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회] ‘미문화원 방화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리영희 평전/[14장] 복직되고 일본, 독일대학의 초청 받아 2010/07/11 08:00 김삼웅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운동은 방법이 대담해지고 급기야 반체제적인 성격을 띄어갔다.
인권이 짓밟히고 민주주의가 도살당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도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인식한 학생들은 미국을 겨냥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고신대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이날 미국을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킨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는 내용의 전단 수백 매를 살포했다.
경찰은 사건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이 사건을 주도한 문부식, 김은숙과 불을 지른 3명, 전단살포자 3명 등 11명을 검거하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수배 중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과 김 등에게 의식화학습을 시킨 혐의로 김현장을 방화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또 가톨릭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를 범인은닉혐의로 구속했다. 법원은 국가보안법, 계엄법,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전원에 중형을 선고했다.(1983년 감형)
이 사건은 80년대 반미투쟁과 광주ㆍ대구ㆍ서울 등 잇따른 미문화원 방화사건 및 점거농성투쟁의 선도적 투쟁 방식이 되었다. 종래의 학생운동과는 크게 다른 방법이었다. 리영희는 문부식, 김은숙의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갔다. 이들이 리영희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한 까닭이었다.
난 모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계한 일은 없지만 거의 모든 사건의 ‘간접적 주범’이 됩니다.
주범인 문부식, 김은숙 두 사람의 재판에도 나는 증인으로 불려나갔어요. 내 책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들이 진술했으니까. 역시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들의 반미의식의 원천이라고 검찰이 몰아붙이더군. 여기서도 나는 나의 책들이 이 나라의 정의감에 불타는 젋은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실감했어요. (주석 1)
히틀러의 권력욕망을 니체의 ‘권력의지’에서 책임을 찾거나, 19세기 유럽 젊은이들의 자살 소동을 스토아 학파와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5공 정권은 학생들의 반미시위와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를 리영희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에 대한 당사자의 의중을 들어본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쓰면서 나는, 역사적인 당위성과 그 당위를 밀고 나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이라든가 하는 데 대해서 에드가 스노우가 마오를 보았던 그런 애착을 느꼈어요. 그리고 약간은 내 책을 읽고서 우리 사회에 그것을 적용하려고 하는 지적, 또는 정서적 충동을 받은 후배들, 독자들이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그 부분을 의식하면서 쓴 거예요. 말하자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직접으로 쓰지는 못하니까, 적어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어떤 삶의 방식이 있다, 사회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효과를 기대하고 썼어요. (주석 2)
리영희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6.25 전쟁 참전과 오랜 언론인 생활, 특히 외신기자 활동을 하면서, 많이 알게 되고 또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처지이지만 그의 ‘미국관’은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1945년에서부터 48년까지 미국 군대에 의한 점령통치기구인 군사정권하에 놓였지요.
일본 총독통치의 변형이었지. 48년에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이승만이 남북 통일국가 수립을 거부하고, 국토분단을 전제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한 것도 이승만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이었지요. 이승만을 ‘탁월한 민주주의 지도자’니 ‘비타협의 강력한 반공주의 영웅’이니, ‘코리아 민족의 수호자’따위의 칭호로 추켜 올리며, 그의 철저한 반민주적, 권위주의적, 야심주의자적 행태에 눈을 감고 12년이나 뒷받침했던 미국이 1960년 봄에 이승만을, 한마디 유감의 말도 없이 헌신짝 버리듯 폐기해 버립니다.
다음의 민주당 정부도, 장면이라는 친민주의적 가톨릭 세력의 대표자를 미국의 낙점으로 집권시켰어요. 그러나 그 정권이 최초의 깨끗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됐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에서 조성되는 정치적 불안정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자, 박정희로 대표되는 철저한 반민주, 반자유적 극우반공 군인집단으로 대치시켰지요. 이후 18년 동안 미국 국가 이익의 충실한 대리인이었던 박정희와 그 군부 권력집단이 또 쓸모없게 되자 미국은 그들을 대치할 세력을 물색하게 됩니다.
바로 전두환이라는 철저하게 타락한 군인과 그의 주변 집단이지. 박정희 통치의 끝에 와서 막간으로 연골됐던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 사건에서도 나는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인 미국의 역할을 감지할 수 있어요. 전두환을 등장시킨 영화배우 출신 반공주의자 레이건 대통령은 즉각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극우반공주의적 자본의 대표인 나카소네 수상 정권으로 하여금 전두환에게 40억 불의 ‘정권탈취 사례금’조의 원조를 제공하게 했어요.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통해서, 일본에게 남한에 대한 경제적 보호 역할 뿐 아니라, 정치, 군사적 보호역할까지를 위임했어요. 그 가장 상징적인 조치가 악명 높은 전쟁주의자인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즉시 공식적으로 전두환을 첫번째 국빈으로 백악관에 초청한 결정이지. 전두환은 아직 정식 대통령도 아니었어.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윤허를 내린 19년 전에도 박은 쿠데타 권력의 총수였지 대통령이 아니었다고. 꼭 같은 수법이오. (주석 3)
주석
1) 리영희, <대화>, 544~545쪽.
