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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박천규(대건 안드레아)가 바오로 딸 수녀원에서 발간하는 월간 잡지 '야곱의 우물'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동 잡지 '지팡이'난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체험담을 주로 받아 게재하고 있으며, 대건 안드레아의 '오묘한 이끄심'도 본인의 입교 계기 또 부인 마리아 자매님과 함께 투병생활을 통하여 현존하는 하느님께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는 영성을 느끼게 하는 글로 여겨집니다.
지난 1968년 4월, 지방 방송사 기자로 입사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중앙지의 중견 언론인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사회생활의 무대가 같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고, 업무에서 맺어진 인연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좌석으로도 자주 이어졌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 자리에서 선배는 내가 취재해 방송(그 당시는 라디오)을 통해 나간 뉴스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청취자의 입장에서 평가해 주었다. 그뿐 만 아니라 사회생활 첫 관문인 공공기관을 출입하는 자세와 취재 요령, 기사를 작성하는 요령도 일러주는 관심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거리를 함께 걷기를 좋아하는 선배는 헤어지기 전 언제나 한마디를 남겼다. "성당에 한번 나와 보지 않을 거야? 나와 보라고, 괜찮은 곳이야!" 그러나 그 선배의 권유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세월만 흘러갔다. 그런데 1988년 하반기부터는 성당에 다니는 후배 내외가 선배의 뜻을 이어받은 듯 "성당에 함께 나가보시지요?"하는 것이었다.
1989년 새해가 되어 이른 봄 햇살이 온 누리에 퍼지기 시작할 때 후배 내외가 단골손님처럼 찾아와 성당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점심시간을 함께해 주었다. 2월 어느날, 드디어 아내가 후배에게 "다음주에는 나도 함께 성당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후배 내외가 다니는 성당에 가서 처음으로 미사가 봉헌되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후 예비자 교리를 받기로 마음을 정하자 후배 내외는 기뻐하면서 예비자 교리를 차질 없이 받을 수 있도록 늘 차편을 제공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교리를 받는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 그들은 예비자 교리를 다시 받은 셈이다. 드디어 1989년 4월 15일, 우리는 주님의 자녀인 대건 안드레아와 마리아로 다시 태어났다. 대부님이 된 시몬 샌배의 권유를 받은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대부님의 부인 수산나 자매님은 아내의 대모님이 되어 우리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고 계시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후배 내외(안셀모와 크리스티나)는 주일마다 고통편을 제공해 주었고 함께 미사에 참례해 전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
주일이면 우리 부부는 교중미사에 열심히 참례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는 마이카 붐이 일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승용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본 마리아가 나에게도 운전면허 따기를 권했다. 마리아는 틈만 나면 빨리 면허를 따 마이카시대에 따라가고 또 회사를 떠나게 될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운동신경에 문제가 있다며 면허 따는 것을 말리던 친구들 말을 듣고 주저 했는데, 마리아의 끈질긴 권유에 따라 두번째 응시 끝에 마침내 2종 운전면허를 따게 되었다. 나보다 먼저 1급 운전면허를 딴 마리아는 가끔 운전 교습도 시켜주었다.
운전면허를 딴 지 4년째가 되는 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리고 있던 그해 9월 12일 주일 이른 아침, 회사에 나가 사무실로 배달된 신문을 가져와 잠시 흝어본 후 초가을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는 갑천변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코가 몹시 매웠다.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기에 마리아에게 냄새를 좀 맡아보라고 했으나 아무렇지도 않다며 누가 고추를 운반한 모양이라고 했다. 속이 심하게 메슥거려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같은 라인 사람들이 달려와 혈압을 재보더니 혈압이 좀 높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사관을 트고, 등을 치기도 하고, 누워서 안정을 취해보라며 난리들이었다.
아침 7시 반쯤부터 이러한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어느새 교중미사에 갈 시간이 되었다. 안셀모 형제 내외와 함께 성당 앞까지 갔으나 걸을 수 없었고 땀이 비 오듯 전신을 흠뻑 적셔 도저히 미사에 참례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누웠으나 좀처럼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혈압을 재본 의사는 "이런 환자를 데리고 뭘 하는 것이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다시 종합병원으로 옮겨 신경과 과장의 진료를 받은 것이 오후 3시. 뇌경색으로 굳어져 가는 피를 용해제로 녹여내는 것이 우선이라며 주사를 계속 놓았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입원 치료를 한 후 일단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하게 되었다. 퇴원하던 날, 주치의는 물리치료 등 통원치료를 열심히 받아야 한다며 만일 발병하던 날 자신과의 만남이 세 시간만 늦었어도 영안실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퇴원하던 날부터 삼발이 지팡이와 쇠소리 나는 보조화를 신고 절룩이며 걸어야 했고 말도 어눌해져 많은 불편이 따르는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치의를 비롯한 의료진과 호흡을 맞추며 통원치료를 열심히 한 결과 어눌했던 발음이 조금씩 풀렸고 지팡이 없이도 걷게 되었다. 편마비되었던 왼발과 손도 좋아져 자동차 가속기와 핸들을 조작하며 운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뇌경색으로 두 달여 입원 치료를 받은 후 다시 회사에 출근하는 행복한 몸이 되었다. 그러나 88년 임원으로 선임되어 연임하던 중 발병했고 불완전한 몸으로 출근은 하지만 연임 임기가 종료되는 내년 3월이 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짐작하던 대로 임기종료와 함게 청춘을 바쳤던 직장을 지체부자유 상태로 떠나야 했다. 퇴사하는 나를 따라 들어오는 사무실 짐을 보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내 마리아였다. 짐을 보는 순간 머리에 센 바람이 부는 것 같다더니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증세가 좀 호전되는 듯하다가 다시 악화되길 반복했다. 해를 넘겨도 호전될 가망이 보이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한시라도 빨리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 보라는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어렵게 입원한 후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머리를 여는 개두수술을 한 마리아는 방사선 조사 치료 등 입원 진료 두 달 후 일단 퇴원했다. 그리고 서올에서 한 달여 통원 치료를 하고 나서 대전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투병하고 있다. 수술 후유증으로 나타난 왼쪽 편마비는 아직도 제대로 풀리지 않아 손발이 둔하고 힘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몸을 가지고도 컴퓨터 교습을 받아야 한다며 나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말했고, 마리아가 서울 병원에 외래로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학원에 빠지지 않고 나가 컴퓨터 교습을 받아 기초를 익힐 단계가 되었다.
