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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요가, 神의 化身]
미우라 관조(三浦關造) 지음 / 이일우 옮김 / 1988년 출판
목차
1 지고자(至高者)의 이야기
2. 통각에의 길
3. 실제적 종합 요가
4. 인체의 신비
5. 호흡의 과학
6. 명상
7. 대사의 존재
8.하이어라키의 사업
9. 신지학과 법화경
10. 샴바라와 사나트쿠마라 및 비전에 관하여
11. 웨샤크 제(祭)
12. 천인존(아데프트)과 인류의 협력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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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의 요기이며 대선구자인 미우라 관조(三浦關造)는 1893년에 일본 큐슈에서 태어나 1960년에 타계하였다.
일본 요가는 그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위대한 선각자로서 세계 통일에 대한 열망을 안고 단신으로 도미(渡美)했으나, 때가 익지 않아 실패했다.
그는 비범한 초인력으로 나병, 암 등 불치병 치료에 있어 거의 전능하였으며 보수를 바라고 남을 치료해 준 적은 없었다.
그는 또 아스트랄 비행으로 인도, 티베트 등지에도 마음대로 왕래하였다. 또한 그는 영어, 프랑스어도 능통하였으며 외국인을 상대로 많은 강연도 하였다.
저술, 번역서(일본어 영어 등 합하여)가 70여 종에 이른다.
나는 40세 때에 미우라 존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비로소 요가의 실수(實修)에 들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상하고 겁도 나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요가를 못 했다.
그러나 운명의 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몰려 순순히 그에 응하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아주 가볍게 흉선 뇌하수체 송과선의 차크라가 열리게 되었으며 혼(魂)인 자아 신성(神性)의 'God I am'과 초인계의 지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대자각운동과 전인류의 개(皆)초인화운동, 초인헌장 선포 등은 인류사 최종의 결정적인 사명이다.
이에는 미우라 존사 외에 또하나의 존사이신 M. 도릴의 은혜가 임하고 있다.
미우라 존사는 신지학(theosophy)의 흐름을, 도릴 존사는 카발라(kabballa)의 체계를 나에게 주신 것이다.
나는 30세 때 선각자 최제우의 바이브레이션을 6개월 동안 느끼고 난 후 지극히 부귀공명만 탐하던 유물적 사고방식을 종교에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구도(求道)의 길에 나선 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일체 종교가 시시하여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40세에 신지학을 접하고서야 종교 같은 종교를 찾은 느낌이 들어 밀교, 비교(秘敎) 계통을 파고들었다.
46세 때, 최종말을 위한 초인선언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정신없이 찾아나섰지만 신지학을 가지고서 초인선언하기에는 그 체계가 너무나 약했고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50세 때 카발라를 만났다.
미우라 존사를 통하여 도릴 존사에로 또 한번 대비약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카발라 체계의 명상을 계속했다.
우리 구도자의 입장에서는 목전의 물질소득에만 전력을 투입하여 현세 물질 구복주의만을 추구하고 있는 민족의 장래를 영적인 눈으로써 심히 걱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위대한 샴발라, 그리고 카발라 체계에서는 21~24세기를 최후의 심판기로 단정하고서, 25세기 이후의 초인시대를 맞이할 인류구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창립된 것이 은사이신 도릴의 미국 브라더후드 초인대학이다.
우리의 신인, 이 구획된 우주의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은 앞으로 2,200년 후에는 영원히, 완전히 없어진다.
그 이전에 이미 우리의 육체도 물질 지구도 사라지고 만다.
이에 대한 대비가 요가를 통한 밀교 교과과정이다.
말로써 구원하는 유치한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잠을 깰 필요가 시급 절실하다.
4대 우상을 타파하지 않는 이상 결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물질, 육체, 차생(次生), 지구 이 네 가지 우상이 전부인 줄 아는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은 절대로 개인도 민족도 인류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 유일의 르네상스가 또다시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 겨레가 순결하고 위대한 초인국이 된다면, 샴바라에서 우주력으로써 이 나라만은 꼭 지켜 준다고 한다면 이 나라의 국민 중 과연 몇 사람이 이 말을 믿어 줄 것인가?
어이하여 위대한 초인신화(단군신화)를 모신 초인종의 광명민족이 푸닥거리와 동양철학, 그리고 구복 물질주의의 희생이 되어 버리고 저차원의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실로 통탄할 일이다. 지도층과 종교가가 책임질 문제이고 대오각성할 일이다.
다시 위대한 초월 광명민족으로 고양시켜야 한다.
부하고 강대했던 카르타고도, 통일신라도, 대당제국도, 로마제국도 다 멸망했다.
돈과 힘, 그리고 물질력이 국가와 민족을 영광되게 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슬기롭게 초월 정도(正道)의 길을걷는 자만이 유구하게 잘 살 수 있는 것이 우주의 법칙인 것이다.
아멘티 샴발라 하이어라키에 기도하면서……
- 이일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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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장 - 지고자(至高者)의 이야기
- 지고자의 노래(바가바드 기타)의 초역(抄譯) -
8천 년 보다도 훨씬 옛날의 사화(史話)다.
인도에서 왕위계승 쟁탈에 큰 문제가 일어나 드디어는 최후의 위기에 빠졌다. 한 쪽은 드리타라 시트라 왕이고 다른 한 쪽은 판도우 족의 왕자 알쥬나이다.
양쪽의 대군이 쿠루의 들판에 진을 치고 지금 막 대전쟁이 전개되려고 하는 장면으로부터 이 시극(詩劇)은 시작된다.
양편의 왕자에게는 각각 천리안 천이통의 소유자인 스승이 붙어 있다.
이들 스승은 왕자의 마부를 겸하고 있다.
이 양군은 더구나 동족이 서로 섞인 부자, 형제, 손자. 백숙부, 사촌형제, 스승, 제자들이 맞 대립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제 막 결전에 돌입하려고 할 때 드리타라 시트라 왕이 스승에게 묻는다.
“적 판도우 족의 형세가 어떤지요?”
“용맹 결사의 영웅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적군의 세력이 배가 됩니다만 우리 편에도 많은 전승의 경험이 있는 영웅들이 있으므로 신중히 전군을 배치하여 대 원수(元帥)를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라고 스승이 대답할 때, 결전 신호의 소라 나팔이 대장군들에 의해 왕왕 울려 퍼진다.
이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엄청난 소리에 이어 큰북, 나팔, 등이 꽝꽝 뛰뛰 하고 천지를 뒤흔들면서 울려 퍼진다.
얄쥬나는 소라나팔을 그 스승 크리슈나는 거인의 뼈를 도려내어 판 큰 나팔을, 적장은 폰드라 대나무의 큰 나팔을 막 불어제낀다.
승리의 목소리 묘음(妙音) 보화라고 불려지는 나팔들이 양쪽에서 울려 퍼진다.
알쥬나는 늠름한 모습으로 스승인 마부 크리슈나에게 말한다.
“아군의 형세를 살피고 또 드리타라 시트라의 전세를 살피기 위하여 전차를 양군 사이에 나가게 해 주시지요”
황금의 마차는 백마에 이끌려 전두로 용감하게 달려 나간다.
전두에 나타난 알쥬나는 문득 인도적 비통감에 사로잡힌다.
온 몸이 떨리고 사지가 오그라들고 입안은 마르고 머리칼은 곤두서고 큰 활은 손에서 미끌어 떨어지며 온 몸의 피부가 불타듯 하며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그는 크리슈나를 향하여 말한다.
“크리슈나님! 나는 비참한 전조를 봅니다. 아! 동족이 서로 죽여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왕권과 열락을 탐하여 아버지도 아들도 형제도 서로 편이 나뉘어 이렇게 싸우려 합니다.
나는 죽음을 당할지라도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설사 3계에 군림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사악한 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죽이면 그 죄는 우리들에게 돌아옵니다.
탐람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들의 양심이 썩어 버렸다 할지라도 일가(一家)가 멸족되어야 할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왕가의 전멸에 의하여 전통이 망하고 불법이 천하를 지배하고 성계가 문란해지고 공양의 접시 세사술의 병은 선조와 함께 몽땅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올라올 수가 없게 됩니다.
가현(家憲)이 폐해지고 백성은 필연 지옥의 삶을 살게 됩니다.
왕권 획득을 위해 지금 우리들은 극악무도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일 드리타라 시트라 왕이 나를 쳐서 죽이려 한다면 우리는 무기를 버리고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인 크리슈나는 신의 화신인 진상(眞相)을 나타내며 말한다.
