은 눈 앞에서 묘진(妙眞)을 나투어 두출두몰(頭出頭沒)하고 은현자재(隱顯自在)함을 보입니다”며 “입적(入寂)하시고는 형상없는 한 물건이 있어 허공을 쪼개고 봄바람을 일으켜 온 누리에 꽃을 피게 합니다”고 법어를 발표했다.
종정예하는 또 “여러분! 보고 듣습니까? 철마(鐵馬)가 허공을 활보하고, 눈 먼 거북이 바다 밑에서 차를 마십니다”며 “身心都放下(몸과 마음을 놓아버리니)/隨處任謄運(곳곳마다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데)/去來一主人(가고 오는 한 주인은)/畢竟在何處(필경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게송을 읊었다.
또 이명박 대통령, 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장관이 추모사를 발표하는 등 원담대종사의 원적을 애도하는 정계, 사회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19일 총무부장 원학스님 등 종단 주요 소임자 스님들과 함께 덕숭총림 수덕사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조문도 이어졌다. 지난 19일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과 총무부장 원학스님 등 종단 주요소임자 스님들이 빈소를 찾았으며, 용주사 주지 정호스님과 선덕 정찬스님을 시작으로 전국 선원 수좌스님들을 비롯해 스님을 기리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와 홍문표 국회의원 등 정치, 사회계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안직수 기자ㆍ이시영 충남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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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열반한 덕숭총림 방장 원담 대종사의 분향소인 예산 수덕사에 이명박 대통령이 20일 오후 조문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에게 “원담 큰스님의 상좌인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며 입적소식을 듣고 애도의 뜻을 전하기 위해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수덕사를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에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은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원담 큰스님을 위해 수덕사를 찾아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사진> 원담 대종사 조문을 위해 수덕사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주지 옹산스님의 안내로 법당으로 향하고 있다.
이날 오후 3시 수덕사에 도착한 이명박 대통령은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의 안내로 법당 참배 후 분양소가 마련된 황하정루에 들러 헌화와 헌향을 한 후 합장 반배로 조문을 했다. 이후 문도대표인 설정스님 등 상좌 스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현직 대통령이 입적한 큰스님의 분향소를 찾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수덕사=이시영 충남지사장
사진=김형주 기자
* 다음 이명박 대통령의 원담 대종사 조문메시지 <전문>
“큰스님은 사부대중의 스승이셨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큰 어른이신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의 입적을 온 국민과 함께 마음 깊이 애도합니다.
제자인 전 총무원장 법장스님으로부터 큰스님의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일화(逸話)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친견(親見)하여 난국을 헤쳐 갈 큰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열반하셨다니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큰스님께서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일여(禪農一如)의 정신을 진작하시고, 직접 논밭을 일구며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수많은 귀한 법문들을 남기어 후학과 불자들에게 밝은 깨달음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대종사께서는 사부대중의 큰 스승이셨고, 중생들의 아픔과 애환을 보듬어 안아 주신 자비의 보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큰스님의 높은 뜻을 가슴에 담아 선진화의 길로 나설 것입니다. 갈라져 있는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고,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신 큰스님의 크고 높은 공덕을 기리며, 원담 대종사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불기 2552년 3월22일
대통령 이 명 박 焚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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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원담스님 관련 본지 기사]
“해제일은 새 결제 하는 날”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2007년 2월23일자/ 무자년 동안거 해제법어]
해제가 됐다고 어떻게 방심(放心)을 할 수가 있겠느냐. 해제라고 하는 것은 생사영단(生死永斷)해야만 해제인데, 생사영단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느냐 이 말이야.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할 것 같으면 해제한 것이 아니야. 해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생사영단해서 성불(成佛)할 경지에 올라가야 해제지.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제냐 말이야.
해제했다고 모두가 걸망 짊어지고 제 맘대로 방심을 한다고 하면 그건 해제가 아니야.
덕숭산 정진 대중들은 해제를 했다고 조금이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해제하고서도 내가 참학(參學)하는 일을 마치지 못했다 할 것 같으면 여기에서 다시 발심을 해야 하고, 다시 제 결심을 해 가지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지.
해제가 바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날이다 이 말이야. 해제한다고 마음 놓지 말고 여기서 다시 마음을 동여매 가지고 다시 발심해서 새 결제를 해야 돼.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덕숭산의 기반처럼, 성불(成佛)의 기틀이 움직이지 않고 꾸준히 그대로 정진을 해야 된다 이 말이야, 내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조금이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桃花雨後零落下(도화우후령낙하)
染得一溪流水紅(염득일계류수홍)
복숭아꽃이 비 온 뒤에 떨어지는데
계곡 흐르는 물이 붉게 물들었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도화꽃이 언덕 위에 붉게 피었는데, 비가 와서 싸-악 떨어졌다 이 말이야. 도화꽃이 싸-악 떨어져서 개울이 가득 붉은 물결이 흘러가더라.
