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약속한 날 장마가 시작되었다. 남행 천 리, 빗속을 뚫고 가는 길이 그런데도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이름조차 낯선 새로 생긴 길들이 나라 안 구석구석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늦깎이 불자가 된 세월에 비해 절 찾아 돌아다닌 곳은 적지 않지만 스님을 뵙겠다고 작정하고 산중 절간을 찾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계단 많고 문턱 높고 게다가 좌복 위에 앉는 것까지 편하지 않아서 법당에서 봉행되는 예불에 참여해본 경험도 많지 않았으니 산사를 찾아간다면서 마음이 불안하고 몸이 굳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차창 밖에서는 빗줄기가 아니라 물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찾아가는 자비선사의 지운 스님은 앞 회에서 소개한 신상환 교수와 함께 서울에서 짧게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날 스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의 저서 한 권의 표지 안쪽에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 밖의 것 아니니 마음의 표현이요 투영’이라는 글귀와 함께 저자인 당신의 서명을 적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내게 건네주었는데 집으로 가져와 읽은 책은 자비손 명상법에 대해 안내하고 있었다.
산은 제 몸 안에 가둘 수 있는 용량 이상의 빗물을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채 제 몸에서 깎여나간 붉은 황토를 섞어 작은 길 위로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었고 차창은 빗물에 가리고 바퀴는 흙 덮인 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면 절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릴 때가 더 문제가 될 판이었다. 요즘 절들은 마당에 잘게 부순 자갈을 깔아놓은 곳이 많고 그런 곳에서 바퀴가 작은 휠체어는 쓸 데 없는 짐이 되기가 일쑤였다.
해가 지기에는 일렀지만 비 오는 날이라는 계산을 하지 못했고 산사의 저녁은 속세보다 이른 것이 상례였다. 미리 연락을 받은 보살님과 거사님의 안내를 받아 스님의 거처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네댓 걸음이면 될 길이 비 오는 날 내게는 아득해 보였다. 낮아도 계단이 있는 곳이라 휠체어는 무용지물이었고 아내에게 몸을 기댄 채 높이 반 뼘도 못 되는 계단 세 개를 딛고 토방에 올라서고 보니 우산을 받쳐준 거사님과 아내와 나 세 사람 모두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기를 닦아내고 다실에 앉아 법문 중인 스님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부터 설치된 서가에는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서책들이 꽂혀 있었고, 다탁 주변에는 차와 관련된 다양한 기구와 그릇 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벌여 있었다. 눈을 감고 책에서 읽은 차명상 관련 내용을 몇 가지 떠올려 보았다.
법문을 마치고 돌아와 환하게 웃으며 자리한 스님께 3배를 올렸다. 절은 물론 아내의 몫이었고 나는 앉은 채로 세 번 고개를 숙여 절을 했는데 절을 하는 내 맘 안에 아무런 동요도 미혹도 일지 않았다.
3배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절인 것을 짧은 순간에 알 수 있었다.
차명상협회 이사장을 맡은 스님이 직접 능숙하게 우려주는 차인데도 내 손으로 잔을 들어 그 맛을 볼 수 없었던 나는 찻잔을 탁자에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차 마시는 예법으로야 말이 되지 않을 일이겠지만 이야기 중간중간 눈치껏 아내가 들어주는 잔에 입술을 적셨다.
청법순례의 막을 열어준 신상환 교수와의 인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님이 달라이 라마 존자를 친견하기 위해 다람살라를 방문했을 때 청전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그를 만났는데, 반골기질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 보이는 솔직함 속에서 불교에 대한 학문적 소양과 열정을 읽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잔꾀나 부리는 머리만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죽이 맞았고 맘이 통했고 서로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이야기는 스님의 강주 시절로 이어졌다. 송광사가 어디인가. 승보의 종찰 아니던가. 그곳에서 스님은 세납 마흔이 되기 전에 강주를 맡게 되었다. 출가사찰도 아니었고 강주가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가져본 적도 없었으며 남방불교 경험자라는 일부 우려 섞인 반대까지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스님이 강주 소임은 스님 안에 감춰진 강백으로서의 역량을 세상에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다. 송광사 강원과 강주에 대한 소문은 승가의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강원을 찾아오는 학인 스님들의 발길이 해마다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부가 혹독하다는 소문도 강원을 찾아오는 승인들의 발길을 막지 못했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인 스님들은 고된 학업을 달갑게 이겨냈다.
송광사를 나와 동화사에서 다시 4년 여 강주를 지낸 스님은 어느 해 우연히 바깥 세상에서 마음을 수련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 문득 부처님 제자로서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 수행이 바른 삶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스님의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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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스님을 따라다니는 강직한 성품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출가한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한 양보 없는 준수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
종교는 ‘세상의 아픔’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하고 불교 또한 마땅히 ‘고해 속의 중생’을 제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바른 가르침을 따라 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자비수관, 곧 자비손 명상이었는데
자비의 손은 아함경과 청정도론, 염처경, 화엄경 등에서 찾아낸 이미지였다.