“아아! 알쥬나여 이런 존망의 생사 위기에 처하여 천문(天門)에서 밀려나다니 무슨 짓인가? 일어서라!”
알쥬나가 말하기를
“나는 부귀를 탐하여 취하려는 자를 죽여 생피를 뜯는 즐거움을 맛보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거지의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겠습니다.
승자와 패자 어느 쪽이 옳은지를 나는 모릅니다.
이겨도 마음은 패한 자의 피에 더럽혀지고 이성은 혼란스러워지니 산들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나를 위한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제자 입니다.”
하니 크리슈나가 말한다.
“네가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가 못하다. 현자는 산 사람을 위해서도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 육체 안에 사는 진아는 유.로.사(幼老死)를 경험하여 다른 체를 거친다.
현자는 이것을 알기에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고락을 낳는 물질적 기능은 영원하지 못하니 오직 태연히 흔들리지 않는 자는 불사의 생에 어울린다.
영원불멸한 자가 없는 육체는 유한하니 어찌 유한을 슬퍼하랴.
그러니 싸워라, 알쥬나! 육체 안에 사는 불멸자를 살육자로도 보고 피살육자로도 보는 것은 다 무지이다.
불멸자가 어찌 죽이고 죽여지랴, 불사. 영원. 상주의 고대아(古代我)가 육체가 죽어진다고 어찌 죽어지랴?
자아의 신성은 놀라운 것이다.
너무도 위대하기 때문에 이것을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으며 설사 말한다 해도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없다.
너는 너의 정의를 믿고서 그렇게 떨지 말라. 무사에게 정의를 위한 싸움보다 더한 기쁨이 있는가?
만일 네가 선(善)의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의무를 포기한 것으로 죄에 빠진다.
죽음을 당하면 하늘을 이어받고 이기면 땅을 차지하여 기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라. 일어서서 결연히 전투에 임하라.
지금 네게 말한 것은 이론(원리)의 진리이다. 나아가 요가(통각)에 관하여 들으라.
이 가르침을 깨닫고 행위의 얽힘을 끊어내라.
만일 이 길에 든다면 노력이 무효로 되는 일이 없고 위반되는 일 또한 없으리라. 한 알의 달마(지혜)라 할지라도 큰 위험에서 너를 지킨다.
아아, 알쥬나여! 자아(혼)는 찬란히 빛나며 일심부동이며 오직 해야 할 의무를 행하고 그 결과를 구하지 않으며 그 성공, 실패에도 담담하게 항상 마음이 똑같아야 하니 이 균형이 요가(통각)이다.
순수한 자아는 일체의 행위를 초월하니 오직 요가에 전념하라.
요가는 행위를 위대하게 만드니 천한 마음의 욕망을 모조리 버리고 자아에 만족하는 자는 지혜가 탄탄하게 된다.
고통에 처해 적정하지 않으며 쾌락에 담백하며, 정욕, 공포, 노여움에 초연하다면 불발(不拔)의 성자이다.
아아, 알쥬나여! 흥분은 현자의 마음을 충동적으로 빼앗아 간다.
그러니 일체의 외적인 것을 떨쳐 버리고 지고의 목적인 자아와 조화하라.
감각의 대상을 생각하는 자는 오직 대상에 집착할 뿐이다.
집착으로부터 욕망이 생기고, 욕망으로부터 노여움이 생기며, 노여움은 의식을 어둡게 하고, 어두운 인식은 기억의 혼란을 가져오며, 기억이 혼란하면 이성이 상실되고, 이성이 상실되면 결과 사람을 송두리째 멸망시킨다.
그러나 마음이 평정되면 일체의 슬픈 고뇌가 없어지고 삽시간에 자아가 결정된다.
일체 만사가 막막할 때 성자는 대중이 모르는 진리에 눈을 뜬다. 대중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자에 있어서는 망상이다.”
알쥬나가 다시 묻기를
“크리슈나여! 일심의 안정이 행위보다 존귀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저로 하여금 이 끔찍한 싸움에 도전하라 하십니까?”
크리슈나가 대답하여 설명한다.
“알아라, 행위는 아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즉 아는 것은 불멸한 것으로부터 생긴다.
영원무한한 것은 항상 희생(의 법칙)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희생의 대 법륜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죄악의 일생을 보내고, 감각의 환희하며 헛된 인생을 산다.
진아를 기뻐하며 진아로써 만족하고 진아에 안주하는 자, 그에게는 이 세상의 만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니 오직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어느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오직 의무만을 행하라.
이렇게 해야만 지상아(至上我)에 도달한다.
쟈나카(전생의 불타) 및 그밖의 옛 성자들은 행위에 의해 완성의 영역에 도달했다.
그러니 너도 세계의 행복에 착안해서 행동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자가 행하는 바를 범인들은 본받아야 하고 모범을 보인 자를 사람들은 따라야 할 것이다.
아아, 알쥬나여! 나는 3계에 있어서는 못하는 일이 없고 또 숙달하지 못한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내가 행위에 권태를 느끼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팔방에서 나의 길로 온다.
내가 만일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3계는 파멸되고 신분제도는 문란해지며 백성은 황폐해질 것이다.
아아, 알쥬나여! 무지한 자는 집착에 의해 행위하며, 현자는 세계의 행복을 바라면서 사로잡힘이 없이 행위 한다.
때문에 악욕을 떠나서 지상아에 안주하기 위해 너의 사상과 일체의 행위를 나에게 바치고 마음의 열병을 고쳐 분연히 싸워라.”
통일에 관한 불명확한 점을 묻는 알쥬나에게 신 크리슈나는 계속하여 설명한다.
“나는 불멸의 통일(요가)을 태양에게 주었고 태양은 이것을 마누에게 주었으며 마누는 인도 무사조의 조상 이크시와크에게 주었다. 이렇게 서로주고 서로 받아서 이 세상에서 잊혀졌다. 오늘 이 성스러운 요가 즉, 지상(至上)의 신비를 네게 주겠다.”
알쥬나가 묻기를
“태초에 태양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시는 진리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 크리슈나가 말한다.
“나는 몇 번이나 이 세상에 나타났었다. 알쥬나! 너 또한 그렇다. 그래도 나는 과거 일체를 알지만 너는 모를 뿐이다.
아아, 용사여! 나는 불생불멸로서 자연을 가꾸는 자, 모든 살아있는 것의 주인으로 일체 나의 환력(幻力)에 의해 나타난다.
정의가 쇠잔해지고 불의가 날뛸 때 나는 항상 출현해 온다. 착한 자를 보호하고 악한 자를 멸망시키며 정의를 세우기 위해 화신하여 오는 것이다.
나는 행위 할지라도 그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으며 또 행위의 열매를 구하지도 않는다.
나를 아는 자는 행위에 의해 묶이지 않으며, 작위 속에서 무작위를 보며, 또 무작위 속에서는 작위를 본다.
이러한 사람은 인류 중의 현자로서 어떠한 일을 해도 통일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현자는 자기의 행위를 지혜의 불에 태우고, 결과에 집착을 버려 언제나 스스로 만족하며 아무 것에도 의존치 않으며, 행위 할지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의식한다.
현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마음과 몸을 스스로 지배하고 일체의 탐심을 버리고서 행위하며, 무위에서 오는 소득으로써 만족한다.
희비고락위에 초연하며, 원한이나 증오가 없이 성공 실패에 담백하게 처하며, 굳이 묶이는 것이 없다.
집착 없는 사람의 행위는 통일되고, 그 사상은 지혜에 입각하며, 그 업은 희행의 업이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범(神)에 흡수 된다.
봉헌물은 범(梵:神)으로 된다. 공양물도 범으로 되는 것이다.
범의 마음으로 불인 범에게 공양하라.
무릇 행위하면서 오로지 범과 합치하는 자는 범에 도달한다.
일체의 감각 및 마음의 고통을 아는 것에 의하여 점화된 억제의 불에 태워 희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자는 부를 가지고 희생으로서 삼고, 또는 개전(改悛)으로서 희생을 삼기도 하며, 일심집주(一心集注)를 희생으로 삼고, 아는 것에 대한 연구를 희생으로 삼고, 지식을 가지고 희생으로 삼기도 하며, 또 어떤 자는 굳은 서약의 고행을 희생으로 삼기도 한다.
들이쉬는 숨을 내쉬는 숨에 희생으로 바치고 내쉬는 숨을 들이쉬는 숨에 희생으로 바치며, 또 숨을 멈추고 프라나와 아파나를 중화시켜 심장을 진정시킴으로서 생명에 대한 지배를 배워라.
