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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월 일본의 산동침략, 이른바 제남사건이 발생했을때 북벌군을 지휘했던 장개석은 제남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10년간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
이른바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즉 외적을 물리치기앞서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라는 것은 만주사변이래 서안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이 고수했던 방침입니다. 그의 이런 정책은 일본의 침략에는 미온적이면서 내전에만 광분하고 있다라며 동시기 좌파 지식인들과 여러 당파들, 특히 공산당에게 "친일 반민족적"이라고 극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대륙과 서구의 주된 시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죠.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적으로 중국이 분열되고 힘이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일본과 정면대결한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청일전쟁의 재현이 되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뻔하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즉, 장개석의 대일전략을 옳다, 그르다라고 이분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죠.
남경정부는 일본에 대해 타협을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 장개석이 주도하는 군부를 중심으로 일본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34년 10월 "외교논평"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다면 중국이 군사력으로 이길 수는 없어도 일본 역시 큰 피해를 입을 것이며 우리가 내지로 후퇴하면서 지구전을 펼친다면 그들은 기껏해야 철도와 항구가 있는 일부 도시에 불과할 것"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일본의 화북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는 36년 7월 국민당 제5기 2중전당대회에서도 "가능하다면 평화를 추구하겠지만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침범하는 것은 절대 용인할 수 없으며 영토를 침해한 어떤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영토를 침해하는 어떤 협정도 맺지 않을 것이다"라며 매우 강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항일의 의지가 있었던 것인가, 아닌가. 취약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 "북벌"을 외쳤던 효종처럼 단지 자신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한낱 허울좋은 명분은 아니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중일전쟁직전까지 그가 주도했던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전반적인 국가전략이 어떠했는가, 어떤 방향을 추구했으며 실제로 얼마나 실행되었는지, 또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벌이 끝난후 당면한 문제는 중국의 부흥이었습니다. 일본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청말이래 오랜 전란으로 피폐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력한 통치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벌 직후에도 남경정부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곳은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3개성에 불과했고 이조차도 지방군벌들과 공산군의 알박기로 인해 나눠먹기식이 되어버려 그다지 확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남경정부로서는 그무엇보다 먼저 여전히 분열된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확립하여 경제 건설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 선결과제였죠.
이에 대해 장개석은 때로는 군사력을, 때로는 타협이라는 "사탕과 채찍"을 적절히 선택함으로서 점차적으로 군벌들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매우 능숙하고 고단수적인 정치적 역량을 보여줍니다.(그는 확실히 이런 쪽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원대전에서 승리함으로서 풍옥상, 이종인, 염석산 등 여러 대군벌들을 몰락시키거나 세력을 축소시킨 그는 국민당내 대표적인 분파세력인 왕정위와는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서 타협합니다.
그 다음으로 한창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중인 공산군에게 눈을 돌려 5차례에 걸친 "초공전"을 추진합니다. 4차례의 작전에서 공산군의 강력한 저항과 일본의 침략으로 실패하였으나, 33년 9월 대중 유화론자인 히로다 고키가 외상이 된후 일시적으로나마 일본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5번째 작전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고 10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포위망을 형성합니다.(실제로는 30만) 결국 공산군은 근거지를 버리고 이른바 "대장정"이라 부르는, 2만 6천리의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되죠.
웨이웨이의 장편소설 "대장정"에서는 "모택동 가라사대, 대장정을 통해 홍군의 위대한 진리를 2억 인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라며 온갖 미사려구를 붙여 미화하지만 실제로는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방랑의 길이었으며 온갖 고난끝에 연안에 도착한 이들은 처음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 패잔병들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960983
이로서 화중, 화남에서 공산군의 세력 대부분을 제거하였고 또 이들을 추격하면서 "초공"을 명분으로 사천, 운남, 귀주 등 남경정부의 지배력이 미약한 서부지역에 대해서도 중앙군과 정부요원들을 진입시켜 많은 지방 소군벌들을 흡수하거나 제거함으로서 지배력을 강화합니다. 류상이나 유문휘, 용운, 서북삼마같이 한때는 자신의 왕국에서 무서울 것없이 세도를 누렸던 군벌들도(지방군벌이라해도 영토가 한반도보다 더 크니) 장개석앞에서는 시키는대로 공산군과의 싸움에 군대와 자금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대장정"당시 공산군 주력부대의 이동 경로. 이들을 섬서성으로 쫓아버림으로서 화중, 화남에서 공산군의 세력은 거의 소멸하였고 또한 이들을 추격하면서 서부 변방지역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남경정부 통치의 근거지는 동부지역이었지만 항전과정에서 이지역을 상실하고 서쪽으로 쫓겨가면서도 몰락하거나 여러개로 분열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이야기 중국사, 김희영
결과적으로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군의 일부가 섬서성 연안으로 도주함으로서 초공전은 결과적으로 1% 부족한 것이 되었지만 이런 점에서 장개석은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나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36년 7월에 장개석의 독재강화와 광서성으로의 지배권 확대에 반발한 광서파가 "제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지만 평화적으로 무마됨으로서 더이상 장개석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없게 됩니다.
