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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5(주일) 요한복음 13:1~20 ‘사랑과 섬김의 본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과 섬김의 표현 중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보여주신 사랑과 섬김의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본질과 우리가 따라가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의 본되신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1~5절)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신 예수님은 자신을 팔려는 자가 그 자리에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단하십니다(1절). 여기서 ‘끝까지’라는 헬라어 "ἕως τέλους" (헤오스 텔로스)는 ‘완전히’, ‘최종적으로’라는 의미로 ‘어떤 상태나 행위가 특정한 지점이나 시점까지 지속됨’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사랑이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 초월하는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과 대야를 드십니다(4절). 그리고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맡기신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니므로 발에 먼지가 많이 묻어 외출하면 발을 씻었습니다. 이스라엘 풍습은 자기가 자기 발을 스스로 씻지 않았습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제자가 스승의 발을, 종이 없으면 서로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당시에는 길에 먼지가 많았고, 신발을 매우 불편했기 때문에 집에 손님이 오면 발을 씻겨주는 것이 일반적인 예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예나 종이 하는 일이었고, 하물며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조차 씻어드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권력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권력의 주도권 싸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서로 긴장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해야 할 것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섬길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먼저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낮아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네가 먼저 내 발을 씻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야고보는 베드로가, 요한은 안드레에게, 안드레는 요한에게 서로 네가 먼저 내 발을 씻어주면 내가 네 발을 씻어주겠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까지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은 훈계와 책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발을 씻어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그들의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개구쟁이 발을 씻어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의 발을 먼저 씻기셨겠습니까?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가룟 유다의 발을 먼저 씻어주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심으로 사랑을 창조하셨습니다.
실습은 교육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방법입니다. 직접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제자훈련을 거의 이러한 방법으로 진행하셨는데, 곧 모델링 교육입니다. 당시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이방인 노예이거나, 아내 또는 자녀 중에서 남자의 발을 씻을 경우가 있었지만 남자가 씻어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 행동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 순간 아마 주님은 당신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 주었던 마리아를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섬김의 표현을 했던 마리아처럼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친히 섬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유월절 만찬은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 자신의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기 위해 발을 씻기시는 적용을 하십니다. 이러한 섬김이 가장 권세있는 행동입니다. 적용) 나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내게 붙여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2. 우리가 행해야 할 본을 보이신 예수님(6~15절).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 발을 씻겨주려고 하시자 이를 거부합니다(6~8절).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섬김의 정신과 대속의 사랑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고 말씀하십니다.
‘상관이 있다’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함께 받을 유산, 함께 할 몫’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들과 함께 영원한 유업을 상속받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발을 씻는 행위를 넘어, 예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발 씻기를 거절했던 베드로는 이제 자신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한 번 당황하고, 베드로 때문에 한 번 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족식 자체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며 서로 섬기는 삶을 살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실 때는 세족과 목욕을 연결하여서 세족에 회개의 의미를 포함시키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영적으로 죄를 씻어주시는 행위이자, 또한 섬김의 모습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옳으니라”(14절)고 명하십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며,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기꺼이 도와주는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필두로 자기가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또한 예수님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로 인해 옆에 있는 다른 제자 동료, 동역자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나 혼자 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며 최고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동료와 동역자들을 챙기고, 그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선생이자 주님이신 에수님이 보이신 섬김의 본을 따라 제자된 우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을 해야 합니다.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과 복음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적용) 오늘 내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사랑과 겸손의 종의 모습으로 섬겨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3. 종으로 섬기는 자가 보냄받은 사명자임을 알려주신 예수님(16~20절)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섬기려면 우리의 ‘본분과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남의 발을 기쁘게 씻길 때 복이 있습니다(17절).
