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뉴스앤죠이에서 퍼 왔습니다. 지난 11월17일 불의의 교통 사고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서 안타까움을 남기셨던 분의 글입니다.
///////////////////////////////////////////////////////////////////////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근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기형도
이 세상에서 목사로 산다는 것은
이 조그만 땅덩이에는 교회도 많지만 목사도 참 많다. 요즘에는 교회 보다 목사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목사 실업자가 생기기도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목사라는 직업이 인기 직종이었다. 서울 시내 한 여대에서 실시한 배우자 설문조사에서 목사가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 박사 실업자가 생겨나듯이 목사 실업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한 대형교회는 담임목사의 은퇴를 앞두고 교회를 아들에게 물러 주겠노라 교인들에게 선포했다고 한다. 대기업과 언론사 회장들이 회사를 자기 자식에게, 또 손자에게 물려주듯 교회도 이제 가업으로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 일부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교인들 몰래 교회를 이전하면서 금품이 오고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제 부모가 목사가 아니거나 돈이 없으면 목회를 할 수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이름 있는 큰 교회 목사는 타락한 정치인들과 조찬기도회를 하면서 명성을 얻고, 막대한 선거 자금을 풀어 총회 대표가 되어 교권을 잡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는 곧 세상 법보다 더 무서운 법이 되고, 힘이 되고, 권력이 되어 교회와 동료 목사를 억압하기도 한다.
오늘날 목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교회의 크기이다. 큰 교회 목사는 능력 있고 신령한 종이지만, 도시 변두리 작은 교회나 혹은 시골교회 목사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받지 못한 무능한 종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연실 교회 건물을 높이고 교인수 늘리기가 곧 목회의 전부가 되었다. 목사들은 의례 만나면 인사가 “교회 많이 부흥했어?”이다. 이 말은 교인이 많이 늘어 1년 헌금은 얼마고 교회 건축은 했는지 등등이 내포되어 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으면 다른 신도시나 아파트촌으로 교회를 이전하여 부흥에 다시 도전한다.
그래서 교회 부흥(키우기)에 모든 목회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교육도, 선교도, 봉사도, 설교도 교인 전도요 교회 건축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설교는 변질되어 교인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심어주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헌금을 받치게 하며, 어느덧 교회는 자본주의 축복과 자본주의 메시지로 채워진다.
교회는 자본주의화된 교회요, 목사는 ‘자본주의교’ 목사이며, 예수도 자본주의의 교주로 변질되었다. 지하다방, 1층 식당, 2층 이발소, 3층 당구장, 4층에 교회가 들어서면 교회 전도지는 당구장 개업 안내지와 함께 건물에 돌고, 삼겹살집 확장 개업 현수막은 심령대부흥회 현수막과 함께 가로수를 가린다.
나는 지금 목사가 되었다. 과연 이 시대, 이 땅에서 목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사로 사는 것이 예수께서 걸어가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일까? 교회 건물에 갇혀, 그 건물에 교인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목회가 참다운 목사의 일일까? 아, 진정 이 땅에서 목사가 된다는 것, 목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사는 꽃밭을 가꾸는 꽃밭지기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난 시인 기형도는 1987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 종로 2가 한 극장 안에서 요절했다. 그의 시들은 우울하고 쓸쓸하고 허무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게 만든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아주 우울한 시인의 유년시절, 마을에서 만난 목사를 이야기한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시인은 궁금했다. 목사가 교회에 혹은 기도원에 가 있지 않고, 왜 마을 철공소 앞에 서성이며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바라보고 있을까? 전도하러 왔나, 그럼 심방? 그러나 그의 손엔 전도지도, 성경책도 없다.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 양복을 입을리는 없고 흰 고무신에 색이 바랜 와이샤스를 입고 왔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구겨진 양철을 반듯하게 펴기 위해 뜨거운 대장간에서 땀흘리는 대장장이에게서 그 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일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가 되었던 예수, 그리고 세상에 눈으로 보이는 것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다만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어쩌면 그는 대장장이에게서 그 분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대장간에서 연실 땀흘리며 구겨진 철판을 펴고, 새로운 모양의 농기구들을 만드는 대장장이에게서 예수의 얼굴을 찾은 목사는, 잠시 후 자전거 짐틀에 성경책 대신 송판을 실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근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책 만한 송판은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목사는 여느 목사들처럼 교회 건물을 높이고 교인 전도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교인들이 마구 밟아 놓은 꽃밭을 가꾸는 일이 목회라 생각하고 있다. 목회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 같다. 다만 교인들이 마구 밟아 놓아 꺾인 꽃들이 가엾어 그저 꽃밭을 가꾸려는 것이다.