이런 노력으로 정치적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실현하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그의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이며 포용력없는 태도는 많은 반발을 낳았습니다. 장개석은 평생을 "포용력, 그게 먹는건가요? 우걱우걱"했던 양반이기도 했지만, 타협은 지 불리할때나 일시적으로 써먹는 수단으로만 활용하여 다른 당파들을 끌어안지 못했습니다. 주변은 소수의 측근들뿐이었고 죄다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특히 장개석은 공공연히 "일본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라고 말했음에도 재야의 배일운동에 대해서는 "일본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여 "친일"이라는 비난을 자초하였습니다. 이런 경직되고 융통성이 결여된 사고는 장개석 생애에 있어 최대의 단점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정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장개석 정권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채 중일전쟁에서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으며 이후 국공내전에서 몰락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배일운동이었던 12.9운동. 일본의 화북침략이 노골화되자 35년 12월 9일 북평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배일운동이 일어났는데 장개석은 이를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으로 탄압함으로서 국민들의 신뢰를 실추시키고 대내외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게 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onday77a77/120162119420
남경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기존의 연구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후진적, 봉건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실패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민당 4대 가문을 중심으로 한 관료자본주의"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모택동은 물론이고,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의 로이드 이스트만 역시 군부 주도에 의한 독재였으며 경제정책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대해, 한편으로 근대 중국의 다양성과 자생적인 발전 움직임을 무시한채 이분법적인 논리로 부정적으로 폄하하며 한쪽면만을 볼뿐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당시 남경정부는 북벌이 끝난 직후부터 손문의 삼민주의를 원칙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경제 건설을 목표로 정하고
관세 자주권의 회복을 비롯해 재정, 금융, 교통, 농업, 공업, 교육, 문화, 행정 등 전반적인 국가 발전과 경제 부흥을 위한 다양한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에 따라 31년 5월 장개석의 처남이자 재정부장이었던 송자문의 "경제건설6개년계획"이나, "중국공업화 10개년 계획", 국제연맹의 "대중기술원조 10개년계획" 등 거창한 계획이 수립되죠. 33년에는 "실업4년계획"을 수립하여 농업과 광공업에 대한 대외경쟁력 확보와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추구합니다. 이를 위해 총 16억원의 예산을 투입키로 하는데 이중에 광공업이 4.9억원, 농림건설에 11.3억원이 배정됩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 경제라는 것과 새마을운동과 유사한 "향촌건설운동"이나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는 것, 북한식 자력갱생이 아니라 구미열강의 원조를 적극 유치했다는 점에서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계획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특히 경제발전을 위해서 교통망의 정비가 선결과제라는 점에서 철도와 도로의 확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남경정부의 경제정책은 그 거창한 계획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30년대 초반 대내, 대외적인 악재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함으로서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년대 반짝 호황을 누렸던 중국 농업은 경제공황의 여파에다 농산물의 가격 하락, 30년대 초반 "헬게이트"수준으로 반복된 극심한 재난재해로 거의 파멸직전까지 몰리고 전국이 기아로 허덕이죠. 33년 한해만 해도 황하와 양자강의 범람과 홍수, 가뭄으로 인한 전국의 피해액은 379백만원에 달했으며 이는 국가 예산의 거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여기다 만주사변으로 만주전역을 상실한 것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이었는데, 본토에서 만주로 수송되는 물자가 31년 13억 9,600만원에서 32년에는 7억 7,700만으로 급감했고 이때문에 남경정부의 세수도 타격을 받아 특히 주요 세원인 관세가 31년 3억6970만원에서 32년에 3억2550만원으로 감소합니다. 일본의 침략이 점차 화북으로 확대되면서 경제적 타격은 더욱 늘어나죠.