복이 되는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 많은 선교사님들이 이 땅을 찾아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중 서서평(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줍니다. 1912년 32세 나이에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로 한국에 온 서서평은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고,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습니다.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임금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서선교사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한복을 입고 된장찌개를 먹으며 한국인으로,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전라도 궁핍한 지역의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열 네 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서른여덟 명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위해 많은 헌신과 섬김을 베풀다 54세 나이에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한 그녀는 자신의 몸마저 의학연구용 시신으로 기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합니다. 이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 떠난 그녀의 남루한 방에 남은 것은 낡은 옷가지 몇 개와 반쪽이 된 담요, 동전 일곱 전, 강냉이 두 홉, 그리고 그의 좌우명이 적힌 메모지 한 장이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과 우리를 섬겨 주신 주님을 본받아 그 길을 걸었으며 그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나의 성공을 위한 길인지 섬김의 길인지 이 간증을 통해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가족과 지체를 생색없이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큐티인 묵상간증] 생색을 버리고, 제리 라이더
미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무늬만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다 결혼 후 외도하여 29년간의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끝맺었습니다. 이후 저는 같은 미군인 지금의 아내와 재혼하여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악과 음란으로 죽어 마땅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이 있는 공동체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양육을 받으면서 제가 얼마나 뼛속까지 죄인인지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 소그룹 리더가 주일예배 준비를 위해 토요일에 예배당 세팅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도 멀고 토요일 오후에 교통이 혼잡해서 운전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그런 뒤 여러 성도가 합심하여 미리 세팅해 놓은 예배당에 편히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토요일마다 양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를 교회에 태워다주고 아내가 양육을 받는 동안 소그룹 리더와 함께 예배당 세팅을 도왔습니다. 카펫을 깔고 바닥을 쓸고, 많은 의자와 악기를 창고에서 꺼내놓고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하고 나니 어깨와 허리가 아파 조금씩 생색이 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4~5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교회와 지체들을 겸손히 섬겨야 함에도 저의 편안함만을 추구한 것이 깨달아져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소그룹 리더는 7년째 토요일마다 예배당 세팅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봉사자들도 매 주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차 안내로 섬기고, 이른 시간부터 웃는 얼굴로 성도들을 맞이 합니다. 이런 지체들의 헌신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저의 구원을 위해 수많은 지체의 희생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저도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을 따라 지체들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적용하기) 1) 현재 거주하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교회 청년들에게 [큐티인]을 주고 큐티하는 방법을 알려주겠습니다. 2) 온라인으로 나눔을 하고 있는 해외 소그룹 지체들에게 매주 한 번 이상 전화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이웃의 종으로 섬기는 자가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보내신 사명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가진 권위는 예수님으로 부터 온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표하여 행동하며, 그 분의 권위를 빌려서 영혼구원을 위해 기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적용) 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나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허락됩니다.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보여주셨던 섬김을 본받고 닮아가며,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형제의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겸손한 섬김의 삶이었던 것을 봅니다. 안수현 형제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있습니다.
“고려대 의대를 나온 안수현 형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환자들에게는 친절한 의사였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로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을 했을 때, 그는 병원에 홀로 남아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자들을 두고 병원을 떠날 수 없어서였습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하루 한 끼 먹을 시간도 없이 격무에 시달렸지만, 자신의 소명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를 따라 병원을 지켰습니다. 돌보던 환자들의 병실을 밤마다 몰래 찾아가 조용히 낫기를 기도해 주던 그였습니다. 환자가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하던 참 이상한 의사였지요.
그는 ‘선물을 주는 의사’였습니다. 암투병을 하는 환자에게는 ‘찬송가테이프’를,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환자들만 아니라 병원에 근무하는 동료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방사선기사, 환자들의 침대를 옮기는 분들, 구두 닦는 아저씨와 매점 아주머니에게까지 그 청년은 겸손하고 따뜻한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돈이 없는 조선족 할아버지의 검사비를 대납해 주고, 백혈병이 걸린 소녀에게는 집까지 찾아가 생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청년을 자기 차에 태워 콘서트장까지 동행해 주는 깜짝 선물을 하기도 했고, 집에만 누워 있는 어린 환자를 찾아가 책을 읽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당연히 살려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2006년 1월 5일, 그 청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3세, 아주 짧은 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귀한 흔적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청년 바보 의사 안수현 형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의 삶, 사랑을 실천한 인생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을 통해, 겸손, 섬김, 그리고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섬김, 특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다 보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고도 배신한 유다처럼 배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결과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릎을 꿇고 섬기는 곳에서 언제나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길은 분명 쉬운 길은 아닐 것이며 하루 아침에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걸어간다면, 어느새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앞으로 남은 우리 인생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섬김을 받은 자로, 그리고 이제 우리도 누군가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