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26일 열린 제30회 국제교회성장연구원(CGI) 세계교회성장대회에서 한국교회 부흥의 비결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기도였다.
세계오순절협회(PWF) 총재인 윌리엄 윌슨 목사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을 치켜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기도 덕분이었다. 다른 나라 교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열정 넘치는 기도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기도 전통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한동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가 최근 학술지 ‘성경과 신학’에 발표한 ‘한국교회 초기 부흥과 기도’에는 국내 기독교인의 기도 문화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서술돼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기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면서 한국교회의 부흥이 시작된 1884~1910년 기도운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분석했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기도문화가 정착한 이유에 관한 내용이다. 일각에서는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조왕신에게 치성을 드리던 무속적 습관이 새벽기도로 발전했다는 주장을 내놓지만 한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던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호러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가 대표적이다. 언더우드가 남긴 기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여러 도움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가장 우선되고 가장 큰 도움이 무엇이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기도다.…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도 깊이 느꼈다.”
아펜젤러도 마찬가지다. 그는 웨스트체스터주립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876년 10월 회심을 경험했는데 회심하자마자 학교에 기도회를 조직해 수년간 이끌었다. 이들 외에도 윌리엄 스크랜턴, 조지 길모어, 호머 헐버트 등도 기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기도 제목이 담긴 소책자나 ‘기도 달력’을 만들어 보급했고 이 같은 활동은 기도회로 이어졌다.
새벽 기도회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한국교회에서는 이미 기도로 새벽을 깨우는 이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길선주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길 목사는 평양 대부흥의 열기가 얼마쯤 가라앉던 1909년 박치록 장로에게 매일 새벽 교회에서 기도할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약 2개월 동안 새벽기도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기도에 동참하는 성도가 늘었다. 선교사 윌리엄 스왈른이 남긴 기록엔 이렇게 적혀 있다.
“(길 목사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으며 새벽 4시30분에 종을 울릴 것이라고 주일 오전 예배에서 광고했다.
다음 날 새벽 1시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2시에는 수백명이 모였다.…며칠 후 이 이른 시간에 모인 인원은 600~700명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분위기 덕분에 생긴 ‘기도의 열매’로 한 교수가 첫손에 꼽는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 기도를 배우게 됐다”는 것이다. 기도를 매개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미신에 휘둘리던 문화도 조금씩 사라지게 됐다.
한 교수는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모든 것이 절박하던 시대에는 기도를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한국교회에 ‘기도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중요성을 많은 이가 되새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논문에는 평양 교회들의 기도와 부흥을 지켜본 J R 무스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글이 소개돼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신뢰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짧은 역사 동안 때때로 일어난 많은 사건에 의해 확인되었다.…그중 하나는 평양 사람들이 동트기 전에 한 교회에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서울의 작은 교회에서 신실한 남녀들이 밤새도록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은 그들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었던 우리를 매우 부끄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