34년에는 미국이 은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이때문에 중국이 가진 은의 1/3이 미국으로 유출되죠. 당시 은 본위제를 하고 있던 중국으로서는 이또한 치명타였는데 중국 금융의 중심지인 상해가 거의 붕괴 위기에 직면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는 막대한 채무비와 군비의 부담으로 안정적인 경제건설에 투입한 자금과 자원이 매우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남경정부의 재정에서 군비와 채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이상이었고 막상 경제건설에 투입할 수 있는 예산은 10%에 불과했는데 이조차도 대부분이 국방과 관련된 지출이었습니다. 즉 가장 중요한 재원마련에서 심각한 애로를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박정희정권처럼 막대한 원조를 제공해 주는 우호적인 이웃도 없었고 히틀러처럼 주변국에 대한 침략으로 재정난을 해결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오히려 침략을 당하는 쪽이니)
송자문은 군비를 감축시켜 균형재정을 유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내전의 반복과 일본의 침략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남경정부의 연간 군사비와 채무비의 지출 현황 >
※ 자료출처 : 남경국민정부의 경제건설정책 연구(1928~1937), 성균관대학교
이런 대내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경정부는 나름대로 민간자본에 대한 장려와 산업보호 및 수출입 증대, 구미열강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외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본격적으로 경제건설에 나서는 것은 초공전이 어느정도 마무리되는 34년 하반기부터였으며 "국방건설"을 제1순위에 놓습니다. 북벌이 거의 완료되는 28년 7월에는 청말이래 상실한 관세자주권 회복을 위해 미국을 시작으로 10개국과 관세 및 통상조약을 갱신했으며 30년 5월에 마지막으로 일본과도 체결합니다.
30년대 중독간의 교류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당시 장개석의 군사고문이었던 폰 젝트장군은 양국간의 무역협정 체결을 주도합니다. 당시 전략군수물자인 텡스텐과 안티몬은 당시 전세계 생산량의 60~70%를 중국이 차지할만큼 풍부했는데 이는 독일의 재무장에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34년 1월 24일 "공업산품상무공사"가 설립되어 독일과의 무역을 총괄하고, 34년 8월에는 중독 양국간 상호 교류조약을 체결해 독일은 군수용 정밀기계를 비롯한 군수산업에 필요한 기계설비와 1억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중국은 독일에게 텡스텐 등 각종 광물을 제공합니다. 이 차관의 차관의 90%는 무기와 탄약, 군수공장 설비 구입에 사용되었으며, 10%는 발전, 화공, 금속 등 중화학공장 설비를 구입합니다. 이런 독일과의 밀월은 38년에 와서 히틀러가 일본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서 고작 4년도 안되어 중단됩니다만, 그동안 독일이 제공한 군수설비는 중국의 중화학공업과 군수공장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독일제 최신 무기는 중국군의 근대화에 일조하였습니다.
이어서, 37년 2월에는 "중국경제건설5개년계획"이 통과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5년간 20억원을 투자하여 민생의 안정화와 함께 국방경제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사시를 대비한 전국 총동원체제를 추진합니다. 당시 침체일로를 겪던 경제는 36년말부터 점차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중국은 분명 부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공업생산력은 26년을 100으로 봤을때 31년 134.4, 36년에는 186.1으로 급성장하면서 연 평균 성장률은 6.7%에 달하였고 비록 여전히 경공업위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28년부터 36년 사이 전국에 2,826개의 공장이 신설됩니다. 전력생산에서도 26년에 456백만킬로와트에서 31년에 744백만킬로와트, 36년에는 1,724백만킬로와트로 증가하였고 전력소비량 역시 매년 급상승합니다. 대외무역에서도 동남아로의 수출 장려와 세계 경기 회복으로 전년 대비 15%이상 증가합니다. 화폐 개혁과 세제의 정비, 경기 회복에 따라 남경정부의 재정수입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28년에 4억3444만원에서 36년에는 11억4230만원으로 거의 3배 가까이 늘어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31년부터 중일전쟁직전인 36년까지 연간 GDP 성장률은 2.5%정도에 불과했고 인구 증가를 고려한다면 사실상 제로나 다름없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체 GDP의 60%이상을 차지하는 농업의 침체에다 만주의 상실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전체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로서 농촌 개혁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으나 농촌에 대한 투자가 미미함으로서 사실상 실패하고 맙니다. 이는 재원과 인재 부족때문이었죠. 단지 쌀의 품종 개량이나 대부업 등의 제한된 분야에서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둡니다.