이 세상은 희생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계이다.
곧 영원한 자에게 바쳐지는 여러 희생은 모든 행위의 소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아, 용사여! 아는 것(知)의 희생은 모든 희생보다 뛰어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앎에 의해 밝혀지기 때문이다.
앎에 의해서만 네 안의 만물을 보고, 또 내안의 만물을 볼 수 있으며, 설령 극악한 죄인일지라도 아는 것의 배를 탄다면 그는 죄 허물의 바다를 넘어갈 것이다.
아아, 알쥬나여! 타오르는 불이 장작도 재로 만들 듯이 형형(炯炯)이 스스로 불타면 마음이 통일되어 신과 같이 된다.
감각에 의한 모든 욕망을 태워 버리고 앎을 얻는 자는 지고 장엄한 평화에 이름이 빠르니라.
그러나 무지로 인해 믿음 없이 의구하는 자는 망해 버린다.
아아, 부의 정복자인 알쥬나여! 행위에 대한 결과를 버리고 마음을 통일하여 앎으로써 의구심을 분쇄한 자는 진아에 의해 다스려지니 진아의 지혜의 칼을 휘둘러 무지의 소산인 네 마음의 의구심을 죽이고 마음을 통일하여 일어서야 할 것이다. 어서 일어서라 알쥬나여!”
알쥬나가 말한다.
“아아, 신이여! 당신은 행위의 보과를 버리는 일이 귀하며, 또 요가를 가지고도 귀하다고 하십니다. 그 어느 것이 참으로 귀한 것인지를 확고히 가르쳐 주십시오.”
신 크리슈나가 계속 가르친다.
“초학자는 이론과 요가(통일의 實修)를 다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 쪽의 성취자는 양쪽의 성취자이다. 이론이 도달하는 곳에는 통일의 길 또한 도달한다.
만물의 본질을 아는 마음의 통일자는 ‘나는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으로 일체에 집착함이 없다.
일체의 내가 한 일을 영원한 자에 바친 사람은 연꽃 잎에 맺히는 이슬이 더럽혀지지 않듯이 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다.
지상(至上)의 자아는 아홉 문(門)의 성읍에 신과 함께 앉으며, 행위도 욕망도 마음먹은 대로 되어 버린다.
자아의 지(知)에 의해 무명의 어두움을 깨뜨리는 자는 찬란한 태양처럼 지혜가 빛나며 지상아의 면목이 나타난다.
진아가 견고하여 홀리는 법이 없이 신에게 안주하는 자는 쾌락을 좋아하지 않으며, 불우(不遇)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외부에 집착하는 일이 없고 자기 안에서 환희를 발견하며, 일심집중에 의하여 영생하는 신과 결합하는 자는 불멸의 행복을 얻는다.
대상과의 접촉에 의해 생기는 기름은 참으로 슬픔과 고뇌의 원천이다. 무릇 쾌락에는 처음과 끝이 있으니 성자는 쾌락에 처함을 기뻐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원성을 없애고 일체 인류의 행복에 뜻을 둔 성자는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영원한 신의 평화를 얻는다.
영원한 신의 평화는 자아를 아는 자, 악욕을 극복하고 사상을 정복한 자와 함께 있다.
명상에 숙달한 성자는 외부의 자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지고의 목적을 구하여 양미간 중앙에 시력을 집중하며,
콧구멍을 통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체내에 흐르는 에너지인 프라나와 아파나의 흐름을 중화하고 지각과 시력을 조화하여 욕망, 노여움, 공포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일체의 희생과 개전을 기뻐하는 나를 알며, 일체 온갖 세계의 대주(大主)인 나를 알며, 또 일체 생류(生類)를 어여삐 여기는 나를 알아 평안에 이른다.
자리에 단정히 앉아 몸, 머리, 목을 움직이는 일이 없이 보는 듯 마는 듯 코끝을 바라보고, 일신을 조용히 하여 두려움을 없애고, 청정의 다짐을 굳게 마음에 품고, 나를 생각하며, 차분하게 나를 그리워하면서 고요히 앉으라.
이렇게 마음을 잡고 대아에 안주하는 자는 정숙, 장엄의 극인 천복에 도달하여 나 안에 살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식하거나 소식하고, 지나치게 많이 자거나, 수면부족인 자에게는 통일이 있을리 없다.
절도 있는 자에게는 밥 먹고, 행동하고, 잠자는 데에도 일체의 고통을 벗어나는 통일이 있다.
모든 망상으로부터 오는 일체의 욕망을 남김없이 버리고 감각의 움직임을 모조리 억제하면서 서서히 부디(진아)의 인도에 따라 확고하게 평온을 얻으라!
마음을 대아에 머무르게 하고 용감하게 다른 일체를 생각지 말 것이다.
이 심경에 도달하면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어 안주하고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고뇌에도 괴로움 당하는 일이 없다.
이것이 일체 발고의 선정이니라.
견고한 신앙과 불굴의 의지로써 이 요가를 닦으라.
조화된 통일 자아는 일체 생류에 내재하는 대아를 보며, 대아에 내재하는 일체의 생류를 본다.
도처에서 나를 볼 수 있으며, 나 안에서 만유를 볼 수 있는 자를 나는 놓치는 법이 없다.
그도 나를 놓치지 않는다. 아아, 알쥬나여! 일체에 내재한 빛나는 자아가 희비고락에 초연하여 무슨 일이나 똑같이 관할 수 있다면 이 자야 말로 참 통각을 얻은 자이다.”
스승의 진상에 대하여 묻는 알쥬나의 물음에 답하여 신 크리슈나는 계속 힘주어 말한다.
“아아, 너 용사여! 만유를 유지하는 내 신성을 알라.
일체 생류의 태궁인 네 신성을 알라.
나는 전 우주를 낳는 원천이면서 또 전 우주를 소멸시키는 자이다.
만유는 실에 꿰이는 진주처럼 나에 의해 꿰어진다.
나는 물의 맛, 일월의 빛, 에텔의 소리, 인간의 정기, 지상의 청향, 불의 화염, 일체 생류의 생명, 고행자의 행심이다.
나는 현 중의 최현, 광휘중의 대 광휘이다. 나는 또 일체 욕망에 초연한 강자 중의 최대 강자이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을 가지고 나 스스로를 덮는다.
미혹된 이 세상은 불생불멸의 나를 모른다.
나는 과거서부터 있었던 것, 지금 있는 것, 다가오려고 하는 것을 모조리 알지만 아아, 알쥬나여! 나를 아는 자는 없다.
그들은 허다한 모순된 욕망과 혐오의 정에 홀리어 아주 혼미한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지순한 행위의 사람으로서 그 죄를 절멸하고 혼미인 모순에서 해방되는 자는 견고한 신념으로 나를 예배한다.”
알쥬나가 묻는다.
“신 크리슈나여! 영원한 자, 지상아(아디 아트마)의 지(知), 일체 원소의 지, 신들의 지, 희생의 지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임종시에 어떻게 하면 당신을 알 수 있습니까?”
신 크리슈나가 말한다.
“영원지고의 존재를 자각이라고 하며, 만물의 발생을 가져오는 것을 카르마라고 하고, 또 일체 원소의 지란 나의 멸성을 말한다.
신들의 지란 생명을 부여하는 에너지, 희생의 지란 물질체를 띠는 나이다.
임종할 때만이라도 나를 생각하면서 육체를 버리고 가는 자는 내 존재 안에 들어온다.
의심하지 말라. 누구일지라도 육체를 버리는 임종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간다.
때문에 항상 나를 생각하면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나를 생각하면서 싸움을 걸라. 마음과 자아를 나에게로 정한다면 의심 없이 나에게 온다.
불가사의하고 태양처럼 어두움을 꿰뚫고 빛나는 태초의 대 예언자, 전지전능자, 만유의 통치자, 원자보다도 작은 자, 일체 만유의 유지자를 생각하는 자.......
그는 마음을 가지고 미간에 생기를 집중하면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지상 신성한 대령에 간다.
나는 한마디로 도를 네게 알린다.
베다를 아는 자가 불멸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
5관(다섯 문)을 닫고, 생각을 하나로 모아, 영원의 표상 ‘아움’을 부르면서 나를 생각하고는, 육체를 벗어던지고, 이 세상을 떠나는 자는 지고의 길을 가게 된다(行).
인류는 범(梵)에서 출발하여 허다한 세계를 들러서 지상에 돌아온다.
그러나 내게 오는 자는 재차 탄생되는 일이 없다.