스님의 자비손 명상은 곧 이어 차명상과 거울명상 등으로 이어졌다.
명상의 효과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고 서구사회에서는 중환자들에게 명상을 권유한다는 보도도 나온 바 있다. 질병을 낫게 한 것이 명상의 효과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교가 삶과 유리된 다른 차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
불교는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러한 가르침은 우리들의 삶 속에 쉽게 녹아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 중간중간 보이는 꼿꼿한 율사로서의 모습들에 대해 물었다.
오후불식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육식은 말할 것도 없고 비린 것이라고는 멸치 한 마리 쓰지 않게 하고 비구(니)로서 계율에 대해 느슨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었다. 스님을 따라다니는 강직한 성품에 대한 소문들은 대부분 출가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에 관한 양보 없는 준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편한 길 놔두고 굳이 어려운 일을 가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물었다. 대중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불교 쪽에 서고 싶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고 했다. 어른스님께서 불러주신 ‘원력보살’이라는 과분한 호칭에 대한 긍지와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고, 하나를 제대로 알면 모든 것을 꿰뚫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도 했다. 우문에게 돌아온 어김없는 현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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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살림살이는 웃음 속에서도 알 수 있다. 때에 전 우리들은 아이들처럼 웃는 법을 잊어버렸다. | 달라이 라마 존자를 닮은 해맑은 미소가 수행의 힘인 것이냐고 앞 질문에서 생긴 부끄러움을 만회할 생각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대답인 즉, 달라이 라마 존자를 처음 만나 손을 잡았을 때 그 부드러움에 놀랐고 형편이 간단치 않은 속에서도 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에 놀랐으며 그것이 지혜와 자비의 공덕인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을 통해 발원과 욕망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생각 중의 하나가 기획되고 준비된 질문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물어서 듣는 답이 아니라 단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듣고 싶었다.
부처님 법이 아니라도 좋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라도 불자가 보는 세상은 어차피 불법의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일 것이었다.
스님의 바람은 자비선사가 수행도량이 되는 것이고, 누구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머물다 떠날 수 있는 수행도량이 되는 것이고, 몸이든 마음이든 병든 것들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도량이 되게 하는 것이고,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전국을 돌며 법을 전하고 수행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가본 땅, 개발이라는 사나운 갈퀴가 지나가본 적 없는 성주는 스님의 그런 발원과 잘 어울리는 길지吉地 같아 보였다.
좀체 오래 앉아있지 못하는 사람이 세 시간 넘게 가부좌로 앉은 채 스님이 들려주는 귀한 말씀을 들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어둠 속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일어서려고 했을 때 피가 통하지 않았던지 다리에 남아있는 감각이 거의 없었다.
숙소로 내려오느라 또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이번에는 스님도 우산을 쓰고 나와 차에 오르는 나를 도왔다. 비가 조금 뜸해지기를 기다려보는 동안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재를 지내지 않고도 절 살림이 가능하시던가요?” “법문을 하고 공양을 받은 부처님처럼 살기로 했는데 이만하면 잘 살고 있지 않나요?” 더 긴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복도 공도 모두가 자기 스스로 짓고 또 까먹는 것이다. 수행자가 할 일이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복을 짓고 공을 쌓으며 살아갈 수 있게 바른 법을 배우고 바른 법을 전하며 바른 법을 따라 사는 것일 게다.
비 내리는 밤에 또 한번 비를 맞았으면서도 가슴속은 오히려 따뜻했다. 문득 법 찾아 떠나온 순례의 첫 대목에서 받은 감동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은 내려놓기로 했다.
배우기로 맘먹으면 감동도 실망도 모두 내게 귀한 가르침이 될 것이었다. 스님이 소개해준 새로운 인연도 먼 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분이었다. 비에 흠뻑 젖고서도 새삼 이 모든 인연이 고맙고 감사했다.
원허지운圓虛智雲 스님 프로필
운성雲惺 대강백 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이음 성우 큰스님으로부터 계맥을 이음 승보종찰 송광사와 동화사에서 강주 역임 대한불교조계종 행자교육원 교수사 역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위원 및 교수사 동국대(경주)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자비명상센터(자비수관, 자비다선, 산행거울명상) 수행 지도법사 (사)한국차명상협회 이사장 저서: 『찻잔 속에 달이 뜨네』,『몸과 마음이 사라져가는 여행』,『깨달음으로 가는 길』 등 역서: 『원측소에 따른 해심밀경』 |
-들돌의 청법순례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