또한, 정치적인 분열과 행정능력의 후진성으로 전체 GDP에서 국가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5%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중일전쟁기간에도 변화가 없었는데, 이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재정의 만성 적자는 해결할 도리가 없었으며 연 이율이 10%가 넘는 공채를 남발하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함으로서 악순환은 점점 심화됩니다.
더욱이 남경정부의 경제정책들은 적어도 향후 상당기간동안은 일본과의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중일전쟁이 발발함으로서 그동안의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됩니다. 비교적 내지라기 판단했던 호남과 강서지역까지 일본이 침략하자 건설중이던 많은 공장과 설비들을 포기하거나 더 서쪽으로 이동시켜야 했죠.
결국 남경정부의 경제정책은 대내외적인 악재와 "재원"의 부족으로 중국 경제의 취약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근대적 경제체제의 기초를 형성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어느정도 기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흔히 좌파측 시각에서 "관료자본주의"로 설명하는 것과 달리, 이 시기에는 국가에 의한 간섭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민간경제의 보호와 시장경제를 추구하였습니다. 소위 "4대 가문"이라 불리는 소수 관료들에 의한 경제의 독점화와 만성적 부패는 중일전쟁 말기에 와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음으로 남경정부의 군사력 정비의 노력은 어떠했는가.
군사력의 정비는 대일전을 대비해 가장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중국군은 내전과정에서 머릿수만 잔뜩 늘어나 북벌 직후인 29년을 기준으로 4개 집단군과 장학량의 동북군, 사천, 청해 등의 지방군벌군까지 총 84개군 272개 사단, 18개 독립여단, 21개 독립단(연대)에 달했고(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로 인한 연간 유지비용만 5억 4,600만원에 달하여 중국 전체(중앙,지방 합쳐)의 1년 세수인 5억원을 훨씬 상회하였습니다. 그러니 정부로서는 이 밥벌레들이 요구하는 군비의 일부밖에 지불할 수 없었고, 군대의 월급은 당연히 몇달씩 체불되기 일쑤였죠. 여기다 지휘계통은 물론 편제와 정원도 제각각인데다 단대호만 있을뿐 유령부대도 태반이고, 무기, 훈련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머릿수만 세계 최대일뿐, 군대로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갖출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장개석은 북벌 직후부터 군에 대한 대폭적인 구조조정과 여기서 나오는 실업자들을 산업노동자로 돌릴 것을 제안하는 등 나름대로 군의 근대화를 추진해 나갑니다. 물론 여기에 극렬 저항하는 신군벌들과 지방세력들과의 여러차례 반장전쟁을 거치는 등 많은 애로가 있었으나 30년대 전반에 걸친 장개석의 노력은 중국군의 근대화에 상당한 성과를 이룩합니다.
우선 지휘계통의 일원화와 중앙으로의 집중을 위해 1932년 3월 1일 국민정부 산하 군사위원회를 설치합니다. 이 군사위원회는 모든 군정과 군령을 통합한 군사최고기관으로서, 우리로 치면 유사시 대통령이 주관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죠.(약간 차이가 있는 것이 당시 장개석은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국가원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군사수반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가원수나 다름없었으니) 물론 군사위원장은 장개석이었고 염석산, 이종인, 풍옥상, 장학량 등 주요 군지휘관 7명을 위원으로 임명합니다. 이 군사위원회의 권한과 조직은 지속 확대되어 37년 7월 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군사업무외에 각 정부부처를 비롯한 행정분야까지 망라하게 되며 사실상 중국군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군사력 현대화에서 독일 군사고문단의 역할은 중국의 근대화와 군사력 정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북벌이 끝난 직후인 28년 11월 막스바이어대령을 시작으로 독일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중-독간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접근시킵니다. 그 중에서도 베르사유조약으로 망가진 독일군에 대해 재무장의 기초를 닦음으로서 "독일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던 폰 젝트대장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34년 5월에 중국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장개석에게 300개 사단에 달하는 비대한 중국군을 60개 사단으로 축소하는 대신 내실과 현대화를 꾀하고 이를 위해 우선 1개 교도사단의 창설을 건의했으며, 중국이 자체적인 무기생산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독일과 무역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합니다.