범의 하루는 지상의 일천 년이다.
범의 서광이 빛나자 안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이 태어나고 범의 밤의 막이 내려지자 일체는 반드시 안 보이는 것에 녹아든다.
일체 생류는 생멸이 반복되고 밤이 오면 괴멸되며, 서광이 비치는 때를 당해서는 새로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알라. 현현되는 것보다 더욱 높은 자가 존재함을. 현현하지 않은 것은 불멸로서 지고의 도(道)라고 불려진다.
이것에 도달하는 자는 불퇴전이다.”
신 크리슈나는 더욱 위대한 과학, 최대의 신비에 관하여 가르쳐 주신다.
“본래의 베다 즉, 희생, 순결, 기진(寄進)을 알고 행하는 마음의 통일자는 지고 태초의 세계에 이르리니 이 신비를 믿지 않는 자는 내게 도달할 수가 없다.
망상적 희망, 망상적 행위, 망상적 지식을 가지는 몽매한 인류여!
그들의 이성은 비뚤어져 버리며, 아수라 나찰의 성질로 기울어져 일체 존재의 대 주인인 나의 지상성(至上性)을 모른다.
공연히 그들은 나를 인간의 모습을 가진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생류에 대하여 평등하다.
설령 악역무도한 자일지라도 일심으로 나를 예배하면 그 또한 옳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결정이 바르기 때문이다.
일심을 내게 정하고, 나를 섬기고, 내게 헌신하고, 내 앞에 꿇어 엎드려라. 그러면 자아가 빛을 발하여 지상 모적인 내게로 온다.
4대 쿠마라, 7대 성자들은 나의 떨치는 우주 권능에 참여게 하기 위하여 나의 성, 나의 마음에서 태어났다.
지상의 인류들은 그들에 의하여 대대로 새로 나오게 된다.
아아, 알쥬나여! 나는 자아(自我)이다. 일체 생류의 태시초이다.
태양신 등 중에서 대신 비슈뉴이다. 폭풍우의 신들 중에서 마리시텐이다.
일체 베다의 시이며, 황신중의 대 황신인 인드라이다.
일체의 여러 신들 및 대성들의 기원이다.
나는 모든 학문의 목적인 성스러운 하나이며, 힘의 말씀인 아움이다.
나는 희생, 사랑, 지력, 길이며, 쿤달리니이고,휴게소이며, 보장(寶藏), 불멸의 종자이다.
나는 일체를 탐식하는 죽음이며, 태어나는 것 일체의 원천이다.
나는 여성의 우아한 소문, 애틋하고 나긋한 이야깃거리, 기억, 인종, 관용이며, 사기 중의 대 도박, 빛나는 빛 중의 최대 광휘. 승리, 결정, 참되는 것 중의 진리이다.
나는 천사들 중의 대 천사이며, 판도우 족 중의 알쥬나이고, 신인 중의 대 시인 우사나이며, 또한 비밀 중의 대 침묵이다.
아아, 그러나 알쥬나여! 이것들 일체를 다 알았다 해도 무엇하리요?
나는 내 한 토막을 가지고 일체 만유에 편재하면서도 그러나 초연히 존재하고 있다.
나는 현자의 자아에 살며, 황황한 지혜의 동물로써 무지의 소산인 어두움을 깨트린다.
어느덧 알쥬나의 미혹은 사라졌고 그래서 또 부탁한다.
“원컨대 신이여, 불멸인 당신의 자아를 보여 주십시오.”
신 크리슈나가 말씀하신다.
“만물이 내 안에서 혼연한 하나임을 보라. 내 너에게 신안을 열어 주겠다. 보라! 내 지존의 통일을.”
그때 창공에는 별안간 몇 천의 태양이 빛나듯이 지존의 영광이 넘치면서, 신들 중의 대신의 육체 안에 존재하는 하나인 것이, 폭발하여 전 우주의 삼라만상이 되는 대 광경이 전개된다.
알쥬나는 너무도 놀라 떨면서 두발을 곤두 세우고 합장한다.
창공에 나타난 것은 대해와 같은 불꽃의 입을 가진 무한 절대한 모습이었다.
입, 팔, 다리를 무수히 가지며, 일월과 같은 눈은 무수히 빛나며, 전세계를 불태워 버리는 듯했다.
하늘도 땅도 3계도 이 무한히 거룩한 모습 앞에서는 움츠러든다.
신들의 무리는 큰 품안에서 ‘만세 만세’외치고 있으며, 그 찬양의 합창 소리는 대 우주에 울려 퍼진다.
쫙 벌린 양턱 사이에는 히말라야 산같이 솟아 있는 이들이 보인다.
그 안으로 솰솰 큰 강의 바다에 주입됨과 같이 드리타라 시트라와 그의 여러 장군, 그 대군이 흘러 들어간다.
그 이에 짓씹혀 그들의 목은 바삭바삭 부수어져 좔좔 주르륵 지상으로 떨어지는 그 모습이 보기에도 끔찍하다.
알쥬나는 찬탄하여 말한다.
“신이여, 당신은 팔방으로 입을 벌려 일체를 들이마시고, 불꽃의 혀를 내밀어 인류 일체를 핧아버리시니, 그 영광은 하늘에 찼고, 전 우주는 지금 불타 오릅니다.
어여삐 여기소서, 지고의 신이여! 나는 어지럽습니다. 흘러나오는 당신의 생명에.......”
그러자 대신(大神)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시간이다. 이 세상을 황폐케 하기 위해 싸우려고 진 치고 있는 무사를 한 사람도 살아 남기지 않겠다.
죽음에서 빠져나와 살아 남는 것은 너 혼자뿐이다.
그러나 일어서라. 내가 이미 이와 같이 적을 타멸했다.
너는 내 왼팔의 구실을 하여 나아가서 외적 살육을 감행하라. 겁내지 말고 그들을 전멸시켜라! 싸워라!”
알쥬나는 대신을 예배하며 말한다.
“아아, 신이여! 원컨대 다시 가상의 마부로서의 전 모습을 나타내 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홀연히 창공의 거룩한 모습은 지워지고 크리슈나는 마부인 본래의 모습으로 알쥬나 옆에 서 있다.
신 크리슈나는 가상의 모습인 마부로 돌아와 말씀하신다.
“내 은혜에 의하여, 너는 자아 통일의 최고의 모습을 예배했다.
너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러한 광염 무한한 것을 볼 수 있는 자가 없다.
겁낼 것 없이 용약하여 재차 친한 나의 모습을 보라!”
알쥬나는 또 신 크리슈나에게 물질과 정신에 관하여 묻는다.
신 크리슈나는 말씀하신다.
“영원 보편의 에텔이 아무 것에도 영향받지 않듯이 미묘 유현한 대아는 이르는 곳마다 형체를 통하여 형체안에 살며 그 어느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흡사 한 개의 태양이 온 땅을 비추듯이 물질계의 대주는 전 물질체를 비춘다.
지혜의 눈을 열어 물질체와 내재 주와의 차이를 인식하고 또 물질로부터 인류가 해방되어야 함을 확인하는 자는 지상아에 득달한다.
나는 일체지에 우월하는 지상지를 알린다.
내 태궁은 대자연이다. 내 이 태궁에 씨를 뿌린다.
이것에 의해 일체 생류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나는 씨뿌리는 아버지이다.
리듬(律性), 동성(動性), 타성(惰性)은 내 속성으로서 최초의 물질인 것이다.
이 셋은 불멸의 거주자를 그 안에 감싸고는 굳게 결합되어 있다.
리듬성(사트바 성)은 청정하고 빛을 발하며 건전하기 때문에 지복과 지혜에 소속되어 다른 두 속성이 결합한다.
동성(활동성)은 애욕성이다. 생명집착, 생명기갈이 원인이다.
행위의 집착으로서 육체 안의 거주자를 묶는 것은 이것이다.
타성(타마스 성)은 무지의 소산으로서 육체 안의 거주자를 홀리는 것이다.
타성은 무관심, 오만, 치둔으로써 육체 안의 거주자를 얽어 속박한다.
그런데 3속성이 분해할 때, 리듬성이 지배하면 그 사람은 대성자들이 사는 맑은 세계로 들어간다.
선행위의 업보는 리듬적이고 더럽힘이 없고, 동성의 업보는 고통이며, 타성의 업보는 무지이다.
육체의 여러 문에서 혜광이 빛나면 리듬력이 증가한다는 것을 알라.
