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식탁 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평화와 아름다운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탕수육 논쟁
여러분은 찍먹입니까 부먹입니까? 찍먹이냐 부먹이냐는 튀김 옷이 바삭하냐 촉촉하냐 하는 취향 이상의 논쟁을 품고 있습니다. 위생적 차원, 뒷정리, 보관 후 재가열 등 다양한 쟁점이 탕수육 한 접시에 담기지요. 이 팽팽함 사이에 여러 대답이 존재합니다. 반은 부어 먹고 반은 찍어 먹는 '반부반찍'의 회색 지대도 있고요, 소스 없이 먹는 야생의 '생먹'도 있습니다. 그런 고민할 시간에 한 점이라도 더 먹으라는 '처먹'도, 위생과 취향을 고려하여 덜어 먹는 '덜먹'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 낸 사람 마음대로 먹는 '돈먹'도 존재합니다. 고작 탕수육 한 접시인데 이토록 다양한 논쟁이 생기다니 참 신기하죠?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사실 이런 다양한 고민은 본래 볶음 음식인 탕수육이 배달 과정에서 맛을 잃지 않도록 소스와 튀김을 따로 담은 섬세한 배려에서 시작됐습니다. 탕수육을 어떻게 먹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 역사, 성찬의 논쟁에 비하면 탕수육논쟁쯤은 양반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식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나눠 먹은 밥, 마침내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재산·계급·인종·성별에 상관없이 둘러앉은 사랑의 식탁이 곧 그리스도교 예배, 성찬의 원형입니다. 차별적 계급 질서에 따라 만찬과 연회가 열리던 제국의 문화에 대조가 되고, 대안이 되는 새로운 사회의 식탁 교제가 예배의 출발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신학적 의미가 이 밥상을 채웠고, 교회를 둘러싼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이 식탁은 식사 그 자체를 넘어 고도의 예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성찬을 둘러싼 논쟁
성찬이라는 작은 식탁에도 여러 질문이 올라옵니다. 성찬 예식 안에서 어떤 기도와 감사를 드릴 것인지, 면병 카스테라 쌀밥? 재료는 무엇을 쓸 것인지, 개인 잔? 큰 잔? 성찬기는 무엇을 쓸 것인지, 집례자는 집례 시에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지, 목회자, 장로? 누가 빵과 잔을 나누어줄 것인지, 신자 비신자? 누구에게 주거나 주지 않을 것인지, 무릎 꿇기? 손 모으기? 어떤 자세로 받아먹을 것인지, 가져다주기? 나와서 받기?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한 사람씩? 아니면 모두 기다렸다가 한 번에 먹을 것인지, 등 성찬의 테이블 매너는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무수한 질문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논쟁적이었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할까?” 모두가 그런 의문을 품지 않나요?
이 갈등의 절정은 종교개혁 시기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의 성변화, 실체변화 신학에 반대했습니다. 합리적인 설명을 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가톨릭의 성찬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 성찬을 지탱하고 있는 신학과 교회의 구조들까지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종교개혁가들은 성찬에 관한 기존의 설명을 수정하거나 부정해야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많은 부분에서 의견들을 일치했는데 성찬에 관해서는 끝까지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는 개신교 분열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찬은 본래 ‘하나 됨의 상징’이지만, 개신교 역사에는 ‘분열의 상징’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몸이 되는가?”는 최근까지도 '온라인 성찬이 가능한가? 라는 버전으로 바뀌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곤 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빵을 놓고 이 다양한 질문 속에 파묻히다 보니 우리는 정작 중요한 질문을 놓치곤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고린도 때는 말이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성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합당하게 먹고 마셔라, 그렇다면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어떻게 예식을 진행해야 하는 지나,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28절에 답이 있습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빵과 포도주를 마셔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는 것, 성찬에서 우리 자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에야 우리는 봉사자들에 의해 차려지고 정돈된 식탁에서, 거룩해 보이는 전용 음식, 전용 그릇으로 이미 철저하게 평범한 식탁과 구별된 모양의 성찬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달랐습니다. 도시락을 챙겨오거나 각자 자기 맡은 음식을 접시에 가져와서 그것으로 성찬을 하였습니다. 일종의 포틀럭이지요. 그렇다면 식탁 위에 놓인 것이 빵과 포도주뿐이겠습니까? 과일, 곡물, 고기, 생선, 채소 등등 다양한 음식이 올려집니다. 거기엔 사람들의 평범한 나날들의 수고와 삶이 담깁니다. 언뜻 상상해 보아도 우리의 식탁보다 훨씬 너저분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찬은 애초에 거룩하게 준비되어 거룩함을 나누는 식탁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 거룩하게 변화하는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예배가 성찬을 봉헌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봉헌은 성찬과 분리된 순서가 아니라, 성찬의 일부이며 성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드린 것으로 성찬을 나눈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야 예배 시간에 음식이 아닌 헌금을 드리죠. 