개울 가득하게 흐르는 물에 이 복사꽃이 빨갛게 물들어야만 해제더라 이 말이야!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무자년 동안거 해제일)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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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49년 봉축특집] 특별인터뷰 /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밝은 햇살, 맑은 바람이 부처님 오신 뜻입니다”
‘부처님은 오시지 않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지난 4월28일 찾아 간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은 이렇게 한 마디 이르곤 말문을 닫았다. 부처님오신날인데 부처님이 오시지 않았다니, 생뚱맞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 끝자락에서 만난 스님의 거처 염화실. 외딴 길을 따라가다 맞닥뜨린 외딴 화두다. 물론 스님은 ‘오시지 않았으니 가신 것도 아니다’라고 전제를 달았다. 낯설긴 해도 왠지 포근한 느낌이다. 염화실을 추근대던 산들바람이 어느새 천년림 우듬지를 뛰어다닌다.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도 분다.
스님의 불립문자는 계속됐다. 부처님 오신 뜻이 무어냐는 질문에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대뜸 이것이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아무리 좋은 대답도 한낱 구업을 짓는 일일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래도 천형(天刑)처럼 중생은 부처님을 애타게 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부처님의 길을 앞장서 걸어가는 스님의 법문에 귀 기울이는 것 아닌가. 줄기찬 설득에 겨우 몇 개의 ‘거짓말’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불쌍한 마음 반 가소로운 마음 반이었던지 스님은 금방 “부처님이 오신 것은 맞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내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부처님만 오셨는가. 일체 중생이 다같이 왔지. 중생이 없었으면 부처님도 없고 올 필요도 없었지. 부처님이 없었으면 어리석은 중생도 없고 세상은 그 모습 그대로 불국토지.” 부처님의 임재와 상관없이 이 땅은 충분히 아늑하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바로 부처님이란 사실을 아시오. 부처님을 먼 데서 찾지 마시오. 그리고 그 진실을 알았다 해서 모든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범이 사슴을 잡아먹지 않는 꿈나라같은 현실이 도래하겠는가. 꿈에서 깨어나시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시오. 그것이 부처님의 길이요 여러분의 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만이 존귀하니 내 마땅히 과거 현재 미래의 고통을 모두 편안하게 하리라).’ 이것은 부처님 혼자만의 선언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가슴 속에서 울리는 토로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의 귀중한 생명의 근원을 보이신 것이오. 우리는 참다운 생명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묘한 마음, 곧 불성(佛性)을 일컫는다. “불성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고 진리가 있는 곳에 선함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의 결정체인 불성을 밝힌 곳에 고통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불성은 가는 곳마다 드러나고 맑기가 거울 같으며 너그럽기가 허공과 같아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구름이 걷히면 저녁 산 모습이 뚜렷하고 천개의 강에 달이 비치니 천개의 달이로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삶이라는 결론이다. 하지만 태양보다 먹구름이 더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서로를 잡아먹고 자라는 반목과 살육이 피비를 내린다. 스님의 대안은 의외로 간명하다.
“죄다 자기 바깥에서 남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망상에서 비롯된 번뇌요. 그저 스스로의 본성을 누리고 나누며 살면 될 것을. 자꾸 다른 데에 눈을 돌려 괜한 근심을 만든단 말이야. 부처님도 남일 뿐인데….” 불성을 흐리는 주범은 ‘나’라는 생각이다. “내가 있으면 반드시 네가 생기고 본래 마음자리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경계 밖에 있는 모든 것에게서 고유의 가치를 박탈합니다. 그 자체로 존귀한 생명들이 한갓 내가 좋으니 빼앗아야 할 것, 내가 싫으니 짓밟아야 할 것으로 분류됩니다.”
연기적 사유가 불성이란 개념으로 낳았다.
“연기(緣起)는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 맺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대들보나 주춧돌을 빼면 집이 무너지는 이치와 같죠. 연기이므로 낱낱이 불성이요 전체가 불성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착각과 분별은 이 고리를 끊어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셈이다. 불성이 아니라 내가 벌이는 일은 끝내 파국으로 막을 내린다.
“악업뿐만 아니라 선업도 업일 뿐이오. 내가 선행을 한다는 생각에서 하는 선행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그것은 죄일 따름이오, 끝내 아집의 결과를 받게 되지요.”
연기로 이어져 있는 까닭에 나를 알면 모든 인간과 세계를 알 수 있다. 한편 현대사회는 극단적인 속도와 편리의 시대다. 그러나 아무도 속도를 내면에 빠르게 돌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못살게 굴까 하는 것에만 골몰한다. 그러니 아무리 빨라지고 편해져도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자신에게 남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나 자신은 이미 다른 누군가의 표적이다.
