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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무엘상 14:47-52절.
제목: 뭣이 더 중한지 모르는 왕
방금 여러분이 읽은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마치 사울 왕이 어느 정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 나라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47절 말씀에 보시면, 사울이 모든 대적과 싸워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승전보는 마치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그 대적들로부터 건져냈다는 영웅담을 듣고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도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켜내었고,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었던 이스라엘의 열두 사사와 같은 인물로 묘사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게 자세히 읽어 보시면, 정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울이 어느 정도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성공했음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흐름은 전체적으로 부정적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을 떠나서 이야기하면 사울은 왕으로서 훌륭히 국가를 지켜내었고, 앞으로 있을 블레셋과의 전투를 대비해서 군대의 숫자도 보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기록한 저자는 이와 같은 사울 왕의 이야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이러한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이고 인본적인 행보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다윗과 사뭇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면이 사울 왕이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며 인본적이라는 것입니까? 그리고 다윗과 어떤 점에서 대조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먼저, 사울 왕이 그가 인본적이요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은 것은 본문 47~52절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것이 외부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는데, 그가 왕의 직무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감당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47절과 57절 말씀입니다. 그가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다는 말씀과 함께 52절 말씀에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불러 모았더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47절과 52절에서 두 번씩이나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용감하게, 용감한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 기자의 보도는 사울이 맨 처음 백성들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졌을 때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해줍니다. 특히 52절에 보시면, 용감한 사람 전에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힘센 사람입니다.
백성의 눈에 드는 왕의 기준은 외모였습니다. 본문 사무엘상 9장 2절에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경 기자의 보도는 비록 후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제비 뽑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람의 기준에 부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본문 47, 52절에서 우리는 또다시 성경 기자가 외모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자기의 왕권 유지와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가 왕이 된 것도 다른 백성보다 준수하고 힘이 세고 용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권을 유지하고 더 강화하려면 힘이 세고 용맹한 군사가 더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외부의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고 왕권을 지켜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울 왕의 생각은 역시 49~51절에서 한 번 더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사울은 힘이 세고 용맹한 군사가 많을수록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낼 것이며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고 강화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견제하는 내부의 반대자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권력의 누수를 막기 위해서 자기 숙부 곧 삼촌 넬의 아들 아브넬을 군대사령관 오늘날로 하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합니다. 내부에서 치고 들어오는 왕의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왕권을 유지하고 더 강화하기 위해 자기 집안사람으로 권력의 자리를 채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 기록을 보면서, 사울이 아직 정신이 덜 차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사무엘로부터 왕권이 유지되기 힘들 것이라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폐위와 같은 선언을 받았다면, 오직 왕권 유지와 왕권 강화에 안간힘을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막혀버린 관계를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왕으로 선출된 후에 왕이 해야 할 두 번째 직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다른 열방들과는 달라서 왕의 말이 곧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명령에 살고 죽는 것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죽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해야 할 두 번째 직무는 종교적인 직무로서,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국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왕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바로 율법을 준수하고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 그 어디에도 사울 왕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다거나 율법을 준수했다는 또 율법 준수를 백성에게 명령했다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결국 하나님의 목소리보다 백성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하나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해서 급기야는 흩어지는 백성을 막아보고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죄를 범했다면, 그가 율법을 준수하고 계명을 지켜 행하는 일에 백성의 모범이 되고 또 백성들을 그와 같이 가르쳐야 할 국가의 지도자로서 오로지 자기 왕권 유지와 왕권 강화에 수단으로 삼은 것이 외적이었다는 데 우리는 또 한 번 그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뭣이 중한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보면 그의 행위는 의당 정당하고 마땅한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천사에 의해 하나님께 보고되고 있어서 신앙을 떠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열왕기 상 18장 30절 말씀에 보시면, 엘리야가 갈멜산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대결을 벌일 때 그가 한 제일 첫 번째 한 일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이 제단이 무너졌겠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자리를 다시 복구시킨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가 이렇게 한 이유는 하늘에 불로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사용하려고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제단이 무너졌으면 수축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지만, 사울은 그가 처음 쌓은 제단마저 죄로 더럽혔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가 왕이 된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예배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뭣이 더 중한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임금입니다. 