< 역대 독일 군사고문단장 >
이름 계급 재직기간 비고 막스 바우어 대령 28. 11 ~ 29. 4 헤르만 크리벨 중령 29. 4 ~ 30. 4 조지 베첼 중장 30. 4 ~ 34. 5 한스 폰 젝트 대장 34. 5 ~ 35. 3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대장 35. 3 ~ 38. 7
또한, 장개석은 젝트의 군사력 정비 건의에 따라 32년 5월 12일 군사위원회 명의로 "육군師 신편제"라는 이름의 군 개편안을 통과합니다.
주요내용은 전군을 48개군 96개 사단으로 재편성하고 사단을 2개여단 4개 연대체제(4각편제)로 개편하며, 군 사령관이 사단장을 겸임치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동시기 일본식 편제를 따라한 것으로, 서구에서 1차대전을 거치며 "3각 편제"라 하여 1개 사단을 3개 보병연대, 1개 포병연대로 개편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일본군도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3각 편제로 바꾸죠) 어차피 당시 중국의 재정 여건상 대규모 포병 확충이 어려운지라 일종의 과도기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군에는 심지어 6개 연대 이상의 규모로 구성된 사단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어서 34년 12월 장개석이 친히 "중앙군 60개사 정군계획"을 수립합니다.(당시 대장정중이던 모택동의 공산군을 쫓고 있을때였는데 짜투리시간에 이런 것도 하고 있었으니 정력만큼은 대단하신 양반인듯..) 중앙군과 동북군을 우선으로 3~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4각 편제로 개편하여 전군으로 확대해 나가며, 우선 공산군 토벌에 투입되지 않은 부대들을 대상으로 무한과 남창에서 재편 및 훈련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모본부에서는 장개석이 수립한 방침에 따라 세부계획을 작성하여 35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첫째로, 그동안 뒤죽박죽이던 육군 편제를 "갑", "을" 2개종으로 통일토록 하였는데 "갑"종사단은 현재의 상비사단에 해당하고 "을"종사단은 향토사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개석은 중앙군 60개사단, 지방군 60개사단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이었죠. 300개가 넘는 사단을 축소하여 해산되어 남는 인원을 다른 부대에 넣어 정수를 최대한 맞추도록 합니다. 어떤 사단은 1만이 넘고 어떤 사단은 연대급도 안되는 2천미만도 있으니 이런 식으로 편성을 충실히 하려는 것이죠. 특히 포병, 기병, 공병 등 특수병종들을 중앙으로 일괄 귀속시키고 각 부대에 흩어져 있던 포병전력을 사단 직속 포병대대로 집중시키고 박격포는 각 보병대대에 별도의 박격포 소대로 분할 배속하여 사단 화력을 증강시킵니다.
"계획상" 중국 육군 개편사의 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군 대일군사전략 변화, 기세찬교수, 국방대학교)
보병 |
포병 |
공병 |
치중병 |
기타 |
인원수/말 |
2개 여단 4개 연대 12개 대대 |
1개 연대 3개 대대 |
1개 대대 3개 중대 |
1개 대대 2개 중대 |
위생대, 특무중대, 화학소대, 수색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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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37년까지도 이 편제대로 정원을 제대로 채운 부대는 하나도 없었고 중앙직계군조차도 1개사단 인원은 많아야 8천에서 1만정도 였습니다.
젝트 다음으로 온 폰 팔켄하우젠대장은 중국군의 개혁과 근대화, 병력이동을 위한 철도, 도로 등 수송로 정비, 공군 강화를 주장합니다. 특히 장강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장강 연안에 철도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여 독일에 자재와 차관을 요청하여 공사를 진행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상해-남경에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팔켄하우젠은 공산당 토벌에 대해서도 제4차와 제5차 초공전에서 선무활동과 토치카전술을 제안하여 결국 모택동 일당들이 영토를 버리고 섬서성의 산간오지로 쫓겨감으로서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냅니다.
또한 팔켄하우젠의 주도로 육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이에 필요한 독일제 신식장비의 도착이 지연되자 일단 있는 장비와 무기로 개편하고 나중에 장비가 도입되는대로 보충키로 합니다. 이로서 36년 말까지 총 20개사단이 "개편사"로 재편되었고 37년 7월 노구교사변까지 추가로 10개 사단이 재편됩니다.
그러나 대일개전까지 계획대로 독일식 최신 장비를 갖출 수 있었던 부대는 중앙군중에서도 장개석 직계에 속하는 8개 사단(제1사단, 제3사단, 제6사단, 제9사단, 제14사단, 제36사단, 제87사단, 제88사단)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포병전력은 당초계획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연대였지만 실제로는 1개 대대(산포 16문)를 갖추는 것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이조차도 갖추지 못합니다.
