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드립니다 !
선린대학교 문예창작과정의 박영희 사진작가께서
2024년 118호 격월간 『에세이스트』 에
수필 「까치 모닝콜」이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셨습니다.
수필가로써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드리며,
건필하시고 아울러 문운이 함께 깃드시기를 바랍니다.
▶ 박영희
사진가. 방송통신대학 미디어영상학과.
선린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정.
2021년 포항문화재단 우수작가 초대개인전 외 사진전 다수.
he6936@hanmail.net
까치 모닝콜
박영희
희붐한 새벽하늘을 몰고 까치소리가 들려온다. 따로 맞혀놓지 않아도 어김없이 잠을 깨우는 모닝콜이다.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닝콜이 있을까 싶지만, 늦잠을 자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면 모닝콜은 이불속까지 파고든다. 실눈을 하고 창문을 열어 손을 휘저어본다. 흐느적거리는 내 손짓이 재미있다는 듯 더 크게 울어 댄다.
뒷산 풍광이 좋아 기꺼이 이사를 온지 25년째다. 봄이면 아카시 향기가 집안까지 스며든다. 부엌의 큰 창은 소나무 산책길을 마주 보고 있어 손으로는 설거지를 하고 마음은 피톤치드를 마구 뿜어내는 산책길을 걷는다. 베란다 앞 정원에는 아파트와 함께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 벗나무와 목련 우듬지가 15층 아파트를 따라 오르고 또 올라간다. 언젠가부터 노인정 지붕 위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느티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까치소리는 기다림이며 노스텔지어다. 탈해 신화에서 익히 알려져 있듯 까치소리를 듣고 배에 실려 온 궤를 얻게 되어 열어 보았더니 잘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훗날 탈해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까치 소리는 귀한 손님이 올 것을 알리는 것으로 여겨지고, 또 새해 아침에 가장 먼저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 해는 운수대통이라 하여 까치는 길조로 여겨지고 있다.
흰색, 검은색 신사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까치는 V자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카악 카악’낮은음과 높은음을 번갈아 질러대는 까치소리에는 내 유년의 아름다운 선율이 묻어있다.
초겨울 엄마의 새벽 군불은 새벽잠을 더 따뜻하게 했다. 하지만 “희야, 호야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야지”어김없이 엄마의 모닝콜은 반복되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 들리는 척하다가 엉덩짝을 두어 번 맞고서야 눈을 비볐다. 우리의 게으름을 늘 어리광으로 웃어넘겨주곤 했다.
마당에는 50년 먹었다는 감나무가 담장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구들이 거들어 홍시를 따면 엄마는 까치밥으로 열 알쯤은 꼭 남겨 두게 했다. 지능이 높은 까치는 고맙다는 듯 울어 주었고, 엄마는 까치소리가 반가운 기별을 알려주는 거라고 믿었다. 가끔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는 날도 있었지만, 아침 까치가 우는 날이면 누가 올려나 하고 종일 대문을 열어두곤 했었다.
첫아이 출산을 달포쯤 앞두고 이유도 없이 울적해진 마음을 추스르느라 혼자서 친정나들이를 간 날이었다.
“저놈이 누가 오는지 용케도 알지”
마치 온다는 기별을 받은 것처럼 엄마는 아랫방에 군불을 지펴두고 있었다.
“아직도 까치를 믿나? 아무도 안 오면 어쩌려고”
심한 입덧에 산달이 가까워오는 딸을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생각하니 왈칵 목이 메었다.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게 하던 따뜻한 아랫목은 언제나 너그러운 엄마의 품 같았다.
부엌에서 어렴풋하게 도마소리가 들렸고, 아침상을 차려둔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웠던 모닝콜이야! 어릴 적 그때처럼 못 들은 척 이불을 뒤집어썼다. 엄마의 정겨운 잔소리를 끄고 싶지 않아 한참을 더 뒤척였다.
우리에게 반가운 손님을 연상시켜주는 까치가 지금은 유해조수로 지정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시화를 통해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고 까치의 천적이던 맹금류의 수가 줄어든 반면, 번식력이 좋은 까치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까치 떼가 비닐하우스를 뚫기도 하고 사과, 배, 복숭아, 포도를 쪼아 먹는 등 농장의 피해가 크다는 것이 이유다. 유해조수로 지정된다면 까치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길조의 아이콘이었던 까치! 반가운 소식을 가져다준다고 믿던 엄마는 아직도 까치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아파트의 새벽을 깨우는 까치소리를 부디 오래도록 들을 수 있기를......
< 당선소감>
카메라 뷰파인더로 보는 꽃, 풀, 나무, 산과 바다...... 자연이 모두 언어였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받아 적어보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진이나 글이나,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 감정, 그리고 메시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같은 맥락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았던 이미지 그대로를 문자화 시킨다는 것이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역대학 문예창작과정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수님의 지도아래, 표현법을 익히고,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면서 삶에 대한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진 것 같습니다. 수필이라는 맑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글쓰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받으며, 먼저 표현의 미흡함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더욱더 전진하고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겠습니다.
