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홍콩 무협 장르를 대표했던 장철 감독의 액션영화. 갑부의 황금을 훔쳐 달아난 도적을 잡기 위한 주인공 철무정의 활약을 그렸다. 〈외팔이〉(1967), 〈금연자〉 〈복수〉(이상 1968) 등과 함께 장철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제작연도 1969
감독 장철
출연 나열, 강대위, 방면, 리칭
시놉시스
‘궁백만’ 집에 검은 복면을 쓴 도적이 침입해 일가족을 몰살하고 거액의 금괴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포도사 ‘철무정’은 동생들을 이끌고 정체불명의 도적을 잡으려 하지만 마땅한 단서가 없어 애를 먹는다. 그러던 중 절름발이 행세를 하던 ‘팽’과 황금주판을 무기로 삼는 ‘이부락’이 도적의 일원임을 확인한다. 철무정 일행은 이들을 붙잡아 응징하던 중에 도적의 우두머리가 ‘마위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위갑은 지난 2년 동안 4건의 커다란 도적질로 악명을 떨치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체가 묘연한 상태였다. 도적질을 할 때만 모습을 드러낼 뿐 그외의 시간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집에서 성인이 된 딸과 함께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위갑은 아버지로서 딸을 애지중지하지만 좀 특별한 사연이 있다. 딸이 6살 이후 앞을 보지 못했던 것. 아버지는 밖에 나갈 때면 딸에게 장사를 한다고 속이고 실은 도적질을 해오며 신분을 숨겨왔다.
하지만 집요하게 뒤를 쫓던 철무정 일행에게 정체가 탄로날 지경에 놓이지만, 마위갑은 철무정에게 부상을 입히는 데 성공한다. 상황이 위급하자 철무정은 마위갑의 공격을 피해 아무 말이나 타고 싸움에서 벗어난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뒤 눈을 떠보니 철무정은 생전 본 적 없는 집 앞에 당도해 있다. 타고 온 말의 주인이 마위갑이었던 까닭에 앞을 못 보는 딸의 집에 오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딸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하고, 이후 도착한 마위갑과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작품해설
1. 감독과 스타일
장철은 멜로드라마와 같은 신파영화가 대세이던 1960년대 당시 홍콩 영화계에 무협 장르의 인기를 되살린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여자배우 중심으로 영화가 제작되던 흐름에 반하여 젊고 활기찬 남자배우를 고용, 마초영웅을 창조했다. 또한 섬세한 심리묘사가 중시되던 이야기 구성의 전통을 깨고 사건이 중심이 되는 액션을 강조하며 무협영화의 붐을 일으킨 것도 그였다. 그렇게 장철은 당시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던 거대 제작사 쇼브러더스의 가장 중요한 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스타일의 무협영화로 인기를 모으던 호금전 감독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대취협〉(1966), 〈용문객잔〉(1968), 〈협녀〉(1971) 등을 히트시킨 호금전 감독이 잘 짜인 안무에 가까운 액션을 선보였다면 장철 감독은 난투극에 가까운 무협 연출로 좀더 실감나는 영화를 만들었다.
〈철수무정〉은 그런 장철 감독의 스타일이 잘 살아 있는 작품으로, 생생한 공중곡예와 무기를 활용한 격투가 강조된다. 또한 장철 감독의 영화는 비장미가 극중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철수무정〉은 이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따뜻함이 목격되는 결말로 인해 장철의 필모그래프에서 변화가 감지되는 흥미로운 지점으로 남아 있다.
2. 주제
〈철수무정〉은 철무정으로 대변되는 선(善)과 마위갑으로 대표되는 악(惡)의 대립구도가 확실하다. 그 때문에 영화는 선이 악을 응징하는 해피엔딩의 결말을 따르지만 그와 같은 단층적인 이야기와 다르게 인물들의 성격은 좀더 입체적인 양상을 띤다.
악을 상징하는 마위갑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첫 등장만 해도 마차에 타고 있는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어 정체를 눈치 채기가 쉽지 않다. 이는 의도적인 촬영으로 마위갑이 단순한 악역 이상임을 암시한다. 아닌 게 아니라 마위갑은 철무정의 입장에서 도적질을 일삼는 악당이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딸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빠다.
그래서 철무정이 마위갑을 처단하는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이면서도 관객에게 완전한 통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죄를 지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인 또한 평범한 이들처럼 자식을 둔 아버지라는 점에서 일말의 동정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철수무정〉은 영웅 서사라기보다는 패배한 이들의 사연에 더 가깝다. 철무정은 마위갑을 누름으로써 승자가 되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를 모두 잃고 치명적인 부상까지 입기에 마냥 승리감에 도취될 수 없다. 대신 마위갑의 딸과 연을 맺지만 이들 모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었기에 가슴속에 큰 멍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3. 영화의 정서 : 비장미
패배한 이들의 이야기인 만큼 〈철수무정〉을 지배하는 주요한 정서는 비장미다. 그 결과,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가치, 즉 폭력과 순정이 〈철수무정〉을 비롯해 장철의 영화에서는 사이좋게 공존한다. 이같은 장철의 영화를 두고 당대 비평가들은 ‘신(新)무협영화’라는 표현을 썼다. 장철이 등장하기 전 홍콩의 무협영화들은 베이징 경극의 무술에서 유래된 안무와 판타지적 요소가 강했다.