“당신은 스스로 자유자재한 부처님입니다. 바깥에 묶여있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야 합니다.” 불교의 참뜻은 ‘도달’이 아니라 ‘회귀’다. “자유를 꿈꾸는 자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유롭겠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진정 자유인이 됩니다.”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참선이다.” 자기 안의 불성을 발견하는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이어서다. “수행을 해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성불이란 부처님의 마음과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상태입니다. 앉아서나 서서나 걸어다닐 때나 누워서나 항상 화두를 놓지 마십시오.” 계율도 중요하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풀 한 포기 이상의 기적은 없다”고 말했다. “온 우주가 정성을 기울여야 풀 한 포기도 성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연기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생은 우주 전체를 부수는 지중한 업인 격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우주의 질서를 흔드는 일입니다.”
물론 스님은 그 어떤 말보다도 마음을 단박에 전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라’는 충고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처님이 깨닫기 전인 과거나 깨달은 현재나 늘 같은 모양이다. 세상은 원래부터 법열에 달아올라 있다. 최근 건강이 나빠진 스님은 시자 스님이 온몸을 주무르자 연방 ‘아야’하고 비명을 질렀다. 스님의 비명은 독백이 아니라 신호였다. 스스로 깨어있음을 알라는 온몸의 언어로 느껴졌다.
말씀을 마친 스님은 염화실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으며 해맑게 웃었다. 갓난아이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터뜨리는 웃음같다. 봄날의 햇살이 통통하게 물이 올랐다. 온 천지가 화사하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다가가 안기는 햇살. 눈부시게 내리쬐는 부처님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옷깃을 여미는 스님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 다 잘될 것이다.
수덕사=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원담스님은 /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법문에 가장 능한 이는 부루나존자였다. 원담스님은 부루나존자에 비길 만큼 법문의 내용이 다양하고 알차기로 유명하다. 시자인 법보스님은 “스님은 같은날 많게는 서너차례의 법회를 봉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마다 법문의 주제와 소재가 완전히 다르다”고 술회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다각적인 각도에서 조명하는 스님의 법문을 많은 불자들이 식상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그와 같은 법어를 모아 지난 2003년 11월 〈덕숭산법향(德崇山法香)〉을 출간했다. 이 법어집에는 1980년 하안거 결제법어부터 2003년 하안거 해제법어까지 20여년동안 스님이 설한 상당법어(上堂法語) 87편이 실려 있다. 낱낱의 법어마다 안거에 드는 납자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생생한 목소리로 열어주고 있다.
원담진성(圓潭眞性)스님은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0세인 1936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이어 1941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만공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후 수덕사를 현재의 덕숭총림으로 일궈냈으며 경허.만공선사의 선풍을 계승, 현대의 선농일여(禪農一如)의 가풍을 새롭게 진작한 선지식이다. 또한 이러한 선지로 쓴 붓글씨는 당대 최고의 선필로 명성이 자자하다. 장영섭 기자
[불교신문 2129호/ 5월13일자]
2005-05-11 오후 9:37:12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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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에 만난 우리스님 /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네 마음을 먼저 밝혀야지… 책은 필요없어”
[2003년 11월25일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산 수덕사. 근대 최고의 고승으로 일컷는 경허 만공스님의 법맥이 살아있는 덕숭문중의 가풍을 꼽으라면 조사선, 선농일치, 표리일체, 무소유의 가풍을 꼽는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참선도량이 위치한 수덕사는 격외적(格外的) 사고를 주고받는 조사선의 가풍이 살아있다. 또 밭일을 하고 대중운력을 하는데 주지스님을 비롯해 전 대중이 함께 동참하는 선농일치의 가풍이 전해지고 있으며, 헛된 아상을 갖추려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가풍이 있다.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이 주지소임을 맡았을 때, 논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격려하며 막걸리를 손수 나눠준 일화는 이런 가풍을 대변하고 있다.또한 30년간 본사주지를 역임했던 벽초스님을 비롯해 원담, 설정스님 등 모두가 주지소임을 마치고 나서 본인의 통장하나 없었을 정도로 무소유의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덕숭문중 스님들이 이런 가풍을 잇고 있는 정점에는 세수 78세의 나이에도 정정함을 유지하며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는 방장 원담스님이 있다. 법어집 봉정식을 하루 앞둔 지난 18일, 원담스님을 찾아 불자들에게 전할 법문을 청했다.
스님과의 대화는 그 자체가 법문이었다. 스님께서는 우문에 대해 짧은 현문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이번에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비롯한 상좌들께서 법어집을 발행했습니다. 소회를 말씀해 주십시오.
법어집 자체가 잘못이여! 법어집이 없다면 시비가 없을건데, 법어집으로 인해 삼라만상의 시비가 벌어지는 거여! 정작 내가 가르치고 싶은 말은 법어집에 한마디도 없다.
-불자와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인지요.
말해주면 뜻을 알아챌거야? (스님께서는 손가락을 치켜 세우시며) 이것을 그려(적어) 넣어라.
“네 마음을 표현해보라”
원담스님을 봉양하는 시자스님은 그 의미를 묻는 질문에 “스님께서는 가끔 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너의 마음을 표현해봐라’고 물어보십니다”라며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불자들이 공부하는데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네 마음을 먼저 밝혀야지 책은 필요없다.
