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간을 이룬 사대부 양반들이 그 양반됨을 명예로 만들기 위해 지켜야할 것이 한마디로 압축된 말이 있는데 바로 -봉제사접빈객 - 입니다 조상의 제사를 모셔 그 은덕을 기리고 또 조상의 영예를 널리 알리는 것이 양반의 첫 번째 의무로 접빈객 앞에 있습니다 즉 죽은 조상을 모시는 것이 산 사람을 접대하는것 보다 앞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종부된 여인은 가세의 빈곤을 가릴것 없이 일 년이면 열서너번 이상 닥치는 제사를 목숨을 걸고 치루어내어야 합니다 어느 종가의 종부가 제삿날 시루에 떡을 쪘는데 어쩌자고 떡이 설어서 먹지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불경하고 조상의 제사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종부는 그만 문설주에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맙니다 그후 그 종가에서는 시루떡을 젯상에 올리지 않는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는 것은 제사의 엄중함을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이런 제사를 일반 사대부들은 사대봉사라 하여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어지간한 양반들은 사대봉사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으니 심하면 한 달에 두세번 제사를 지낼수도 있었지요 사대가 지나면 매안이라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내려 땅에 묻어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신위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불천위입니다 양반 집안에 불천위 하나 없으면 무슨 양반이냐고 말할만큼 이 불천위는 그 가문의 위상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대체 불천위란 무엇일까요? 나라에서 그 조상의 은공이나 충성 효와 덕행을 기려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한 신위를 불천위라고 합니다 불천위가 되기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천위가 되는 방법이 나라에서 내리는 것외에 길이 없었을까요?
불천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국불천위 향불천위 사불천위 . 이렇게 나뉘어 집니다 국불천위는 나라에서 내린 것이고 향불천위는 그 고을의 유림들이 결정하고 정하는 것이며 사불천위는 당사자의 가문내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국불천위의 대상자는 그 나라의 국조 왕족 외척 영토 확장을 이룬 왕 공신등인데 국불천위가 확인된 것은 통일신라때 부터입니다 그러나 그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혁거세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성덕왕 김유신등이 국불천위로 지금까지도 그 제사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의 기록은 5묘제로 혜공왕 (765-780)이 미추왕 무열왕 문무왕 성덕왕 경덕왕을 제사지냈다는 것입니다 경덕왕은 혜공왕의 아버지여서 넣은듯 합니다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러 국불천위는 완전 정립되는데 그 가장 드러나는 형태가 바로 종묘입니다 종묘에 해마다 제사를 모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왕이 국불천위인 것은 아닙니다 자격 미달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5대째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전에 모신 왕의 신위는 5대째가 되면 매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녕전으로 옮겨져 국불천위가 됩니다 공이 전혀없는 군주였어도 빼놓지 않고 제사를 모시는 이유는 제사를 안모시는 것이 불효 불충이었기에 선조나 인조같은 임금들도 영녕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현재 13실에 있는 임금의 신위는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헌종 숙종 영조 정조임금입니다
나머지 임금들은 정전에 있는데 고종과 순종은 정전에 자리가 있어서 넣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외 조선조에는 많은 국불천위가 있습니다 일일이 다 말하기는 어렵고 조상의 신위가 국불천위로 지정된다는 것은 그 가문에 더할수없는 광영이었습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조에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국불천위가 된 사람이 있으니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입니다 퇴계학을 잇는 석계 이시명과 19세 때 혼인한 정부인은 6남 2녀를 두었고 재혼인 이시명에게는 이미 자식이 있었습니다 여중군자라 불리웠던 정부인의 바르고너른 두량은 이 가문을 크게 일으켰고 손자까지도 퇴계학보를 잇게 하였지요 종가는 종부의 힘으로 중흥된다는 것을 증명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음식디미방은 현재 조선조의 최고의 조리서로 그녀의 인생 철학이 모두 담긴 귀한 사료입니다 조선조에서 사대부가의 부인으로 장계향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