우리는 사울 왕의 행보를 보면서 사울을 닮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우리가 향후 살펴볼 다윗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왕권을 유지하는 데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울처럼 외모적인 데, 외적인 배경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시면, 그는 왕이 된 후에 블레셋을 게바에서 게셀까지 친 후에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 옵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성에 법궤를 안치한 후에는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매사에 하나님을 앞세웠습니다. 심지어는 법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체면도, 백성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울의 딸 미갈이 자기를 업신여길 정도로 그는 왕의 체면 따위는 다 내려놓고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온다는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사울은 사무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서 우리야를 최전방에 보내 죽게 한 죄가 드러나자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받을 때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보다, 백성보다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에 다윗의 치세 기간에는 사무엘하 7장 1절에 보시면, 평안함이 있었지만, 그래서 백성도 피곤하지 않고 고단한 삶이 아닌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지만, 본문 사무엘상 14:52 절은 사울이 사는 날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기자는 이 시점에서 자기 사위가 될 다윗 왕의 아내가 될 미갈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울 왕은 왜 자기의 왕권 유지와 왕권 강화의 수단이 힘이 세고 용맹함에, 그리고 자기 집안사람을 권력의 자리에 채우는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겪어 보니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가 힘이 세고 용맹하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왕으로 선택될 초기에는 그의 성격이 용맹함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왕으로서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안사람으로 권력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신앙인이나 신앙인이 아닌 사람도 다 아는 사실이며, 믿을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자기 집안사람으로 채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 삶에 중심에 그리고 왕의 직무를 행하는 동안 그 중심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왕으로서 성공적인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결코 왕권이 오래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사역하거나 아니면 사회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할 때 신앙을 떠나 내 경험이나 나의 기술을 믿을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떠난 삶의 태도는 또 직무를 행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왔을지라도, 말씀 밖이라고 여겨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되고 형통하는 것은 내 노력이나 경험이나 좋은 아이디어에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마치 사울이 보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해 보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끝은 백성들에게 사울이 사는 동안 또 사울의 치세 동안 전쟁이 그치지 않아서 피곤함과 괴로움을 줄 수 있었듯이 내가 속한 기관이 내가 속한 교회 사람이 평안을 얻게 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른 관계가 아니라 어긋났다면,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뭣이 더 중한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임금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내가 일주일 동안 볼일이 있어 나가니 그동안 내 아들을 맡아 주게나“ 하고 말하니 그 친구가 자기 아들을 맡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이가 입을 옷 몇 벌과 함께 아이가 그 친구 집에서 먹을 쌀과 함께 아이를 친구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이가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를 맡겼던 사람이 돌아왔고 그 사람은 친구에게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자네 나에게 옷과 쌀과 아이를 맡겼지, 그런데 두 가지는 잘 있고 아이만 잃어버렸네. 옷과 쌀이 그대로 있는 것만도 다행일세”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에게 자기 아이를 맡긴 사람은 아이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상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통곡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 사람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아직 옷과 쌀은 남아 있지 않은가?”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화가 나서 ”여보게 아이 없는 옷 보따리와 쌀자루가 백 개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 속의 그 사람의 친구는 정말 뭣이 더 중한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울 왕이 뭣이 더 중한지 모르는 어리석은 임금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맹세에 대한 교훈을 사용하실 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말씀에 보시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포하시면서, 18, 1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왕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자기처럼 용맹하고 힘센 병사가 많이 모아서 전쟁에 나가 적들을 쳐부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안사람을 그를 반대하는 반정부 세력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뭣이 더 중한지 모르는 어리석은 임금입니다. 그의 왕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왕권을 견고하게 세우고 더 강화하는 비결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재 나의 직위나 자리에 오래 유지되는 것은, 나의 땀과 노력 그리고 독창적인 아이디어 창출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는 말과 행위가 천사에 의해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것은, 욥기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라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땅을 두루 돌아 삼킬 자를 찾아다닌 사단에게 물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라고 그들을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기도할 때 그것을 부지런히 하늘 보좌로 가져가는 존재가 천사들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맡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일과 신앙적인 일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교회 일 따로 세상일 따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순간, 그 일은 더는 세상일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있는 직위가 오래 유지되고 더 높은 데로 오르려면, 직장 상사에게 아부를 잘해서, 또는 일의 성과를 내서 실적을 많이 쌓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이 필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언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 부끄럽게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 일이 잘될 것이며, 형통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 주일강단(11. 12). 사무엘상 강해35. 뭣이 더 중한지 모르는 왕|작성자 삶에서 쪄낸 아침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