-스님께서는 만공스님을 수년간 시봉하셨습니다. 생전의 만공스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삼라만상을 다 가르쳐줬지.
-그럼 스님께서는 후학들이 스님께 무엇을 얻고 배우기를 바라십니까.
질문하면서 기자가 사진을 찍자 스님은 대뜸 사진기를 가리키며 소리를 치신다.
지금 네가 가져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찾을 때마다 만공스님에 대해 여쭙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를 후비는 동작을 하시며) 귀가 가려워서 그랬을테지.
-스님, 수행자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앉아 있는게 수행자의 길이여!
-스님께서는 벌써 세납이 78세에 이르십니다. 그동안 가장 좋았던 생신이 언제셨습니까.
벌써 다 잊어버렸어.
-한국불교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꼭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야겠어! 그렇게 행(行)하는 것(의심을 갖는 것)이 바른 길이여!
“왜 그리 쉽게 갔대?”
-오늘 새벽에 전 총무원장을 지내신 정대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허망하네
-지난주에는 청화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다.
왜 그리 쉽게 갔대?
-스님, 혹시 비행기나 헬리콥터 타 보셨습니까.
참 재밌는 친구군. 비행기 탔다가 떨어지면 어쩌지. 누가 받아줄건가.
-스님은 언제 밭일에서 손을 놓으셨습니까. 몇 년전 쯤이신가요?
아직 몰라.
-스님, 대중이 화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제일 좋은 말이네. 제일 대답하기 어렵네. 어려워.
-끝으로 불자들을 위해 한 말씀 당부를 드립니다.
(큰소리로) 아악. 잘 가시게.
수덕사=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 원담스님은…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은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세속의 이름은 몽술(夢述)인데, 어머니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스님은 일곱 살 되던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1936년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후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아 경허.만공스님으로 이어지는 근대 불교의 뿌리를 계승했다.
한문과 경전에 두루 밝은 스님은 붓글씨에도 능하며, 직접 제작한 금강경 금니사경 병풍은 이런 스님의 견문을 대변하고 있다. 벽초스님에 이어 수덕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현재 수덕사를 덕숭총림의 면모로 가꾼 스님은 현재 덕숭충림 방장으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 사부대중 참여 속 법어집 ‘덕숭산 법향’ 봉정식 봉행
원담스님의 법어집 ‘덕숭산 법향’ 봉정식이 지난 19일 수덕사 대웅보전에서 봉행됐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비롯해 중앙종회 의장 지하스님, 포교원장 도영스님, 해인사 주지 세민스님 등 사부대중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봉정식은 주지 법정스님이 법어집을 부처님께 봉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간행사, 인사말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봉정식에서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스님의 가르침은 본래면목을 밝히려고 할 때 밝은 거울이 되어 주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 나설 때 나침반이 되어주며, 피안에 다다르고자 할 때는 자비로운 배가 되어준다”며 “스님의 생전에 스님의 가르침을 더 많은 종도들이 받들고 탁마에 힘쓰기 바라는 마음에 법어집을 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수덕사=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불교신문 1984호/ 11월25일자]
2003-11-21 오후 10:16:1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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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禪匠을 찾아서/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
[2003년 11월25일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산 수덕사. 근대 최고의 고승으로 일컷는 경허 만공스님의 법맥이 살아있는 덕숭문중의 가풍을 꼽으라면 조사선, 선농일치, 표리일체, 무소유의 가풍을 꼽는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참선도량이 위치한 수덕사는 격외적(格外的) 사고를 주고받는 조사선의 가풍이 살아있다. 또 밭일을 하고 대중운력을 하는데 주지스님을 비롯해 전 대중이 함께 동참하는 선농일치의 가풍이 전해지고 있으며, 헛된 아상을 갖추려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가풍이 있다.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이 주지소임을 맡았을 때, 논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격려하며 막걸리를 손수 나눠준 일화는 이런 가풍을 대변하고 있다.또한 30년간 본사주지를 역임했던 벽초스님을 비롯해 원담, 설정스님 등 모두가 주지소임을 마치고 나서 본인의 통장하나 없었을 정도로 무소유의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덕숭문중 스님들이 이런 가풍을 잇고 있는 정점에는 세수 78세의 나이에도 정정함을 유지하며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는 방장 원담스님이 있다. 법어집 봉정식을 하루 앞둔 지난 18일, 원담스님을 찾아 불자들에게 전할 법문을 청했다. 스님과의 대화는 그 자체가 법문이었다. 스님께서는 우문에 대해 짧은 현문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이번에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비롯한 상좌들께서 법어집을 발행했습니다. 소회를 말씀해 주십시오.
법어집 자체가 잘못이여! 법어집이 없다면 시비가 없을건데, 법어집으로 인해 삼라만상의 시비가 벌어지는 거여! 정작 내가 가르치고 싶은 말은 법어집에 한마디도 없다.