영각자는 속성 이상의 것을 알게 됨으로서 내 성질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므로 중용을 얻어 속성들에 움직여지지 않고 아득히 이것들을 바라보고 속성들이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태연한 자는 스스로 비추어 고락에 변화되지 않으며 비난에도 칭찬에도 명예에도 불명예에도 초연하다.
그런데 육체에 쌓인 정신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신앙에는 3종이 있으니 순결, 애욕, 암흑의 신앙이 이것들이다.”
신 크리슈나가 최후로 말씀하신다.
“나를 사모한다면 내 은총에 의하여 너는 일체의 장에를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아견(我見)에 사로잡혀 ‘나는 안 싸우겠다.’고 한다면 너의 결심은 헛된 것이다.
무사의 천성은 너로 하여금 안 싸우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아. 알쥬나여! 전인류의 마음에 살고 있는 신은 도공이 바퀴를 돌리듯이 전 인류를 회전시켜가고 있다.
나는 최후로 극비 중의 극비를 네게 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때 적왕의 스승이 천리안과 천이통으로 보고 들은 전부를 왕에게 알리고 나서 말한다.
“나는 대 천인과 위대한 혼인 알쥬나의 대화를 듣고 참으로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아아, 대왕이시여! 내가 신의 가공한 위대상을 생각하면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통일의 신, 크리슈나가 계시는 곳, 천하의 영웅, 알쥬나가 있는 곳, 거기에는 번영, 승리, 영광, 영원의 도의가 보증됩니다.”
스승에게 설복당하여 드리타라 시트라는 싸움을 포기하고 알쥬나의 군문에 항복한다.
이상이 기타의 줄거리이다.
기타 (Gītā)는 인류 최고의 경전이라고 말해지며 이 내용의 실질적 설명은 제 2편 이하에서 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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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장 통각에의 길
1) 기타(Gita)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기타는 8.000여 년 전에(초인 티라크의 설) 신의 화신 크리슈나가 전쟁터에서 인도 정신의 비애에 고뇌하는 영웅 알쥬나로 하여금 놀라운 통각상태에 들게 한 대 교훈이다.
1세기의 대성자 상카라 챠리어(부다의 화신)는 그것에 대주석을 달았고, 20세기의 마하트마 간디는 그것에 감격하여 실업을 버리고 무폭력주의 정신단련 및 사회봉사(사챠그라하)의 지도자로 되어 빛났다.
대대로의 대성자는 한 사람도 기타의 감화를 받지 않은 자가 없다.
크리슈나는 팔레스티나에서 다시 화신하여 크리스트로 불리어졌다.
기타의 교훈은 다음의 진리를 말한다.
1. 인간의 존재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대 놀라움이다.
스스로 체험하는 수밖에 알 도리가 없다.
2. 지고의 목적에 일심 결정하여 물질에 탐착치 않으며, 결과를 구하지 않고, 의무에 용감하며, 나의 전부를 희생으로 바치는 자만이 인간 존재의 지상목적에 도달한다.
3. 인간은 불생불사의 존재로서 영원 보편의 실상을 나타내고, 만유를 꿰뚫는 하나의 실재의식에 도달하여 자유, 환희, 평한, 자애의 영광에 들게 되는 것이다.
4. 유한한 것은 인간의 참이 아니고 무명의 가상이다.
5. 마인드는 무명의 가상에 탐착하여 노여움을 일으키고, 노여움은 투쟁을 가져오고 투쟁은 기억(전생에 관한 기억)을 어둡게 하고,
기억이 어두워지면 이성의 상실이 와서, 이성 상실의 결과 사람은 아주 멸망한다.
6. 죽음도 병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명의 가상에 탐착하여 마음이 엮어내는 오류에 불과하다.
7. 만유는 유한무명이다. 영원불멸의 실재가 아니다.
8. 만유는 모습도 형태도 다 부서져 에너지로 될 때가 온다.
에너지는 빛으로 되고 빛은 실재에 흡수되고 에너지는 새로운 천지 만물을 만들어낸다.
9.우주만유는 진화의 주기율적 대 법칙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커다란 주기율적 변화는 일겁마다 돌아온다.
일겁은 크게는 몇 십억 년, 작게는 몇 만 년이다.
일대겁(一大劫) 말이 되면 천(天)도 지(地)도 말려 들어가 소멸한다.
물질 우주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수백억년이 지나고 있다.
언제 물질우주가 또 짓이겨져 버릴지도 모른다.
10. 중겁 말은 이미 돌아와 있다. 지구의 표면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중겁 말은 20만 년 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을 대서양에 가라앉혔다.
다가오는 중겁말도 그 카르마적 재판으로서 대륙이 일부를 바다 밑바닥으로 침몰시키고 새로운 대륙을 대해로부터 치솟아 오르게 한다.
11. 지구는 태양계 내에서 2천 수백 년에 한 번씩 주기율적인 변화를 겪는다.
12. 인간은 700~1,000 년마다를 한 주기로 해서 죽은 후에 재차 지상에 태어나 과거의 사상 행위에 준한 각각의 카르마를 자기의 운명으로 한다.
13. 인간의 재생은 진화과정의 필수 조건이다.
육체를 벗어 던지면 아스트럴체로 되어 아스트럴계에 살고,
아스트럴계를 벗어 던지면 멘탈체로 향상되어 멘탈계의 존재로 되고,
멘탈계의 상층부 코잘계에 도달하여 재차 사람의 자식으로 되어 재생한다.
코잘계에서 사자(死者)는 원자의 미(微)로 화신하여 인연 있는 자를 양친으로
삼아 어머니의 태궁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인종 간에만 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백인의 코잘체가 동양인의 자식으로 태어나거나 동양인의 코잘체가 백인의 자식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14. 멘탈체를 벗어 던지고 광명체 부디로 된 자는 인류의 빛으로 재생할 때 숭앙받는 자로 되어 태어난다.
더욱이 카르마를 극복한 자는 지상아의 면목을 나타내어 자유를 얻고 불퇴전에 정착하며 아무 것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그가 재생하기를 원하면 성자의 영광으로 태양계 내지 우주 경륜에 참여하게 된다.
15. 인간은 원래 불사불멸의 광명체였으나 희생의 법칙에 의하여 가장 둔중한 육체를 뒤집어쓰고 생류 중 가장 고생을 많이 하는 존재로 되었다.
더구나 육욕 방종한 지위로 전락하여 이성 감정의 훈련 순화를 거쳐야만 본래의 천사적 존재보다도 아득히 우수한 존재로 될 수 있고, 신들과 천사를 거느리며 우주 재건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16. 지구상 일체 생류의 진화를 위하여 지구에는 영왕(사나트 쿠마라: 금성 출신의 대 초인)님이 임하여 있고, 마누가 있고, 구세주가 있으며, 그 아래 7대 성자가 있다.
7대성 밑에 60명의 대사들, 그리고 수제자(첼라)들이 있다.
인류는 이들 천인들에 의하여 지도받으면서 진화하여 실재(大神)의 우주 경륜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17. 회의, 공포, 증오, 물적 탐착은 본래 인간을 기만하는 무명의 소산이다.
악마도, 아수라도, 야차도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18. 인간은 자기만이 행복하게끔 창조하여 있지를 않다.
희생은 인간 최고의 필요조건(善, 德)이다.
개인주의적 부의 획득은 인간의 지상권을 포기(모독)하는 것이다.
19. 개인은 인류 전체의 진화 행복을 위하여 봉사해야만 한다.
20. 인류는 지상의 번영과 천상의 영광을 기뻐하도록 되어 있다.
빈곤의 극복, 번영의 실현은 인류가 해야 할 의무이다.
21. 인류는 드디어 지구 영왕(로고스)인 사나트 쿠마라에 의하여 통치된다.
사나트 쿠마라는 우주신의 의지를 지상에 실현할 수 있는 인류의 진화를 재촉하고 있다. 그 경륜에 의하여 구세주가 나타나고 천인과 인류와의 협력시대가 시작된다.
2) 통각에의 4칙(四則)
위의 21가지 항목은 기타가 가르치는 대강을 설명한 것이지만, 더욱 자세히 보면 기타는 인간 사상. 행위의 4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이 4칙은 옛날에는 보살의 4섭법(攝法)으로서 도원(道元)도 정법안장(正法眼臧) 중에 말하고 있지만, 현대인을 위한 구체적 지시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7대성 중의 한 사람이고, 지혜와 사랑을 대표하고 있는 구세주의 후계자인 쿠트후미 랄 싱(K.H.-전생에 피타고라스) 대사의 가르침을 기술한 것이며, 모든 요가의 묘득을 결합하고 있다.