반면 장철 감독은 피가 난무하는 액션으로 관객을 놀라게 했다. 〈철수무정〉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장철 감독은 마위갑을 따르는 팽이 표창을 던지면 그것이 철무정 일행 중 한명의 머리에 꽂힌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킬 뿐 아니라 그 주변에 피를 흥건하게 뿌려놓는다.
게다가 결투가 벌어지면 과도한 배경음악 대신 바람 소리만 집어넣어 스산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다만 그것이 잔인함을 넘어 비장미로 승화된 것은 그 죽음의 순간에도 동료를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의리 혹은 가족애 때문이다(장철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했던 오우삼 감독은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의 영화에서 그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계승한다). 이같은 비장미는 철무정과 마위갑이 각각 죽은 동생들을 위해, 딸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복수심을 불태우는 최후의 결투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4. 영화적 기법
장철이 소속되어 있던 당시 쇼브러더스는 홍콩에서 가장 거대한 세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철수무정〉도 극중 인물이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모두 이 세트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하여 영화 속 결투가 모두 갈대밭과 같은 숲에서 이뤄지지만 세트 촬영이기 때문에 시원하게 뚫려 있기보다는 폐쇄적인 느낌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액션으로 시작해 액션으로 끝을 맺는 장철의 영화에서 강호라는 링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맞대결의 설정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여기에는 관객을 배려한 장철 감독의 촬영 원칙이 하나 있었다. 관객이 너무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게끔 편집 없이 카메라를 수평으로 길게 이동시켜 영화 속 장소가 실제보다 넓어 보이는 효과를 유도했다. 그 과정에서 꽤 인상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위갑을 쫓던 철무정의 넷째 동생이 주막에서 싸우는 장면이 좋은 예다. 격투를 벌이던 인물을 따라 카메라 역시 수평으로 이동하다 보니 비가 떨어지지 않는 주막 안과 비가 내리는 바깥이 교차하며 마치 화면이 분할된 듯한 극적인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카메라의 수평 이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홍콩 무협의 특징 중 하나는 허공을 날아오르는 활극인데 이를 찍기 위해서는 피아노 줄이 필수였다. 다만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당시 제작 여건상 피아노 줄을 가리기 위해서는 장면을 잘게 쪼개 일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관객의 눈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관객이 〈철수무정〉의 격투 장면을 보면 중간에 화면이 튀는 것 같은 어색한 편집의 느낌을 받게 된다.
주요 등장인물
철무정(나열) : 동생들을 대동하고 마위갑의 뒤를 쫓는 창주 포도사. 무술 실력이 워낙 뛰어나 그의 이름만으로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철이정(강대위) : 철무정의 바로 아래 동생. 철무정만큼 무술 실력이 뛰어나지만 형을 구하던 중 마위갑에게 목숨을 잃는다.
마위갑(방면) : 도적을 이끄는 우두머리. 자신을 쫓는 철무정 일행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지만 하나뿐인 딸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다.
계고(리칭) : 마위갑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외동딸. 6살 이후 눈이 보이지 않아 애지중지 키워왔지만 이후 철무정과 함께 살게 된다.
명장면 명대사
- 계고 : “늑대가 흉악한가요?”
- 철무정 : “네, 자신의 앞길을 막으면 모두 해할 만큼 흉악했어요.”
- 계고 : “늑대가 아무리 흉악하다고 해도 새끼들에게는 잘할 거예요.”
- 철무정 : “그럼요, 낭자 말이 맞아요.”
마위갑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철무정은 우연히 앞을 보지 못하는 마위갑의 딸 계고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철무정은 왜 상처를 입었냐는 그녀의 질문에 마위갑을 늑대에 비유해 대화를 이끌어간다. 순수한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쓰는 철무정의 마음 씀씀이와 더불어 악한이면서 아버지인 마위갑의 아이러니한 위치가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연관 영화
〈금연자〉(1968, 장철) : 철무정을 연기한 나열이 이 영화에서도 무술 실력이 뛰어난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첩혈쌍웅〉(1989, 오우삼) : 킬러를 쫓는 형사, 형사의 눈먼 여동생, 그런 여동생을 사랑하는 킬러. 철무정과 마위갑, 계고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설정을 통해 오우삼은 〈철수무정〉의 장철에게서 받은 영향력을 숨기지 않는다.
집필 허남웅
영화평론가. 1974년 서울출생. <딴지일보> 영화기자, 영화주간지 취재기자, 시네마테크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현재는 <맥스무비> 객원기자, 영화평론가로 활동
감수 김혜리 기자
<씨네21> 편집위원. 1995년부터 2년간 한겨레신문사 <씨네21>에서 근무하고 영국 UEA(이스트 앵글리아 대학) 석사과정에서 1년간 영화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