그러나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전통에서 보면 우리가 드린 헌금은 그저 예배의 참가비도 아닙니다. 회원 유지비나 기부금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고 쓰일 수 있으나, 예물은 우리 삶,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액수가 많든 적든 여기에 우리의 존재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평범한 물질이 주님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처럼, 예물과 함께 드려진 우리의 평범하고 얼룩진 삶도 그렇게 변화되어 세상을 살리리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즉, 식탁 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핵심은 빵과 포도주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 우리 삶이어야 합니다. 성찬의 식탁에 올려지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빵이 주님의 몸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어 찢겨 세상에 나누어 먹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할 때 들려 있는 빵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교회 성찬이 보여주는 세계
다시 고린도 교회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는 그 변화가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부유한 교인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음식을 잘 준비하여 일찍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식사 시간까지도 일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 신분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없었고, 뿐만 아니라 함께 성찬의 식탁에서 나누어 먹을 음식을 제대로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뻔한 상황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부유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일찍 모인 자신들끼리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연회를 가졌던 로마세계의 질서가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뒤늦게 가난한 사람들이 도착할 무렵이면 대부분의 음식과 마실 것이 다 떨어졌고, 어떤 사람들은 질펀하게 취해있기도 하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이들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거나, 아니면 먹지 못했거나, 술주정으로 난장판이 된 식탁의 뒷정리를 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살아가던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변화에는 관심 없다는 말입니다. 성찬에는 참여하지만 여전히 세상과 똑같고 전혀 구별되지도 변화되지도 않았으며 그럴 마음도 없었음을 꼬집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말입니다. 성찬을 둘러싼 무수한 논쟁들도 중요하고 의미 있지만,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장엄하고 압도적인 예식이라 하더라도, 성찬의 신학이 촘촘하더라도, 산해진미가 차려진다고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세계 성만찬 주일
오늘은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세계 성만찬 주일은 분열된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 한 분을 따르며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다짐하며 성찬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세계 성만찬 주일이 성찬을 앞세운 교회 연합 주일에 그쳐선 안 됩니다. 세계성찬주일이라는 그 이름처럼 이 일그러진 세계를 우리의 식탁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이념, 피부색, 장애, 지역, 재산, 성, 성적지향, 종족으로 인한 차별과 혐오의 세계를, 탐욕과 폭력으로 갈라지고 파괴되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식탁 위에 올려놓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생명과 평화로, 나눔과 정의, 사랑과 화해로 가득 차는 것을 그려 봅니다. 거기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기로 결단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에 진심인 사람이라면, 나 자신과 이 세상이 정말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생명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믿는 사람이라면, 이 식탁에도 진실 되게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셨듯,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놓을 것입니다. 저는 이 빵이 살로, 이 포도주가 피로 변화된다는 말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라고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습니다. 주님의 몸이 된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빵이 몸으로 변한다는 말을, 참으로 믿겠습니다. 그런 척이 아니라, 여기 포도주가 피로 변한다는 것을 참으로 믿겠습니다. 이 식탁이 보여주는 변화의 이야기를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고 이 빵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연약한 제 삶도, 일그러진 이 세상도 변화되리라는 희망이 제 안에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꿈꾸신다면, 여러분도 이 식탁에 마음을 다해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식탁보를 걷을 때,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식탁 위에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