일주일 전에 목사는 둘째 아들을 잃었다. 그것은 목사가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제대로 목회를 하지 않은 탓이라고 교인들은 쑤근거렸고,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갔다. 그는 소리내어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손뼉을 치며 찬송하지도 않았다. 다만 꽃밭만을 가꾸었을 뿐. 그는 어느 날 학생회 소년들과 꽃밭을 가꾸다가 저녁 예배 시간에 늦은 적도 있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건물 안에 갇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찬송과 설교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망가진 꽃밭을 가꾸고 상처난 꽃을 세우는,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귀에 들리는 기도, 눈에 보이는 찬송, 형식화된 예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망가트린 꽃밭을 가꾸는 일이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처럼 보이기 위해 기도하며 찬송하는 예배 보다 어쩌면 교회 건물 밖에 꽃밭에서 꺾인 꽃대를 세우고, 흙을 북돋으며 물 한 모금 건네주는 그 자리에 계실지 모른다. 그리고 목회는 형식화되고 제도화되며, 교리화되고 교권화된 교회 건물보다는 아무런 욕심 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한 송이 이름 없는 꽃을 가꾸고, 그 곳에서 그 분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인지 모른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비로소 그가 깨달은 예수의 가르침을 알았다. 예수는 성경이라는 문자에 갇혀 있지 않으며, 교회 건물에도 갇혀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 한가운데, 곧 일상의 생활 속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 아, 이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목회인가. 밥 한 사발을 서로 나누는 밥상, 서로 땀 닦아주며 일하는 일터, 이 모든 것이 교회요, 목회의 자리라는 깨달음. 이 얼마나 눈 확! 뜨게 하는 일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교회 건물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웃과 함께 몸비비고 살아가는 생활에 밑줄을 그으며 사십시오. 교회나 성경, 혹은 목사의 설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 일터, 집, 농토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았고, 그의 목회는 곧 삶이며 생활이었다. 그의 목회는 사업도, 경영도 아니었다. 그의 목회는 삶 그 자체, 예수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말이 익숙해진 교인들은 쑤근거렸다. 율법도 폐하고, 교권도 무시하고, 성전도 무시하는 저 목사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그들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것처럼, 꽃밭을 가꾸던 목사도 마을을 떠나야 했다.
현대 교회와 천막 교회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다하지만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다른 신을 만들어 놓고 그를 숭배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요청했던 것처럼(출 32:1-5), 물질화 되고 이기적이며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교인들이 그들에게 맞는 새로운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자 목사들은 아론처럼 아내와 아들딸의 금귀고리를 교인들에게 가져오게 하여 하느님 대신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가 섬길 새로운 신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높이 들어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내 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현대 교회 목사들은 “자 교우들이여, 여기 여러분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맘모스 교회가,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면 복을 주시는 물신의 십자가 복방망이가 여러분들을 풍요와 안락이 넘치는 자본주의의 낙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라고 외친다.
예수가 다시 오신다면, 2000년 전 그 날보다 더 가혹한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을 정화하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교회라는 이름의 건물을 세우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언제나 달님은 달동네와 친하다. 어두운 천막 교회에 화려한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보다 달빛과 별빛으로 은은하게 밝힌다. 그러나 달동네는 쓸쓸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어쩌면 달동네 천막 교회는 실패한 자들이 모인 곳이며, 그 분의 은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빨리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달동네 아래 화려한 맘모스신을 섬기는 현대교회보다 달동네 천막교회에 더 가깝게 계시다.
우리가 진정 믿고 신앙하는 하나님은 교리나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보다는,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하루 하루의 무거운 삶, 생활에 밑줄을 그으며, 그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가려는 달동네 천막 교회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목사는 천천히 동네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는 다음 주에 마을을 떠나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주님의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예수는 오늘 교회를 떠나야 한다.
낭만틱하고 휴머니티한 글 속에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갖게 하기보다는 작가의 주관과 감성에 따른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음을 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속의 목사님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지 못하고...사춘기 소년같은 모습이 감지된다고나 할까요?
첫댓글 여기 등장하는 교인들 =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 역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
목운님^^* 오랫만에 닉네임을 보게 됩니다. 쌍둥이는 잘 크고 있죠? 하시는 일은 잘되시나 모르겠습니다. 다들 불경기라고 죽는 소립니다만 하시는 일이 형통하시길 바랍니다^^*
아론의 금송아지..... 제도주의, 교권주의, 맘몬, 성공제일주의, 교회당의 대형화 물량화, 등 여러가지로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1세로 요절한 작가에 대한 애석한 마음을 가지면서... 작가가 본 목사와 동네사람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작가는 자기 눈에 비추인데로 설명하고 느낌이 오는데로 설명할뿐,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없는 것이 흠인 것 같습니다
낭만틱하고 휴머니티한 글 속에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갖게 하기보다는 작가의 주관과 감성에 따른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음을 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속의 목사님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지 못하고...사춘기 소년같은 모습이 감지된다고나 할까요?
목사에 대한 소소한 연민으로 인해 마을사람(교인)들을 일괄 십자가에 못박는 백성쯤으로 치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형평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냥 작품으로 감성으로 봐야 할 글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목운님께 감사드리며....
와 향기님 평론 실력 짱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