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38선 이남에는 약 300만채의 주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05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주택은 1250만채로 4배 이상 늘었다. 숫자만큼이나 국내 주거 문화도 빠르게 변했다. 초가집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고, '아파트'가 우리나라의 주택을 대표하고 있다. 아파트는 이제 전체 주택의 절반을 넘는다.
우리나라에 아파트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1930년. 서울 회현동에 일본 기업인을 위한 관사로 지은 3층짜리 '미쿠니(三國)아파트'였다.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식 아파트는 그로부터 30년쯤 더 지나서야 탄생했다.
전후(戰後) 복구가 한창이던 1958년 11월. "서울 한복판에 명물이 등장했다"며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 옆 언덕에 지은 '종암아파트'가 그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아파트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낙성식(落成式) 축사에서 "이렇게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이 종암아파트에 있습니다.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입니다"라고 감격했다.
▲ 한국산(産) 첫 아파트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종암아파트는 국내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를 집안에 들여놨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아침마다 배를 움켜쥐고 공용 화장실 앞에 줄을 서야 했던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종암아파트는 방 2칸에 거실, 주방, 창고가 있고 발코니까지 딸린 고급 주택이었다. 당시 예술인과 정치인, 교수 같은 상류층이 주로 입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암아파트는 막상 분양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높은 곳에서 자면 고공병에 걸린다'며 기피했던 탓이다. 이 아파트는 1995년 11월 재건축돼 선경아파트가 들어섰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주택난 해소를 위해 주택공사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지시했다. 이때 탄생한 게 바로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6층에 연탄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췄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역에 보급된 단지형 아파트의 효시"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62년 말 입주가 시작됐을 때 분양률은 10%에 그쳤다. 당시 월평균 소득 6600원이었던 도시 근로자에게 월세 3500원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대학교수·연예인 등이 입주하면서 인식이 달라졌고, 2년 뒤에는 프리미엄까지 붙었다. 1968년에는 종로~퇴계로 사이의 세운상가에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의 진화는 끝없이 이뤄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엔 IT(정보기술)와 접목된 '사이버 아파트' 시대가 열렸고, 2000년대 들어선 미국뉴욕맨해튼에서나 볼 수 있던 30층 이상 초고층 아파트가 전국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