가. 마음의 문을 열라 또는 식별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사람은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한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곧 실망한다.
사랑하는 일도 있으며, 미워하기도 한다. 자기를 불행하다고 하여 좌절하고 자기에게 재력이 있다고 여기면 자만한다.
마음은 항상 동요를 멈추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는 것이 마음이다.
가까스로 잘 되어 가는가 싶으면 운명의 물결에 뒤집혀지고 병으로 쓰러진다.
인간은 암중모색자이다. 개인뿐만 아니다. 국가도 암중모색 외교를 하고 있다.
이리하여 세월은 쓸데없이 흐르고 카르마의 무거운 짐은 점점 더 어려운 것으로 되어 간다. 왜 사람의 마음은 확실한 행복을 못 잡을까?
진실치 못한 것에 달라붙어 있는 마음이 진실한 것을 차단하는 질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대로 모든 대사들이 엄숙히 경고를 해 왔다.
마음은 진실을 배반하는 최대의 배신자이다. 제자여, 이 배신자를 죽여라!
진실한 것은 마음의 배후에서 나온다.
마음의 배후에는 대사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그 이외에 진실한 사상은 없다.
대사의 사상이 내 것으로 되면 대사와 같은 것이다.
혼의 세계에서는 자기도 대사도 같은 것이다.
나. 행위의 준비
영계에서는 속임수는 안 통한다.
정의를 위한 정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면 영성의 진보로는 안 된다.
사랑을 위하여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면 신성은 빛나지 않는다.
올바른 일을 힘써 행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며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의 나타남이다.
선의 행위도 사랑의 봉사도 보수를 목적으로 하면, 이성이 건방지게(삐뚤어지게)되고 신성에는 구름이 낀다.
기타는 이 일을 극력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다. 일체에 초연하라고 하며 ‘ 이 세상은 희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세상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타는 ‘신은 항상 행위하며 권태로와 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팔방으로부터 내게로 온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다. 행위에 관한 주의
이것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평정(고요), 말의 순결
초조해 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맑고 고요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달성의 비밀을 할 수가 없다.
반사적으로 성급히 말을 하면 사물을 그르치고 사람을 다치게 한다. 침울한 마음으로 불유쾌한 일을 얘기하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을 우울하게 할 권리를 누가 부여받고 있느냐?
차분하게 맑은 마음으로 가만있으면 나쁜 소문은 나지 않는 법이다.
긴 잡담을 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잡담은 반드시 악덕을 낳아 도를 지향하는 자를 그르친다.
비판은 쟁론이 된다.
아무 것도 안 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방 “그것은 안 된다.”라고 하거나,
“나는 네가 싫다.”라고 하거나, “너는 아직 신앙이 모자란다.”라고 하거나,
“덕이 모자란다.”라고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아니다.
진리는 개인의 싫음, 좋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너는 아직도 불성을 얻지 못했다는 그런 말을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온화한 표정으로 흥분치 말고, 지상아에 도달하는 일을, 비유를 통해 친절히 얘기해 주라.”고 말씀하신다.
아이가 졸렬한 짓을 하고 있으면 그것밖에 능력이 없는 것이므로 침묵하여 보고만 있을 것이지 좋다 나쁘다를 말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 발전해 나가도록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 조금씩 적절히 지도해 가야 한다. 모든 성공에는 침묵의 비밀이 있다.
(2) 극복
불순한 마음을 극복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잘못된 말을 하며, 틀린 행위를 한다.
(3) 미신의 포기
영성의 진보를 차단하고 또 행위를 그르치게 하는 것은 완고하고 고리타분한 미신이다.
이것을 깨끗이 포기하지 않고서는 진보도 진실도 없다.
완고한 미신은 기성 종교에 달라붙어 있다.
의식(儀式), 관례, 교의신학에는 미신이 꼭 붙어 있다.
그것들을 믿지 않으면 신앙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미신을 강요하는 것이다.
또 기도, 순례, 단식은 의지를 강화시키는 경우에만은 해도 좋지만 의지를 말살하는 경우가 될 때에는 미신이 된다.
결코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아를 불러내는 기도는 옳다.
신의 자장에 자화 되는 자기를 발견하려고 하는 일심 결정의 기도는 자기를 성화한다.
성화하여 자력을 떨치기 때문에 사물이 신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욕심이 있어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순례는 망상을 포기하고 올바른 명상을 위한 것이면 좋다.
그러나 이익을 받으려고 생각하는 순례는 인간을 왜곡시키고 미신만 높여 준다.
성스러운 자는 방안에 홀로 앉아 있어도 천하를 알고 천명을 안다.
단식하는 것은 다식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탐하고 많은 술을 마시면 자연히 단식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다면 병사할 수밖에 없다.
수행을 위하여 영성향상을 위하여 단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자기 뼈까지 굶주린 개에게 먹이로 주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성자는 말한다.
엉터리 행자는 사람에게 미신을 강요하여 물불 단식의 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이렇게 하라고 사람이 말하는 데에는 편견과 미신이 딱 달라붙어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진아가 빛나 나오는 일이다.
진아의 빛남을 제쳐 놓는다면 모든 일은 잘못이며 미신이다.
(4) 인욕(忍辱)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매도를 당해도 초연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욕을 듣는 것은 카르마의 탓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인내하여 자기의 본분에 확고히 서 있으면 언젠가 뜻밖의 영광을 얻게 된다.
카르마의 힘은 초연한 자의 정신력에는 이겨내지 못한다.
재앙도 또 카르마 탓이다.
어떤 불행을 만날지라도 마음을 진정시켜 참고 있으면 카르마 쪽이 지고, 뜻밖의 길운으로 바뀐다.
끈질기고 모진 기운으로 공격하는 카르마도 있지만 상심해서는 안 된다.
쾌활한 희망이 신처럼 빛나 나오면 카르마는 도리어 나를 살려주는 도움이 된다.
카르마의 방해를 극복하면 나타나는 것은 신의 은총이다.
울며 기도하기 보다는 빛내며 용감이 맞서는 쪽이 훨씬 우수한 카르마 극복법이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카르마 극복의 지상 최강의 수단이다.
뭇매의 아픔을 은덕이라고 생각한다면 카르마는 변하여 은덕이 된다.
장애. 고난은 자아를 카르마에 초극시켜 높은 하늘에로 진화시키는 신의 암호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도 카르마에서 온다.
병을 겁내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물질에 의존함은 카르마로 하여금 방자하게 날뛰도록 해주는 것이다.
악의 힘은 어떤 범위에 국한된다.
영양물을 마구 취한다 해서 효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손에 쥐이면 길가의 풀도 묘약이 되고 성자의 말씀을 기뻐하면 온갖 영양보다도 더 큰 체력을 부여받게 된다
. 결핵균도 암도 두려워하면 점점 맹위를 떨친다.
공포심은 유해하고 불필요한 세균을 생산해 낸다. 인간은 본래 조물주이기 때문이다.
신의 관념이 우주 만물로 물질화했다.
자기가 신에 통하는 관념의 소유자가 된다면 불필요. 유해한 병균은 사라져 버리고 유익한 에너지가 부활한다.
장년의 한 결핵환자가 “결핵균은 현미경에서 보는 그대로 사실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고 말하고는 결핵균의 실재성을 믿고 살균을 위하여 사방팔방으로 손을 뻗쳐 양약을 구해와 복용했지만 곧 죽고 말았다.
어떤 소년이 결핵에 걸렸으나 내 저서 ‘성자 새로 탄생되다’를 읽고 말았더니 그 믿음으로 깨끗이 전쾌되었다.
나의 소년 시절 한 친구가 결핵에 걸렸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섭생은커녕 바위산 위에 하늘을 보고 벌렁 누워 있었더니 병이 나아 버리고 말았는데 70세인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병에 대한 겁은 온갖 병의 원인이며 완고. 사치. 악벽도 또 암이나 당뇨병의 생산자이다.
악벽은 마음 구석에 숨어 있다가 언제나 교묘한 방법으로 갖은 못된 병을 만들어 나간다.
일마다 사람이 말하는 데에 나서서 반사적으로 군소리하는 자,
항상 불행을 짊어지고 다니는 자는 언제나 가난 귀신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병적으로 되어 간다.
소박하고 고요히 빛나고 있으면 절도와 조화가 생겨 병에 걸리는 일은 아주 적은 법이다.
(5) 일신 집중, 지조, 견고
어떤 일을 하던 일심집중, 의지를 견고하게 어떠한 유혹이 있을지라도 이것에 굴하지 않는 기개로 덤벼들어야만 한다.