불자와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인지요.
말해주면 뜻을 알아챌거야? (스님께서는 손가락을 치켜 세우시며) 이것을 그려(적어) 넣어라. “네 마음을 표현해보라” 원담스님을 봉양하는 시자스님은 그 의미를 묻는 질문에 “스님께서는 가끔 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너의 마음을 표현해봐라’고 물어보십니다”라며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불자들이 공부하는데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네 마음을 먼저 밝혀야지 책은 필요없다.
-스님께서는 만공스님을 수년간 시봉하셨습니다. 생전의 만공스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삼라만상을 다 가르쳐줬지.
-그럼 스님께서는 후학들이 스님께 무엇을 얻고 배우기를 바라십니까.
질문하면서 기자가 사진을 찍자 스님은 대뜸 사진기를 가리키며 소리를 치신다. 지금 네가 가져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찾을 때마다 만공스님에 대해 여쭙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를 후비는 동작을 하시며) 귀가 가려워서 그랬을테지.
-스님, 수행자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앉아 있는게 수행자의 길이여! -스님께서는 벌써 세납이 78세에 이르십니다. 그동안 가장 좋았던 생신이 언제셨습니까. 벌써 다 잊어버렸어.
-한국불교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꼭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야겠어! 그렇게 행(行)하는 것(의심을 갖는 것)이 바른 길이여! “왜 그리 쉽게 갔대?”
-오늘 새벽에 전 총무원장을 지내신 정대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허망하네
-지난주에는 청화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다.
왜 그리 쉽게 갔대?
-스님, 혹시 비행기나 헬리콥터 타 보셨습니까.
참 재밌는 친구군. 비행기 탔다가 떨어지면 어쩌지. 누가 받아줄건가.
-스님은 언제 밭일에서 손을 놓으셨습니까.
몇 년전 쯤이신가요? 아직 몰라.
-스님, 대중이 화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제일 좋은 말이네. 제일 대답하기 어렵네. 어려워.
-끝으로 불자들을 위해 한 말씀 당부를 드립니다.
(큰소리로) 아악. 잘 가시게.
수덕사=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
원담스님은…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은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세속의 이름은 몽술(夢述)인데, 어머니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스님은 일곱 살 되던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1936년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후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아 경허.만공스님으로 이어지는 근대 불교의 뿌리를 계승했다. 한문과 경전에 두루 밝은 스님은 붓글씨에도 능하며, 직접 제작한 금강경 금니사경 병풍은 이런 스님의 견문을 대변하고 있다. 벽초스님에 이어 수덕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현재 수덕사를 덕숭총림의 면모로 가꾼 스님은 현재 덕숭충림 방장으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 사부대중 참여 속 법어집 ‘덕숭산 법향’ 봉정식 봉행
원담스님의 법어집 ‘덕숭산 법향’ 봉정식이 지난 19일 수덕사 대웅보전에서 봉행됐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비롯해 중앙종회 의장 지하스님, 포교원장 도영스님, 해인사 주지 세민스님 등 사부대중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봉정식은 주지 법정스님이 법어집을 부처님께 봉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간행사, 인사말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봉정식에서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스님의 가르침은 본래면목을 밝히려고 할 때 밝은 거울이 되어 주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 나설 때 나침반이 되어주며, 피안에 다다르고자 할 때는 자비로운 배가 되어준다”며 “스님의 생전에 스님의 가르침을 더 많은 종도들이 받들고 탁마에 힘쓰기 바라는 마음에 법어집을 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수덕사=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불교신문 1984호/ 11월25일자] 2003-11-21 오후 10:16:16 / 송고 ++++++++++++++++
“간화선의 핵심은 발심이야…”
[2003-01-18] “간화선이 제일 수승한 수행법이야. 발심(發心)을 해야 돼”
덕숭총림 방장 원담(圓潭)스님은 최근 일부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간화선 수행법에 대해 “발심을 얼마만큼 잘 했느냐가 그 사람의 수행정진을 좌우한다”면서 정진을 당부했다. 올해 일흔일곱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강건한 법체를 보존하며, 후학과 불자들에게 법향(法香)을 훈습(薰習)시키고 있는 원담스님을 친견했다. 지난 10일 새해를 맞아 덕숭총림 수덕사를 찾았다. “추운데 어떻게 왔어”라며 반갑게 맞이한 원담스님에게 이 시대 불교인의 자세와 수행에 대해 들었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수덕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아스팔트길에는 추위에 얼어붙었던 눈들이 햇볕을 받으며 조금씩 해동(解凍)하는 조짐을 보였지만, 응달에 남은 빙설(氷雪)이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스님 건강해 보이십니다. 비결이 있으십니까” “나는 건강 비결 없어. 밥 갖다 주면 밥 먹고, 옷 갖다 주면 옷 입고, 물 갖다 주면 물 먹고, 졸리면 자고, 그것 밖에 없어” 스님은 돋보기 없이 신문을 읽고, 포행도 할 만큼 건강하다.