팔켄하우젠이 키워낸 독일식 사단. 독일로부터 수입한 M35년형 철모를 쓰고 있어 얼핏보면 영화 "마이웨이"에서 장동건의 모습과도 비슷하죠.(얼굴이 비슷하다는 얘기가 아니고 차림새가) 장개석은 이 철모를 독일로부터 총 35만개를 수입하여 중앙군에게 보급하였는데, 중일전쟁을 거쳐 국공내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이것을 노획한 공산군은 50년대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nitzz/140038028395
또 서안, 남창, 금릉 등의 군수공장과 화약공장의 생산규모를 확충하여 무기, 탄약 생산을 증대합니다. 중국 특유의 짝퉁정신을 한껏 발휘하여 독일제 소총(Gew98, Kar98k), 24형 맥심중기관총, 체코 ZB26 경기관총 등을 복제하여 자체 생산합니다. 또 방독면, 장갑차량, 박격포 등도 자체 생산하고 향후 이를 확대해 장갑열차, 중포, 통신장비, 차량 등에 대한 생산공장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역시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본과의 개전으로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의 군수 능력은 단지 박격포와 기관총, 소총 등 경화기와 탄약을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것도 기껏해야 중국군의 수요의 일부를 충족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과의 격차는 여전히 너무나 컸으며, 중앙군 30개 개편사를 제외하고 약 300개에 달하는 사단들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그나마 가장 나은 독일식 사단조차도 일본 보병사단에 비한다면 화력과 기동력, 인원수에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응흠은 일본 상비사단(갑종사단)은 개편사 4개 사단이상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평시 일본의 17개 상비사단에 대응하기 위해서 중국은 적어도 68개 개편사가 필요하며, 전시에는 무려 200개이상의 개편사가 필요했으나 실제로는 30개 사단에 불과했고 그나마 최신 장비를 갖춘 사단은 8개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었죠. 여기다 해공군과 포병화력의 열세를 생각한다면 그 격차는 훨씬 더 큰 것이었죠.
※ 자료출처 : 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군 대일군사전략 변화, 기세찬교수, 국방대학교
해공군은 육군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처지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상해의 강남조선소, 복주의 마미조선소, 하문조선소 이렇게 3개의 조선소가 있었는데 모두 청말 양무운동시절에 만들어진 낡은 조선소들이었습니다.
또 해군력은 주로 청말에 수입된 노후함을 중심으로 총 55척에 총배수량 3만 9,610톤, 장교 78명, 사병 81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청말 동아시아 최대의 군함이었던 정원급 2척(7,430톤)을 비롯해 함선 78척, 총배수량 8만3,900톤에 달했던 북양해군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며 제해권은 고사하고 연해작전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이는 군벌내전이라는 특수성상 해군에 대한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이죠. 장작림만이 오패부와의 전쟁 과정에서 해군에 어느정도 투자를 했을 뿐입니다.
북벌이 끝나고 나서야 남경정부 산하 해군부는 해군의 재건을 목표로 해군 건설 6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자체 조선소 건설 및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수입을 추진합니다. 일본에서 경순양함 "정해"를 수입하여 짝퉁판인 "평해"를 강남조선소에서 건조합니다. 또 독일에서 소형 잠수함을 수입하는 등 37년 7월 개전 당시 중국해군은 5개 함대 120척, 배수량 6만여톤으로 증가됩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다 예산마저 군사비의 1%에 불과한지라(총액 2억원중 육군이 1억 2천만원, 해군이 229만원, 공군이 7천만원, 참고로 37년 당시 정부세수의 약 55%가 국방비) 2척의 경순양함(이라 쓰고 구축함만도 못하다고 읽는다)과 몇몇 함을 제외하고는 매우 노후되고 소형함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본해군에 비하면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인지라 개전과 동시에 단숨에 일소됩니다. 그러나 포함과 어뢰정 등 일부 잔존함으로 양자강 상류와 중류에서 기뢰를 살포하고 일본 강상 수송함대를 습격하는 등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죠.
국민혁명군 해군의 기함이었던 배수량 2500톤의 "영해(寧海)"급 경순양함. 만주사변발발전에 장개석이 일본에 주문하여 32년 7월에 준공됩니다. 이후 장개석은 동형함 "평해"를 상해의 강남조선소에서 건조하여 36년 6월에 준공되는데 비록 인스턴트 짝퉁 군함이라 해도 이미 그 정도의 건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죠.