(6) 진실한 신앙
대사를 믿는 일은 자기를 믿는 일이다.
자기의 힘이 의심스러워도 자기를 살리는 대사의 힘은 절대적이다.
대사에 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이다.
자기를 의심하고 우습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안에 있는 신성. 성화를 부채질만 하면 불꽃은 서서히 타올라서 확신의 힘이 자기를 대사에게 이어준다.
이리하여 어느 사이엔가 자기가 대사와 동격으로 된다.
이것이 통각(요가)의 달성이다.
라. 생사 초월과 자유의 체험
방종과 자유는 다르다. 자유를 주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가 나를 생사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얻게 한다.
자유를 체득하면 지상아의 영역으로 초탈한다.
지상아는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다. 일체의 소박을 초월한다.
지상아 의식은 아무 것에 의해서도 막혀지지 않는 보편의식이며,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미래를 꿰뚫어 보며 공간을 초월하여 일체를 안다.
환희. 평안은 자유의 특권이다.
육체를 벗어나 안 보이는 영체가 되려고 할 때,
또 영체를 물질화하여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할 때 자유롭게 뜻대로 가능케 된다.
때문에 생사에 초연하여 진리에 안주하려고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상의 4대 요령을 지키면 인간은 놀라운 비전을 받는다.
비전에 의하여 사람은 일대 질서와 합치되고 신생의 체험에 들며 참으로 놀라운 힘에 연결된다.
어떻게 자기에게 이러한 힘이 나오는가 하고 스스로 놀라게 되는 경험이 속출하여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구원 받아 간다.
사람은 본래 무한의 힘과 광명의 저수지에 연결되어 있지만 암우한 마음이 그것을 방해하여 스스로 대 근원으로부터 지혜와 힘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 설파된 가운데에는 아직 명상에 관한 교훈이 감추어져 있다.
명상은 생의 과학적 기술이다.
우리는 이것을 체득하여 확실히 비전의 과정을 밟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는 우선 제3편의 ‘실제적 종합요가’에 의하여 통각이 어떠한 것인가를 배우고, 이어서 나아가 심각한 명상의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제4편 ‘인체의 신비’와 제5편의 ‘호흡의 과학’에 관하여 예비지식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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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장 실제적 종합 요가
1) 종합 요가
기타는 종합요가의 성전이다.
요가에는 몇 종류가 있다.
하타 요가, 쥬냐나 요가, 박티 요가, 라쟈 요가, 만트라 요가, 라야 요가, 아그니 요가 등이다. 크리야 요가는 라쟈요가 경전에도 나타나 있고 또 기타에도 나타나 있다.
오늘날은 옛날의 수행법으로 요가의 실수를 하는 것은 무리이다.
우리들은 히말라야 산의 동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가(在家)의 수행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다.
인도의 스승들은 “작고 고요한 방이 있으면 히말라야의 동굴에 가서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가르치는 바이다.
시정(市井)의 수행은 산의 수행과는 달라서 퍽이나 실제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교시한다. 오늘날 이 대 사명에 최고 완전한 지도자로 임하고 계시는 대사가 듀알컬이다.
듀알컬 대사는 옛날의 수행법을 강요하는 일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종합적이고 실제적이고 누구에게도 효과가 있으며 또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지상아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실무적 요가이다. 그래서 실제적 요가란 어떤 것인가를 먼저 대강 훑어 보고나서 다음에 정확한 통각의 체험에 드는 명상의 기술을 수행하기로 하자.
2) 실제적 요가의 예(1-1)
16세의 여름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초로 만든 데드마스크 같은 아버지의 즉은 얼굴이 신경에 달라붙어 몇 밤이 지나도 그 모습니 떠나지 않았다.
‘만유의 실재는 죽음이다. 모든 것은 죽음에 빨려 들어간다. 아름다운 것, 기운찬 것은 가장 교활한 죽음의 가상이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있으니 죽음의 상이 보여 왔다. 불의 대양의 노도가 미쳐 울부짖고 소용돌이치는 광경이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틀어박혀 오는 날도 새는 날도 죽음의 위협에 덮여져 지냈다.
‘종교는 이 공포를 속이기 위하여 창작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괴로워서 ‘설사 인간의 창작이라 해도 아미타여래님 같은 심경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불단의 설합에서 경문을 찾아내고 신단에서 제 축문을 꺼내어 읽어 보았다.
문장은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동경에서 큐우슈우의 집에 돌아와 있던 누님이 남몰래 믿고 있던 기독교의 성경을 주면서 읽어 보라고 했다.
학교에서 기독교는 사교라고 들었기 때문에 받은 성경을 집어 던졌다.
누님은 마태복음 제5장을 가리키며 “여기만 읽어봐”하며 졸랐다.
읽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슬퍼하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쓰여 있었다.
심원한 무엇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다음의 문구를 읽으니 힘이 쭉 빠졌다.
‘그 사람은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것은 거짓말이다 후대 사람들이 멋대로 써 덧붙인 것이다.
크리스트는 우주 실재의 신비를 참시하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좋다. 참뜻을 발견해 보자.”고 나는 정좌 했다.
오랫동안 일심을 집중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고 벌써 해는 지고 방안은 컴컴해져서 실망을 느끼면서 흐믈흐믈 내려앉았지만
다시 집중하여 파고들었다.
그러자 곧 부드러운 빛으로 방안이 밝게 되었다. 램프의 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평화로운 기분을 자아내는 불가사의한 빛이었다.
경이와 위안이 섞인 느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다.
키가 크고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순간 크리스트라고 느꼈다.
외포 경건의 생각에 오싹하여 바닥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무서운 폭풍이 소리도 없이 덮쳐와 어디로인가 나를 날려 보낼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자 “두려워 말라 내가 왔다.”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평소의 괴로움도 슬픔도 들끓는 쇠병의 마개가 퉁겨져 나가듯이 날아가 버리고, 말로는 표현 못할 힘과 희망이 솟아났다.
크리스트도 빛도 사라졌지만 희망과 힘이 되살아난 나는 “아아, 이것이 종교다!”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속에 생겼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발심의 첫 경험이다.
이 체험의 빛은 오랫동안 나를 이끌어 주었다.
이것은 통각을 얻은 실제 경험의 하나를 예기한 것이다.
히말라야 산에서 십수 년 고행을 하지 않아도 소리 없는 어두컴컴한 시골 방에서 16세의 아이가 통각을 얻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순간의 통각에 드는 사람들이 있다.
3) 실제적 통각
만사 잘 돌아가지 않고 마음도 외롭고 자신도 없고 고뇌가 뼈에 스며든다.
그런 상황이 되었다면 방향도 요량도 틀려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일이란 모조리 망상뿐이다.
그러나 우리들 안에는 다른 데에 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미료 정확한 것이 있다.
일을 찾아다니고 사람과 의논하며 돌아다닌 동안에는, 미료 정확한 진짜는 미광조차 비추어 주지 않는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하루 밤 고요히 명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일각 천금의 묘를 나타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 그것이다.
명상은 생사결단하고 덤비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사결단 하게 되면 생사를 초월하여 해야만 할 오직 하나의 본분에 일심을 집중할 수가 있다.
명상이 안 된다면 내 본분을 대사에 현시해 받게끔 또 생사결단이 되어야 한다.
백 년이 지나도 내가 참으로 해야 할 일을 나타내 주지 않으면 돌이 된 채 일어서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대사가 무엇을 나타내 줄 것인가를 확신하면서 기다려 보는 것이 좋다.
정좌하여 깊은 호흡을 하고 다음에 호흡을 멈추고 오직 일점에 시력을 집중하여 현시를 이끌어내 볼 큰 결심으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에 앞서서 빛이 나온다.
가만히 빛을 보고 있으면 환영이 나타난다.
고요히 가만히 그것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대로 해서 깊이 열리지 않는 법은 없다.
깊은 밤 암실에 혼자 앉는다. 그림자도 모습도 안 보이며 고요하다.
일심을 집중하고 있으면 홀연히 마음 안에서 빛나는 것이 있다.
등불이 어두운 방을 비추듯이 방 전체를 빛이 밝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신광. 영조의 정체, 도, 진리 그것 자체, 만물을 키우고 만물을 조화시키는 것도 이 빛이고, 이것은 우주 만에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다.
이렇게 되면, 사업에 실패하고 금전에 핍박받고 있어도 길은 뚫린다.
이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하루 밤 새에 통각을 얻을 수는 없다.
