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뿌리]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
여성 교육 개선 · 신앙 쇄신에 헌신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창립자 엘렌 마리 필리핀 드 샤뽀땡 드 느빌(Helene Marie Philippine de Chappotin de Neuville)은 1839년 5월 21일 프랑스 낭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1860년 글라라 수녀회에 입회했지만 곧 병을 얻어 수녀회에서 나오게 됐다. 그러나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은 그를 다시 이끌었고, 1864년 예수회 지도 신부의 권유로 마리아 속죄회에 입회해 ‘마리 드 라 파시옹(Marie de la Passion)’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인도로 파견돼 그곳에서 12년 동안 전교사로서 활동했다.
그의 생애는 이 이름, 수난이란 뜻과 동시에 열정을 뜻하는 ‘파시옹(Passion)’으로 요약할 수 있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속죄회 인도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된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는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어려움을 견뎌냈다. 그러나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과 본부와의 어려운 통신사정으로 인해 오해와 갈등이 생겼고, 결국 속죄회 인도 선교지 소속 수도자 20명은 속죄회를 떠나 서원생활을 계속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1876년 마리아 속죄회를 탈회하게 된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와 20여 명의 수도자들은 우타카문드 교구 소속의 공동체로서 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교황 비오 9세에게 청원했고, 교황은 ‘마리아의 전교자’라는 이름으로 선교 사업에 헌신할 수녀회의 창립을 허락했다.
1882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진출해 수녀원을 건립한 후 프란치스코 성인 탄생 700주년 기념 축일에 프란치스코 수도 3회에 가입하면서 영성의 뿌리를 굳건히 했다. 1885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의 허락을 얻어 수도회의 공식 명칭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로 변경했다.
일찍이 인도에서 여성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했던 그는 세계 어디서든 여성의 교육과 상황개선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와 사회의 필요에도 민감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답기를 기도했으며, 로마의 수녀원은 신앙을 쇄신하러 로마에 오는 순례객들에게 늘 열려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산업혁명 이후 새로 부상한 노동자 계층을 이해했으며, 그들을 위한 활동에 시간을 냈다. 그 시대의 문제를 일찍 깨달은 선각자나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은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서 지지와 격려, 충고를 얻을 수 있었다. 수녀원의 객실은 자주 사회운동가들의 토론장으로 사용됐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1958년 부산대목구장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해 현재 한국 관구에 21개 공동체에 사목 중이다. 교구 내에는 수련원인 ‘한국 순교자 공동체’와 노인요양원인 글라라의 집 ‘성녀 글라라 공동체’, 안산대리구 시흥지구 4개 성당에서 봉사하는 ‘성 바오로 공동체’가 있다.
[영성의 뿌리] 테클라 메를로 수녀
출판 · 영화 등 미디어 활용한 복음 선포 앞장
세상의 한 가운데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성바오로딸수도회.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은 수도회이다.
초대 총원장 테클라 메를로 수녀는 복음을 전하려는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의 심중을 깊이 이해해고,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투명한 순명 정신을 지닌 여성이었다.
1894년 2월 20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타니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데레사 메를로는 수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몸이 약해 꿈을 접으려 했다. 그러나 21살이 되던 해인 1915년 6월 27일 성바오로수도회의 창설자인 알베리오네 신부와의 만남이 그를 감화시켰다.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기술이 제공하는 모든 수단과 출판을 통해 복음을 선포한다는 계획은 거대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특히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제한돼 있던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젊은 데레사는 이 새로운 소명에 필요한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진 않았으나 계획에 동참해야 한다는 부르심을 느꼈다.
데레사는 알베리오네 신부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고 그의 제안에 “네”라고 응답했다.