- 간화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간화선의 핵심은 ‘발심(發心)’이지. 발심. 발심. 발심을 얼마만큼 했느냐가 그 사람의 수행정진을 좌우하는 거야”
- 간화선을 공부하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도 발심이지.”
원담스님의 답은 명료했다. 짧은 문답 속에 스님은 발심이라는 단어를 다섯 차례나 들 정도로 간화선 공부에 있어 발심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부에서 간화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질문을 드렸다.
화두가 생명…생명처럼 지켜야
- 간화선이 문제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소리 못 들어 봤어.”
- 간화선이 제일 수승한 공부입니까.
“음. 그렇지. 그리고 공부하기가 제일 쉽지.”
- 간화선을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 어려운것 같습니다.
“제대로 발심을 안해서 그렇지. 발심이 됐으면 제일 쉬운거야.”
원담스님은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생활 속에서 간화선 공부를 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다. ‘이뭐꼬’ 화두를 들고 항상 화두를 참구하면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면 좋은 점은 무엇인지”를 여쭈었다. 그러자 스님은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화두가 곧 생명이야. 생명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남. 생명을 지키는 겨. 자기의 생명이여. 화두가.”
- 생명처럼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화두를 잘 참구하지 못하는 것은 간화선이 어렵기 때문 아닙니까.
“아니, 발심이 철저하게 안돼서 그렇지.”
- 부처님도 저자거리로 나와 중생을 제도했는데, 수좌(首座)들도 사회로 나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생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언제 공부할 시간이 있간디.”
스님은 수행하는데 있어 먼저 ‘자기공부’가 철저해야 함을 강조했다. 스스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데 신경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이다. 이어 원담스님은 “어묵동정(語默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공부하는 순간”이라면서 “따로 가르칠 것도 없다”고 말했다.
- 철마다 결제를 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몸뚱이는 머리가 있구, 다리도 있구, 귀도 있구, 입두 있구, 콧구멍도 있어. 그런데 뭘로 걸어 댕겨. 사람이 몸뚱이를 끌구 댕기려면 뭐가 필요하겠어.”
질문을 받은 스님이 다시 기자에게 생각을 물었다. 우답(愚答)임을 각오하고 의견을 드러냈다. “일단 다리가 있어야 하고, 몸을 끌고 다니려면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렇다 이 말일세.” 경허(鏡虛) 만공(滿空) 스님의 선풍을 계승하고 덕숭총림만의 어른이 아니라 한국불교계의 ‘어른’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원담스님은 당신의 생애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스님은 평생 참선을 통해 용맹 정진했다.
경허·만공스님의 선풍이어
- 정진해오시면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습니까.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많지. 졸음이 와서 어렵고, 망상이 많이 나와서 어렵고, 태타(怠惰)하고 싶은 생각을 잊느냐고 어렵고... 그런 생각이지.”
-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 내셨는지요.
“가만 뒀어. 그러니 다 해결됐어.”
- 경전을 보는 것도 화두만큼 공부에 도움이 됩니까.
“아니지. 그건 망상이지.”
- 경전을 본 다음에 화두를 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경전보고 싶으면 (게으름 피지 말고 빠짐없이) 다 보고 (참선을)해야지.”
- 경전을 보면서 화두를 드는 것은 바른 공부인지요.
“그것도 옳은 방법이지”
의문이 들었다. 스님의 말씀이 경전을 보라는 것인지, 아닌지. 다시 원담스님께 질문을 드렸다.
- 방금 전에는 그릇된 방법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까는 아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옳은 방법이지.”
기자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시자 법보스님이 이해를 도왔다. “방장스님께서는 처음부터 경전을 보면 망상을 피운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많이 혼 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전을 보아도 뭐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수행자는 불자들의 정진을 경책하고, 바른 길로 인도(引導)하는 이 시대의 스승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불자들은 어떤 길로 가야할지, 그리고 통일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물었다.
자가(自家)통일이 돼야 남북통일
- 불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신지요.
“내가 이 말은 꼭하고 싶어. 뭐냐면 발심이여.” 부처님 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려면 무엇보다 발심이 중요하고 발심을 수행까지 연결하려면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게 원담스님의 뜻이다.
-민족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남북통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남북통일도 있고 ‘자가(自家)통일’도 있는데, 자가통일이 돼야 남북통일이 돼.” 모든 사람들이 자기 공부에 충실할 때 비로소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남북통일은 반드시 되니 너무 앞서지 말고, 스스로의 공부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올해 창간43주년을 맞아 주2회 발행에 들어간 불교신문에도 한 말씀 주십시오.
“불교신문이 할 일이 참으로 많아. 불교신문은 이 나라 국민의 태양이야. 어디에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태양이야.”
염화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더욱 따듯하게 느껴졌다. 눈도 제법 녹았다. 수행자의 삶은 안으로는 철저하게 엄격하면서도, 밖으로는 훈기(薰氣)를 주는 것이리라. 대웅전 처마에 달린 풍경이 겨울바람과 함께 소리를 낸다.