2) 리영희-서중석과 대담, <사회평론>, 1991년 6월호, 100쪽.
3) 리영희, <대화>, 296~298쪽.
인권이 짓밟히고 민주주의가 도살당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도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인식한 학생들은 미국을 겨냥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고신대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이날 미국을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킨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는 내용의 전단 수백 매를 살포했다.
경찰은 사건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이 사건을 주도한 문부식, 김은숙과 불을 지른 3명, 전단살포자 3명 등 11명을 검거하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수배 중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과 김 등에게 의식화학습을 시킨 혐의로 김현장을 방화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또 가톨릭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를 범인은닉혐의로 구속했다. 법원은 국가보안법, 계엄법,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전원에 중형을 선고했다.(1983년 감형)
이 사건은 80년대 반미투쟁과 광주ㆍ대구ㆍ서울 등 잇따른 미문화원 방화사건 및 점거농성투쟁의 선도적 투쟁 방식이 되었다. 종래의 학생운동과는 크게 다른 방법이었다. 리영희는 문부식, 김은숙의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갔다. 이들이 리영희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한 까닭이었다.
난 모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계한 일은 없지만 거의 모든 사건의 ‘간접적 주범’이 됩니다.
주범인 문부식, 김은숙 두 사람의 재판에도 나는 증인으로 불려나갔어요. 내 책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들이 진술했으니까. 역시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들의 반미의식의 원천이라고 검찰이 몰아붙이더군. 여기서도 나는 나의 책들이 이 나라의 정의감에 불타는 젋은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실감했어요. (주석 1)
히틀러의 권력욕망을 니체의 ‘권력의지’에서 책임을 찾거나, 19세기 유럽 젊은이들의 자살 소동을 스토아 학파와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5공 정권은 학생들의 반미시위와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를 리영희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에 대한 당사자의 의중을 들어본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쓰면서 나는, 역사적인 당위성과 그 당위를 밀고 나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이라든가 하는 데 대해서 에드가 스노우가 마오를 보았던 그런 애착을 느꼈어요. 그리고 약간은 내 책을 읽고서 우리 사회에 그것을 적용하려고 하는 지적, 또는 정서적 충동을 받은 후배들, 독자들이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그 부분을 의식하면서 쓴 거예요. 말하자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직접으로 쓰지는 못하니까, 적어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어떤 삶의 방식이 있다, 사회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효과를 기대하고 썼어요. (주석 2)
리영희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6.25 전쟁 참전과 오랜 언론인 생활, 특히 외신기자 활동을 하면서, 많이 알게 되고 또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처지이지만 그의 ‘미국관’은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1945년에서부터 48년까지 미국 군대에 의한 점령통치기구인 군사정권하에 놓였지요.
일본 총독통치의 변형이었지. 48년에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이승만이 남북 통일국가 수립을 거부하고, 국토분단을 전제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한 것도 이승만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이었지요. 이승만을 ‘탁월한 민주주의 지도자’니 ‘비타협의 강력한 반공주의 영웅’이니, ‘코리아 민족의 수호자’따위의 칭호로 추켜 올리며, 그의 철저한 반민주적, 권위주의적, 야심주의자적 행태에 눈을 감고 12년이나 뒷받침했던 미국이 1960년 봄에 이승만을, 한마디 유감의 말도 없이 헌신짝 버리듯 폐기해 버립니다.
다음의 민주당 정부도, 장면이라는 친민주의적 가톨릭 세력의 대표자를 미국의 낙점으로 집권시켰어요. 그러나 그 정권이 최초의 깨끗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됐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에서 조성되는 정치적 불안정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자, 박정희로 대표되는 철저한 반민주, 반자유적 극우반공 군인집단으로 대치시켰지요. 이후 18년 동안 미국 국가 이익의 충실한 대리인이었던 박정희와 그 군부 권력집단이 또 쓸모없게 되자 미국은 그들을 대치할 세력을 물색하게 됩니다.
바로 전두환이라는 철저하게 타락한 군인과 그의 주변 집단이지. 박정희 통치의 끝에 와서 막간으로 연골됐던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 사건에서도 나는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인 미국의 역할을 감지할 수 있어요. 전두환을 등장시킨 영화배우 출신 반공주의자 레이건 대통령은 즉각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극우반공주의적 자본의 대표인 나카소네 수상 정권으로 하여금 전두환에게 40억 불의 ‘정권탈취 사례금’조의 원조를 제공하게 했어요.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통해서, 일본에게 남한에 대한 경제적 보호 역할 뿐 아니라, 정치, 군사적 보호역할까지를 위임했어요. 그 가장 상징적인 조치가 악명 높은 전쟁주의자인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즉시 공식적으로 전두환을 첫번째 국빈으로 백악관에 초청한 결정이지. 전두환은 아직 정식 대통령도 아니었어.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윤허를 내린 19년 전에도 박은 쿠데타 권력의 총수였지 대통령이 아니었다고. 꼭 같은 수법이오. (주석 3)
주석
1) 리영희, <대화>, 544~545쪽.
2) 리영희-서중석과 대담, <사회평론>, 1991년 6월호, 100쪽.
3) 리영희, <대화>, 296~2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