※ 사진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eafight&no=6365
삼군중에 가장 눈부신 발전을 한 것은 공군이었습니다. 30년에 이미 육군항공대에서 공군을 독립시켰고 군과 민간 항공산업 발전을 적극 추진합니다. 특히 1차 상해사변에서 장개석을 비롯한 군 수뇌부들은 일본군의 공중폭격을 보면서 근대전에서 제공권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접 눈으로 깨닫죠.
공군의 육성은 상해사변이 끝난 직후부터 추진되었는데 32년 9월에 장개석은 고작 40여기의 잡다한 구식기체로 구성된 중국 공군을 일본에 필적하도록 육성하기 위해 우선 1년안에 300대로 확장할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에서 항공기 전문가와 전투기를 대량으로 구매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군벌들이 몇대씩 소규모로 보유하고 있던 것을 모두 중앙으로 집중시킵니다.
34년 7월에는 군사위원회 직속으로 항공위원회를 설립하고 장개석이 직접 위원장을 맡습니다. 또 와이프 송미령이 비서장을 맡아 중국 공군의 육성에 적극 활약합니다. 미정부에 공군자문을 요청하였고 나중에 "플라잉 타이거즈"로 유명해지는 퇴역군인 센놀트대위를 미정부에 요청해 군사고문으로 초빙하여 중국에 그가 도착하자 송미령이 친히 마중까지 나가죠. 나중에 스틸웰때랑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인듯....(똑같이 생고생했지만 잘나가던 인생 종친 것이 스틸웰이고 막장인생에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것이 센놀트이죠. 사람 인생 모른다는...ㅋㅋ)
34년부터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 등과 합작하여 항공기 제조창(상해, 항주, 남창 등)과 수리공장(남경, 남창, 낙양, 광주, 항주, 중경 등 총 6개소)을 건설합니다. 항공기 제조창에서는 라이센스 생산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성능도 상당히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항주에 미국인 교관을 초빙해 중앙항공학교를 설립하였고 정비사 양성을 위해서 남창에 항공기계학교도 설립됩니다. 2차 양광사변 이후에는 당시 최대 규모였던 광서공군이 중앙에 편입됩니다.
또 37년 5월에는 전국을 6개 공군구로 나누었는데, 12개 주요 비행장에 262개 비행장을 보유했고 3개 폭격대대, 2개 정찰대대, 3개 구축대대, 1개 공격대대 등 9개 대대 26개 중대가 있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사령부 직속으로 4개 수송대가 있었습니다. 항공기는 숫적으로 500~600대에 달했으나 상당수가 너무 노후된데다 가동률도 절반이하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공군은 월등히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개전초반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작전을 수행해 나갔으며, 소련의 대규모 원조를 얻어 피해를 회복하고 숫적으로도 700여대까지 확대됩니다.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로 도색된 독일제 He.111 폭격기. 상해사변과 열하사변에서 일본의 공중폭격에 호되게 당했던 장개석의 주도로 적극적으로 공군력을 확장합니다. 미제 커티스호크II, 프랑스제 드와텡 D.510, 이탈리아제 CR.32, SM.79, 소련제 I-15, I-16, SB-2 폭격기 등 등 각국의 온갖 잡다한 기체가 뒤섞여 있었는데 마치 만화 에어리어88의 외인부대를 연상케 하죠.
※ 사진출처 :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num=162044
※ 손문 시절 매우 밀접했던 양국은 27년 12월 14일 장개석 정권의 일방적 단교로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으나 30년대에 오면서 다시 관계가 차츰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소련은 32년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에 실패하자 중-소 양국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한다는 동일한 목적하에 급속도로 관계가 가까워졌으며 중일전쟁 발발직후인 37년 8월 21일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합니다. 반면 중국으로서는 신뢰하고 있던 미, 영, 프 등 서구 열강들이 예상외로 중립을 고수하고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에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소련은 군사고문단의 파견과 함께 전투기 1천대와 야포, 전차, 20개 보병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군수물자 등 약 2억 5천만달러의 차관과 물품을 제공합니다. 중국은 최대 군수물자 수입국이었던 독일과의 관계가 38년초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으나 소련의 원조를 통해 개전초 큰 피해를 입었던 중국군을 재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노몬한전투이후 41년 4월 13일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였고 중국은 전쟁 수행에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41년 5월부터 미국의 랜드리스 정책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으나 곧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인도차이나, 버마, 홍콩이 연달아 함락되어 중국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전쟁 막바지에 와서야 겨우 숨통이 열리게 됩니다.