예산 수덕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원담스님이 말하는
나의 은사 벽초스님 / “그 놈을 데려와라”
“은사인 벽초(碧超·덕숭총림 2대 방장)스님은 평생 일만 하다가 몸을 마치셨지. 전국에서 우리스님 만큼 승속 간에 애써서 정진한 이가 없으리라 생각해. 참 철저했어. 뭘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했어. 존경할 만한 스님이였어. 그 스님을 보면 교훈이 따로 필요 없어.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다 교훈이었지.
언젠가는 한번 건넌방에 있는데 ‘이리와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 그래서 대답을 했지. ‘오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은사스님이 ‘내 말이 들리느냐’고 다시 말하시데. 또 대답을 했지. ‘들립니다.’ 그러자 우리스님이 뭐라고 하신지 알아. ‘그 놈을 데려와라’ 순간 어찌할 수 없었어. ‘그 놈’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데려 가려면 데려 갈 놈이 없어. 갖다 바칠래야 바칠 것이 없어.
벽초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함께 절 밭에 나가 운력을 하시는데, 점심공양 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오시지 않는 거야. 그래서 밭에 가보면 괭이 들고 그대로 서 계신거야. 정진삼매에 빠져 있더라고. 참 철저하게 수행하셨지.”
원담스님은…
만공스님께 전법게 받아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원담스님의 세속 이름은 김몽술(金夢述). 모친의 꿈속에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스님은 일곱 살 되던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받은 후 덕숭총림의 지금이 있게 가람을 수호하고 산중화합에 앞장섰다. 현재는 덕숭총림 3대 방장과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있다. 상좌로 설정(전 중앙종회 의장)스님과 법장(수덕사 주지)스님 등이 있다.
2003-01-18 오전 10:47:39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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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스님 /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自己 찾으면 삶이 바로 서”
[2002-02-15] ‘빽빽한 일상’과 ‘삼엄한 논리’에 갇힌 현대인들은 때때로 ‘일탈’을 꿈꾼다. 일탈은 그러나 곧 ‘새로운 구속’이 되고, 결국 ‘끈 없는 생각으로 자기를 얽어매는(無繩自縛)’ 어리석음에 현대인들은 빠지고 만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세련된 철학이 기승을 부릴수록, 현대인들의 정신상태는 오히려 답답해지고 좁아져만 간다는 것이다.
충남 예산 덕숭산 곳곳에 잔설(殘雪)이 남아있던 지난 4일. 현대인의 ‘답답해진’ 마음을 활짝 열어주고 있는 덕숭총림 방장 원담(圓潭)스님을, 수덕사 염화실에서 친견하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길’을 물었다.
-정신적·물질적인 각종 어려움들이 중생세계로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불자(일반인)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어려운 때일수록 숨쉬고 살아야 돼. … (웃음) …. 아껴 써야 해. 아껴 쓰라는 것이지, 쓰지 말라는 얘기는 아냐. 분에 맞도록 써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야. 승가는 더욱 그렇지. 시주물은 독약처럼 생각해야 돼….
-현대 사회는 ‘기술의 변화·발전’이 사람을 앞서는 ‘인간탈락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또 정신적으로 많은 방황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극복할 방안은 없는지요.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정신이지. 그런데 요사이 너무 많이 변했어…. 물질이면 다 된다는 풍조가 만연해졌어…. 그런데 그렇게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마는 만족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거든.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불교에 있는 참선밖에 없어.
-불교에서는 왜 선을 중히 여기는지요, 선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선은 나를 찾는 거야. 나를 찾으려면 나를 버리고, 잊어야 찾는 거여.
-1천2∼3백년 전에 만들어진 화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있지. 나의 근본정신을 깨닫는 바탕이 되니까 말야….
-삶이란 사실 끝없는 움직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람의 일상 속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할 길은 없습니까.
▲무념처(無念處)야!
-경허스님 이래 수덕사는 근·현대 한국선불교 중흥의 진원지였습니다. 그런데 ‘무애가풍(無碍家風)’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애가풍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워. 무애가풍 …, 말과 글자 그대로여.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지. 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간화선법 위주인 현재의 수행법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하하하….(스님은 이 질문에 웃음을 먼저 터트렸다) 망상이지. 번다한 풍습이야. 번다한 풍습을 방하착(放下着) 해야지.
-안거가 시작되면 1천6백여 명의 스님들이 결제에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옛날에 비해 참 수행인이 갈수록 적어진다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발심수행자(發心修行者)가 적어, 형식적이지. 법도 끊고, 일체 편리한 수용을 끊어야 해. 선방에 앉았다고 참선 수행자라고 생각하면 큰 일이지. 발심이 된 자라야 돼.
-스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꼭 참구해야 될 화두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자기(自己)를 찾아라. 자기를 밖에서 찾지 말고….
-불생불멸할 법신(法身)은 있습니까.