글쓰기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신 교수님과 함께한 선린 문우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당선 소식을 주신 에세이스트에 감사를 드립니다.
감성을 자극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심사위원 / 박 춘
문학은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감동이 따르면 더 좋다. 그 위에 어떤 정신적 충격을 주면 금상첨화다. 재미는 책을 펴고 읽을 때 술술 책장이 넘어가고 무의식적으로 따라 읽어 가면 그 책은 재미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문득 마음 한쪽이 서늘해지거나 무엇인지 모를 것이 몸을 통과하거나 저절로 즐거워졌다면 틀림없이 감동받은 것이다. 재미와 감동 위에 무엇인가 금이 가고 찢어지고 존재가 휘청거렸다면 충격받은 것이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일상에서 소재를 찾고 구성의 사실성을 조건 삼는다. 단순한 사실성이 문학이 지향하는 진실(본래)로 가는 충분성을 지탱시킬 수 있는가는 작가의 역량에 따를 것이다. 문인들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초등학생 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자기 작품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여져 친구들이 읽고 부러워하고 선생님 칭찬에 즐겁고 기뻐서였다고 한다. 이 만족감이 문학을 하게 된 동기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혹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가 무의식에라도 인정욕구의 충족감에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전자는 사실성(추억)일 것이다. 후자는 내밀한 진실성(추체험)에 버금한다. 진실은 사실성에 대한 윤리의식에 가깝다. 사실과 진실이라는 이 틈새를 견디는 것이 수필 문학의 몫은 아닐까.
글을 쓰는 일은 하나의 범상한 소재를 생각해 내고 돌아봄(성찰)에서 오는 재인식을 빌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인식 세계를 그려내는 일이다. 독창성은 대상(사물이든 사건이든)에 대해 기왕의 선입관을 배재하고 치열하게 관찰하여 자신만의 발견으로 참된 인정물태를 찾는 일이다. 세계의 가상적 형상들(구태의연한 것들)에서 벗어나 본래(질)를 구하는 일이다. 실은 대상에 대해 진실하게 기뻐하고 슬퍼하면 글은 저절로 제 몫(대상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다. 제 목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등단작 「까치 모닝콜」은 무한한 믿음과 그 믿음의 실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까치울음을 빌려 얼마 전까지도 일상의 삶에 함께 스며있던 믿음과 믿음의 지극한 실천이 자연스러웠던 시대(부모 세대)를 소환하고 오늘을 말하고 내일을 묻고 있다. 우리 곁을 맴도는 까치를 보고 쉽게 지나치고 마는 건 어쩌면 누구든 당연한 거다. 박영희는 그런 소소한 사실에서 스쳐 가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감정을 재인식 독창적인 서사로 옮겨놓는다. 이렇듯 글을 쓴다는 것은 언뜻 스쳐 가는 작은 파동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깨어있는 일이다.
첫아이 출산을 달포쯤 앞두고 이유도 없이 울적해진 마음을 추스르느라 혼자서 친정 나들이를 간 날이었다.
“저놈이 누가 오는지 용케도 알지.”
마치 온다는 기별을 받은 것처럼 엄마는 아랫방에 군불을 지펴두고 있었다.
“아직도 까치를 믿나? 아무도 안 오면 어쩌려고.”
심한 입덧에 산달이 가까워지는 딸을 얼마나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왈칵 목이 메었다.
베란다 앞 정원에는 아파트와 함께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 벚나무와 목련 우듬지가 15층 아파트를 따라 오르고 또 올라간다. 언젠가부터 노인정 지붕 위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느티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껏 모닝콜 정도의 감각이었던 까치울음에서 어느 순간 작가는 유년과 엄마를 소환해 낸다. 소소한 까치울음이 잊고 지내던 시절을 소환하고 그 광휘에 몸을 떨게 만든다. 그리고 오늘을 묻게 하고 내일을 염려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의 파문, 고요하게 번져오는 파문일 것이다.
문학은 진실을 구하는 필연 여정이라고 한다. 그 탓인가, 문학은 어렵다. 그래도 수필은 쉽다고 여긴다(아마도 일상성에서라는 조건이 그런 인식을 가져오게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수필에 ‘접근하는 게 쉽다’라고 해야 맞다. 실은 수필이 ‘되는 것’은 어렵다. 매우 어렵다. 진부한 일상에서 경이를 구하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그 어려운 길에 들어선 작가의 건투를 빈다.
그는 이미 아침 창밖에서 우는 까치울음에 “실눈을 하고 창문을 열어 손을 휘저어본다. 흐느적거리는 내 손짓이 재미있다는 듯 더 크게 울어댄다”라고 글을 조율해 낼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