이 무렵 쉰 목소리가 여러 달째 가시지 않고 때로는 심한 감기가 든 것처럼 목젖이 아프고 목구멍이 답답한 증상이 나타나 또다시 병원을 찾았다. 후두를 간이 내시경한 전문의는 소견서를 써주며 서울의 큰 종합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했다. 전문의는 나에게 무슨 병인지 귀띔해 주지 않았다. 2001년 연말에 찾아간 한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은 임상진단 후 "후두암 초기 같다"고 했다. 이어진 정밀검사 결과도 마찬가지. 그후 6주 반 동안 매일 기차로 대전에서 서울 병원을 오가며 방사선 조사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재발하기를 두 번. 레이저 시술을 두 번 받았으나 결국 수술하기로 예약하고 2004년 1월 7일, 12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하며 성대를 전부 잘라냈기 때문에 병상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수술 전 주치의가 말해준 대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휴대용 간이칠판을 써보기도 하고 음성재활 과정에 참여도 해보았다. 그러나 결국 목안에 '단추'라는 것을 넣어 기도공(목 수술 후 생긴 구멍)을 눌러 조금씩 발음하는 방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발음이 된다 해도 부정확하고 긴 시간 발음할 수 없는 불편이 따랐다. 말하는 환자의 입장에서도 불편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겪는 불편도 컸다.
대화할 수 없는 불편함을 대신할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바로 컴퓨터였다. 기초과정을 익힌 실력으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언어생활의 큰 불편을 많이 덜었다. 그러나 후두 수술은 언어장애자를 만든 것 이외에 음식물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만들었다.물 한모금 마시고 싶어도 빵과 같은 음식물을 흡입체로 함께 마시지 않으면 심한 사래로 이어졌다. 그래도 빵을 매개로 시원한 물도 한 모금 한 모금씩 마실 수 있었다. 목에 난 구멍 때문에 목욕 한 번 할 수 없던 나는 수술 3년여 만에 목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목욕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도 석달에 한 번씩 외래 진료를 받으며 '단추'를 갈아 끼우고 있다.
내가 시몬 선배를 만난 것이 지난 1968년이니, 그로부터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선배와의 만남으로 주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고, 신자생활을 하면서 겪게 된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종교를 가짐으로 인해, 찾아온듯 보였던 불행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뇌경색 전에 운전을 하게 되었고, 목 수술 전에 컴퓨터 기초를 익혔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신자가 된 후 겪은 모든 시련과 고통에 한 발 앞서 주님께서는 그 같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항상 오묘하게 이끌어 주셨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준비인가! 나는 오히려 주님께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온다 해도 그보다 한 발 앞서 주님께서 오묘하게 이끌어 주실 것을 굳게 믿는다. 그분은 나를 돌보는 분이시기에...
첫댓글 + 찬미예수님, 1968년 부터 아니 아마도 훨씬 전부터 천규 부부에 대한 하느님의 오묘한 이끄심은 하느님의 아들 딸로 다시금 태어나 이땅의 고통받는 모든이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게 만드셧나 보구나!! 알렐루야 ! 좋은글 올려주어 고맙다.
영상아,넌 참 기술도 좋구나. 생각도 못한 것을 생각해 올려놓는 수고를 또 했구나. 글 내용이 <야곱의 우물>'지팡이'코너에 제대로 맞기나 하는지 모르겠구나. 너에게 또 다시 고마운 마음이다.
천규야, 사실은 내가 야곱의 우물을 정기 구독하고 있는데, 미처 보기 전에 너로부터 소식을 듣고 급히 읽어 보았단다. 가톨릭 Good news를 통하여 성경을 쓰고 있어서 자판을 거의 익혔기 때문에 올리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 되지는 않았어. 너희 체험을 통한 신심에 대햐여는 감복할 수밖에 없구나. 마리아 자매님과 함께 늘 건강하기를.
천규와 아주머니의 병력을 읽노라면 한편의 가슴아픈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야. 수술 년도가 2004년이 아니고 2002년 아닌가? 내가 용인으로 이사오던 해에 수술 받았으니!?
정빈이 기억이 맞아.
형제님! 야곱의 우물을 구입하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이곳 게시판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 힘든 투병생활을 두 분이 힘이 되시면서 극복하시는 진정한 사랑이 감동스럽습니다. 그 토록 험난한 고난의 길을 밝은모습으로 걸어가시는 그 길 옆에서 힘찬 갈채를 보냅니다. 형제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