중일전쟁 초반 중국공군의 주력 기체였던 소련제 I-16. 그 성능은 당시 일본 주력전투기이자 복엽기였던 95식 전투기를 능가했으며 이 덕분에 나중에 제로기가 등장하고 일본이 압도적인 항공력을 동원해 백-1호작전(오지항공공격작전)으로 중국공군을 거의 괴멸시킬때까지 중국 상공의 제공권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37년말까지 쌍방의 피해는 일본기 129기에 중국기 144기로 거의 호각을 나타냈습니다. 라이프 2차대전사에 보면 중국공군이 서류상으로는 500여대이지만 실제로는 140여대에 불과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상당히 축소된 것이라는 말이 정설입니다. 또한, 센놀트가 중국공군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성토하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과장 왜곡된 것이며 실제로는 중국공군의 파일럿들이 매우 용감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중국공군은 열세한 전력으로 일본군과 잘 싸웠으며 태평양전쟁 초반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가 일본군들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났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장개석의 국가전략은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되었으며 중일전쟁 직전인 36년 말에 오면 어느정도 가시적인 성과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내, 대외적인 불리한 여건때문으로 많은 한계와 문제점 역시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지와 노력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략적 일관성없이 자원과 예산을 마구잡이로 낭비했던 무솔리니 정권이나 의지만 앞섰을뿐 무지함과 독선적이었던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는 대조되는 것이죠.
36년부터 경제는 점차 회복세로 돌아섰으며 매년 급등하던 물가도 35년 11월 화폐개혁이후 안정세를 찾았고 36년~37년의 풍작으로 농촌 경제도 어느정도 안정이 됩니다. 이는 외부적으로 세계 경기의 회복 덕분에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내전의 종식과 국가 통제력 강화에 따른 정치적 안정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성장과 재정의 확충으로 군사적으로도 비약적으로 강화됨으로서 어느 정도나마 일본에 대항할 힘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재정의 열악함으로 경제적 예속성은 일정부분 불가피했지만 단기서정권처럼 차관을 얻기 위해 이권을 파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외교적으로도 적극적인 노력으로 관세자주권을 불완전하나마 회복하고 열강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막대한 원조를 받아 전쟁을 지속하게 되죠. 반면, 일본은 점점 고립되죠.
따라서 서안사변직전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앞으로 5년에서 7년의 시간만 있다면 일본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라고 적을만큼 자신감을 보입니다. 문제는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말과 달리 일본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시간은 촉박해졌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2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노력은 큰 결실을 맺을 수 없었죠. 전쟁이 더 늦게 일어났을수록 중국은 더 효율적으로 싸웠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일본은 "3개월이면 끝난다"라고 큰소리쳤으나 전쟁은 무려 8년을 끌게 되었고 일본은 결국 몰락하였습니다.
즉, 장개석 정권의 항일전략은 결코 항일을 외치는 재야의 압력과 서안사변에 의한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양보와 타협을 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지구전략"의 수단으로 볼 수 있으며 침략의 강도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대일전략 역시 변화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들을 설득하기보다 독선적인 자세로 탄압함으로서 비난을 자초한 것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남경정부가 추진했던 경제건설 등 각종 부흥정책은 중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임에도 여전히 연구와 자료가 미진하고 많은 논란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특히 중국 근현대사가 이른바 "혁명사"나 "공산당사"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남경정부와 장개석정권에 대한 연구는 소외되고 왜곡되어 있죠. 근래에 와서 대륙을 중심으로 점차 재평가되는 반면 오히려 대만쪽은 장개석을 격하하는 경향입니다. 역시 역사란 전적으로 정치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같습니다.
첫댓글 음.....
확실히 장개석의 문제는 코스프레이네요. 그리고 아무리 잘할려고 애써도 코스프레 못하면 망한다고 해야하나요?
이점에서는 한국인 정치가들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의외로 장개석이 대국을 보는 능력은 좋았네요~ 부패하고 무능한 군벌의 우두머리라는 인식만 있었는데
종전까지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말만큼 준비하진 못한...
음.....역시 국방력은 과학 기술력과 산업력이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