▲할(喝) …. 이것이 법신이지.(스님은 할을 하면서 주먹을 쥐어 내뻗었다.)
-불교는 1천6백년동안 우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쳐, 한국사상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불교 모습’ 가운데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많은 사람들은 내리고 있습니다. ‘불교의 꽃’을 다시 피우려면, 불교인들은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불교를 재현시키고, 한국사상의 주류로서도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힘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스님께서 생각하는 방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런 생각도 안했어. 아무런 할 말도 없어. 누구에게 일러 줄 말도 없고, 누구에게 보여 줄 행동도 없고 없어.
-오늘날 사회에서는 종교 갈등이 자주 생깁니다. 다른 종교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 자기 분상에써 나와. 아(我)에 집착해서 그런 현상이 생겨. 아(我)의 집착을 떨쳐야 돼. 아(我)에 집착하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생멸(生滅)이 생기는 등 모두가 분별이지. 그걸 떨쳐야 돼.
-현재의 젊은이들이 추구해야 될 가치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각자가 자기를 찾아야 돼. 자기를 찾음으로서 국가관이 살고, 인생관이 살며, 자타가 분명해 지는 것이야. 이것이 가치관이겠지.
-(한국)불교는 어디로 가야 됩니까.
▲불교가 나아갈 길은 각자가 자기 본성을 찾는 것이지. 본성, 그것은 나의 본성이요, 너의 본성이요. 우주의 본성이며, 삼라만상의 본성이여. 본성을 저버리고는 멸(滅)하는 길밖에 없어. 본성을 찾으면 각자의 삶이 바로 서고, 생명을 생명답게 찾을 수 있어.
-지난 10년간 전국 각 사찰에서는 불사(佛事)를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키우는 인재불사에 매진해야 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참다운 불사를 망각하고 있지. 너도 망각하고, 나도 망각하고, 전부 망각하고 있어. 이 도리를 알면 참 불사하겠지….
-불자(수행자)들을 위해 한 마디 해주시죠.
▲수행자들이여, 정신차릴지어다. 너를 내버리지 마라. 너를 내버림으로 부모를 내버리고, 자식을 내버리게 된다. 수행자들에게 할 부탁은 너를 내버리지 말라는 한마디 뿐이야.
충남 예산=글 趙炳活기자 bhcho@buddhism.or.kr
사진 金亨周기자 cooljoo@buddhism.or.kr
“평생 일 속에 살다간 農禪道人”
● 원담스님 은사 碧超스님
‘평생 일 속에 살다간 농선도인(農禪道人)’ 벽초스님은 열강들의 조선쟁탈전이 한창이던 1899년 8월20일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10살 되던 1908년 스님은 아버지와 함께 만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당시 청양으로 탁발나온 만공스님을 따라 출가했는데, 아버지의 법명은 연등순오(燃燈 順悟), 아들의 법명은 벽초경선이었다.
젊었을 때 맨주먹으로 늑대를 때려잡을 만큼 힘이 센 장사로 소문난 벽초스님은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의 가파란 산길에 돌을 직접 날라 계단을 쌓았다. 1940년 3월부터 1970년 1월까지 수덕사 주지로 재직한 스님은 그 사이 끝없는 노력으로 수덕사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특히 2백여 수행 납자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감내하며 만공스님의 지도 아래 정진하던 시절, 스님은 수행자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그늘에서 묵묵히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수덕사가 ‘경허 → 만공’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 선불교 중흥의 중심이 된 이면에는 ‘벽초스님의 땀’이 밑거름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님의 손’ 덕택에 수덕사 대중들은 마음놓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평생 남을 위해 살다간 도인이었지만 스님은 한번도 “무엇을 했다”고 내세우지 않았다. 법상(法床)에 오르지도 않았고, 1배 이상의 절을 사양하는 겸허한 자세로 일생을 살았다.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임 없이 소탈하게 살았던 벽초스님은 1986년 5월2일 시자(侍者)에게 달력을 가져오게 한 뒤, 2일부터 6일까지의 다섯 장을 달력에서 떼 내고는 “이제 갈란다”며 담담히 입적을 예고했다. 예언대로 스님은 6일 ‘생멸(生滅)의 옷’을 벗고 ‘적멸(寂滅)의 세계’로 들어갔다.
■ 수행이력
1926년 전북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217번지서 출생. 아명은 몽술(夢述).
1927년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신산리 249번지로 이주.
1932년 한학자 신동우선생 밑에서 한학과 서도(書道) 사사 받음.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득도.
1960년 화엄사 주지.
1970년 수덕사 주지 취임. 덕숭총림이 될 기초를 닦음.
1980년 〈경허법어〉 발간.
1983년 〈만공법어〉 발간. 덕숭총림 설립.
1986년 혜암·벽초스님 뒤이어 덕숭총림 3대 방장에 추대.
1986년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사 주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 수상. 현재 수덕사 염화실에 주석하며,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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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5 12:13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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