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학 칼럼 신앙의 정절과 배도자의 타협
1. 양심과 율법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그러나 타락한 인간세계가 양심과 상식으로는 결코 살 수 없기에 인류에게 보편타당성의 기준이 되는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이다.
원시 부족이나 비 문명종족들은 성경이나 율법의 영향력을 전혀 접해 보지 못하였기에 그릇된 종교와 풍습에 의하여 양심은 함몰되고 상식과 윤리가 파괴된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놀라운 일은 어느 종족이든지 율법이나 복음의 영향력을 받은 곳에는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과 영혼의 가치가 비로소 그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교통사고를 방지하려고 교통법규를 만든 것 같이, 모든 계명과 율법은 오로지 사람을 존중케 하고 사람을 유익케 하려고 주신 것이다.
2. 새로운 율법의 적용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하려면 율법과 계명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계명과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죄에서 깨끗해지거나 거룩함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닿게 되는 것이며. 결국에는
" 나는 행함으로 깨끗해 질 수가 없습니다. 주여 구원하여 주소서! " 항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주님께서 " 이제야 알았느냐 그래서 내가 네 대신 죽어 네 죄를 다 청산한 것이다. 자! 내 손을 잡고 이리 올라오너라!" 하시며 십자가에서 손을 내미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 것이다.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아니고
인격 속에 도입하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복잡한 수학 문제는 그 문제에 맞는 공식을 적용해야 해답을 이끌어 내는 것 같이 사람이 의로워지려면 그 피 흘리신 속죄의 은총의 법칙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3. 보혈과 십자가의 법칙
인간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과 할 때 비로소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일회성으로 두 번 적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다음단계가 '십자가의 법칙' 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십자가는 날마다 시마다 죽는 날까지 내 안에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육체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죄의 소욕이 육체를 통하여 거듭 거듭 일어나서 영의 생각과 부딛치고 두 인격이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깨닿았다면 그는 비로소 거룩함으로 가는 기준점에 서게 된 것이며
바울 사도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심을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좆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음을 주목해야 하며, 십자가는 육체를 벋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생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4. 영의 생각과 육적인 선택.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살아남아서 더 많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명분과 합리성 때문에 로마 도성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도망하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할 때 “ 나는 네가 버리고 오는 로마의 어린 양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다시 죽으러 간다” 는 음성을 듣는다.
가롯유다의 배신도 그렇다.
돈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예수님과 로마 정부를 부딛치게 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동원하여 독립된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뿌리치지 못하여 선택한
배신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
5. 비굴한 타협과 배도자 김질.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사육신들은 거사가 발각되어 수양대군 앞에 잡혀와 죽음에 직면했다.
그들에게는 우리들처럼 내세의 약속도, 하나님의 보상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그들을 아까워하는 수양대군이 “ 한번만이라도 아니라고 말해라 그러면 살려주마.” 하고 간절히 애원했으나 굴복하거나 그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오직 명문과 신의와 양심 때문에 사지가 찢어지면서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그들과 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김질(성삼문과 함께 동문수학한 집현전의 학사)’이란 위인은 한 번의 변절로 부귀영화가 주어지기에, 의리와 신의도 팽개치고 비굴한 밀고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수양대군도 알고, 자기 자신도 아는 이 배반자라는 멍에는 죽는 날까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죽음보다 더한 가혹한 형벌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신사참배를 거절한 순교자와, 교회의 평안을 위하고 박해를 피한다는 나름대로의 명분을 내세워 타협한 카멜레온 같은 목사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교단의 진통 속에서 몇몇 동역자들이 이와같은 갈등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경이라는 분들이, 원로와 스승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지조나 신의를 팽개치고 그리스도의 제자답지 못한 비굴한 선택을 했다면 이는 우리시대의 비극이며 지각이 있는 동역자들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존경한다는 분이 있다면 너그러움이 아니라 동질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세상이 경천동지하더라도 양심과 지조를 지키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십자가에 대한 자기 극복의 신앙의 법칙을 실천하여 날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역 속에 역동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
안타까운 마음으로 필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