처음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기에 봉제 작업실에서 군복을 만드는 일을 했으나 1918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수사교구의 주간신문 「라 발수사」 발행을 시작으로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한 사도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1922년 7월 22일 9명의 회원이 첫 종신서원을 했다. 이때 데레사는 자기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고 ‘테클라’라는 새로운 수도명을 받았는데, 이는 교회 전통에서 성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여성 제자라 전해지는 성녀 테클라를 본받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초대 총장으로 임명된 테클라 수녀는 회원들이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를 이해하고 사도직을 실현하도록 격려했다. 성바오로딸들은 그의 인도와 모범에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가정·공장·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했고, 수도회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테클라 수녀는 1947년부터는 영화 사도직도 활발히 실천하도록 회원들을 이끌었다. 영화 제작과 필름 대여점에 이르기까지 사도직 영역을 넓혀 나간 그는 스스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테클라 수녀의 순명의 덕행은 교회의 인정을 받아, 199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됐다.
[영성의 뿌리] 장화자 수녀
방인 수도회 첫 여성 창립자
거룩한 말씀의 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여성 창립자 장화자 수녀에 의해 1964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창설된 방인 수도회다.
1932년 광주 대인동에서 태어난 장화자 수녀는 서울대 문리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테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 중 세례를 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선교에 투신키로 하고, 학위 취득을 포기한 채 1964년 귀국했다.
귀국 후 즉시 부산 동항본당에 터전을 잡고 트라우너 신부의 지도를 받아 몇 명의 협력자와 더불어 복음선포를 목적으로 하는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를 창립했다.
이 회가 창설될 당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개방과 쇄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사회는 6·25전쟁 이후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정했고 극심한 경제적 빈곤을 겪고 있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장화자 수녀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에 이끌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67년 대전교구장 황민성 주교의 배려로 대전시 대흥동에 자리잡은 수녀회는 성 프란치스코회의 콩트와 신부를 초대지도 신부로 모시고, 교정사목·빈민 아동의 선도·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2년 뒤에는 목동 소재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건물을 인수해 이전했다.
장 수녀는 본원 건물을 새로 마련한 뒤 곧 독일로 건너가 프란치스코 여자 수도원에서 의탁 수련을 받고 귀국해 1970년 11월 황민성 주교의 승인 아래 첫 서원 및 종신 서원을 했다.
수도회는 1976년 한국주교단으로부터 인준 받았고, 이듬해 장화자 수녀는 초대 총원장으로 취임해 본당, 가정방문 등 다양한 사도직을 위해 애써왔다. 1983년에는 현재와 같이 ‘거룩한 말씀의 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 수도회의 정신은 하느님이시며 말씀으로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뜻에 맞는 봉헌된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해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영성의 뿌리]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
의사 면허 취득하며 의료봉사에 헌신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뜻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설립자 하이디 브라우크만(Heide G. Brauckmann) 수녀는 1943년 독일 베스트팔렌에서 3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고자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에 입회한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1966년 한국에 오게 됐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파견이 결정된 후 백과사전을 뒤져 알아본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였다.
한국에 도착한 브라우크만 수녀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나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돌보면서 국내 의료 시설과 의료인의 부족을 절감했다. 그는 아파도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1975년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내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이어 1982년 1월 강원도 원주에 ‘가톨릭 의원’을 개원해 의료시설이 열악하던 강원도 지역 주민들을 힘껏 도왔다. 그러나 의료 활동 외에도 노인과 장애인, 어린이들에 대한 복지 또한 절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브라우크만 수녀에게 수녀원 설립을 요청하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함께하기로 했다. 1983년 9월 ‘전교봉사 수녀회’를 창설한 브라우크만 수녀는 수녀회의 진로와 회헌·회칙 마련, 교황청 인준 문제, 남자 수도회 설립, 아프리카 선교 등 수녀회의 미래를 설계하고 실행에 옮겼다. 1988년 9월에는 수녀회 이름을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로 변경했고, 1993년 12월 정식으로 교황청 인준 허가를 받았다. 또 같은 해 사회복지법인 프란치스코 사회복지회를 설립해 어려운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다졌다.
브라우크만 수녀는 40여 년이 넘는 수도 생활 전부를 의료 봉사에 헌신한 공로로, 문화방송의 문화시민상(1986년)과 결핵협회의 복십자 대상(1991년), 호암 사회봉사상(2000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