욕심을 버리고 생사결단하고 죽어 있는 것처럼 고요히 가라앉지 않고서는 이 체험으로 비약할 수가 없다.
이 체험을 지속적으로 가지며 항상 신광. 영조의 본체를 밝히는 것이 요가이며 통각이다.
그를 위해서는 프나나야마의 호흡을 수련하며, 다라나(집중), 디아나(명상)의 경지로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https://blog.naver.com/jjhhope38/22236382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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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장 - 호흡의 과학
1) 호흡과 프라나
기타(Gita)는 호흡의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육체를 기르기 위하여 음식에 관한 것은 생각하고 있지만, 호흡의 문제에 관해서 는 과학적으로 거의 무지하다.
음식물을 취하는 일을 필요하지만 먹는 법 하나 때문에 몸을 망치고 병을 초래하며 또는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호흡도 필요하지만 그 방법 하나가 잘못되면 건강을 파괴하고 드디어는 요절을 하는 일도 생긴다.
호흡에 의하여 산소를 흡수하고 혈액을 정화하는 일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고혈압으로부터 구제받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다.
산소가 혈액을 정화한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인간이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단한 사실이 숨어 있다.
그것은 3계를 꿰뚫는 인간 생활은 호흡의 비의(秘義)에 의하여 행해지는 정신적 에너지로써 가능케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숨에는 마신다. 멈춘다. 내쉰다. 고 하는 세 가지 작용이 있어서 공간과 시간의 약속에 의해 생기는 특수 리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사실을 모르면 호흡은 무정부주의적 반역 상태로 빠지고 건강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위대한 기능이 일어나질 않는다.
특수 리듬으로 호흡하면 프라나의 미묘한 결과가 일어난다.
프라나라고 하는 것은 흡속과 호식 안에 들어있는 주관적 요소이다
주관적으로 인간은 대우주에 통한다.
때문에 프라나를 우주심의 실질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리듬 호흡에 의하여 우리의 에텔체(프라나 체, 또는 활력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큰 것이다.
학도는 이 점을 잘 배워 이 미묘한 결과가 생리적 결과보다도 훨씬 유력한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힘은 두 방면의 결과를 낳는다.
즉, 생리적으로 좋은 결과와 에텔체의 좋은 결과이다.
에텔체는 호흡 연습의 방법 여하로 특별한 리듬을 일으킨다.
이런 까닭에 호흡은 장기간에 걸쳐 육체를 망가트리거나 강화하거나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리듬 호흡은 신체의 일곱 챠크라에 대단히 좋은 효과를 낳는다.
예를 들면 호흡하면서 배꼽(태양총)을 염상하고 있으면 거기에 활력이 생겨 정서성이 강화되고, 제2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신비적 현상이 일어난다.
또 두뇌에 의식을 돌려서 명상을 하고 있으면 송과선이나 점액선(뇌하수체)의 활동을 일으켜 앞서 설명한 대의식력이 각성한다.
매일 의지를 굳게 하여 올바른 리듬으로 규칙적으로 해 나가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항에 대하여 다음에 설명한다.
가. 리듬 호흡을 할 때는 정확하게 할 것
먼저 웃 가슴에 숨을 빨아들이고 이것을 내려서 중 가슴에 빨아들이고 이어 아랫배에 빨아들인다.
그리고 아랫배에 숨을 채워 멈추었다가 숨이 답답해지기 전에 어깨를 올리며 아랫배를 느슨하게 하면 편안해진다.
다음에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이것을 리드미컬하게 해야 하지만 흡. 지. 호의 시간은 사람에 따라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달리해야 한다.
무리하는 것은 금물이다.
나. 숨을 멈추고 있을 동안
침묵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중요한데 침묵의 목소리는 외부의 소리가 아니고 에텔의 떨림이다.
다. 자기 자신을 혼이라고 생각할 것.
리듬을 주는 자라고 생각할 것. 침묵의 목소리 그 자체라고 생각할 것.
라. 이 경우 눈은
코끝을 보든지, 시력을 미간에 집중하든지 하라.
그리고 눈을 깜박이지 않는 연습을 할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이 단순한 방법으로 호흡의 연습을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으로 육체, 에텔체, 아스트럴체의 순화가 일어나며 힘이 축적된다.
나아가 간단한 방법으로 신경을 정화시키고 질병을 고치는 호흡법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실제의 예를 들어 보이겠다.
2) 신경 정화, 치료의 호흡
리드미컬한 호흡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신경은 더러워져 있거나 터무니없는 버릇이 생겨 버려 건강을 해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식을 하거나 하루에 술 한 되를 안 마시면 못사는 사람, 신경쇠약에 빠지는 사람, 발광해 버리는 사람, 나태한 생활, 삐뚤어진 자 등의 신경은 오염되어 있고 또 버릇이 붙어 있다.
한 되의 술을 안 마시면 못사는 사람과 같은 자는 생리적으로 자연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경이 변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신경이 조정되고 맑아지면 스스로 술을 거부하게 된다.
다음에 셋은 신경 정화 호흡에 관한 것이다.
가. 카파라바티
이것은 과학적으로 중요한 기술로서 이것에 의하여 신경은 정화되고 뇌하수체는 청소되며, 체력 정신력 지력이 현저하게 활발해진다.
이것을 하는 데에는 좌선의 결가부좌로 앉는 것이 제일 안정적이 됨으로 가능한 이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보통의 호흡에서는 들이쉬는 숨이 주(主)가 되고 내쉬는 숨이 종(從)으로 되어 있으나 카파라바티에서는 그 반대로 한다.
즉, 들이쉬는 숨 1, 내쉬는 숨 4의 비율로 한다.
우선 자리에 앉아 척추와 목을 똑바로 세우고 양 코로 강하게 공기를 빨아 복부 근육을 급히 내민다.
다음에 복부 근육을 이완시켜 서서히 코로 숨을 낸다.
이것을 되풀이 하는데 복부를 돌출시키는 것은 동적이고 이완시키는 것은 수동적으로 부드럽게 한다.
이렇게 10회 하는 것을 한 차례로 치고 매일 조금씩 늘려 나가 숙련이 되면 120회 까지 점차 늘려 나간다.
몇 회를 하고 나면 땀이 나기 때문에 잠시 쉬어도 좋다.
그 자리에서 3분간에 세 차례씩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수 중 복부 근육에만 주의하고 복부 팽창과 수축을 기분 좋게 할 것. 익숙해지면 배꼽만 생각하고 있으면 스스로 진행된다.
이 실수에 의하여 전 신경이 정신적 활동을 일으키고 배꼽에 정신 에너지인 쿤다리니가 축적된다.
그러면 마음의 눈으로 보면 빛이 배꼽에 비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가스가 방출되고 다량의 산소가 흡수되어 혈액이 신선해진다.
이 호흡을 하면 냉증에서 오는 일체의 병을 고치고 또 노쇠를 막는다.
이 기술은 신경을 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챠크라를 각성시키며 프라나야마를 일층 효과적으로 만든다.
때문에 프라나야마를 하기 전에 이것을 2~30번 하면 좋다.
숙달되어 5분정도 하고 있으면 황홀해지고 좋은 기분이 된다.
나. 좌우 비공 교대 호흡
이 방법은 엄지로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왼 콧구멍으로 강하게 숨을 빨아들이고 될 수 있는 한 숨을 멈추고 있다가 오른 콧구멍으로 천천히 내뱉는다.
이어서 그것과 반대로 왼콧구멍을 막고 오른 콧구멍으로 숨을 강하게 빨아들인 후 멈추었다가 왼쪽으로 천천히 뱉는다.
이것이 숙달되어 많이 하게 되면 몸이 가벼워지고, 식욕이 증가하며, 머리에 신비한 소리가 들리게끔 된다. 그렇게 되면 멈춘다.
다. 입으로부터의 호흡
입술을 오무려 내밀고 입으로부터 서서히 공기를 빨아들인다.
이때 공기가 목의 후벽에 접촉되어 흘러들 듯이 빨아들인다.
다 흡입하였으면 입을 닫고 아랫배를 내밀고 숨을 멈춘다.
답답해지기 전에 입으로 숨을 내쉰다.
이것은 소화불량을 고치고 또 그 밖의 여러 가지 치료에 좋으며 장수를 하게 한다.
3) 무호흡의 상태
인간의 가장 신비 불가사의한 작용은 무호흡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즉, 숨을 멈추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타요가의 청년 행자들은 발가벗고 길에 누어 그 위로 짐차를 지나가게 한다.
그러나 찰과상 하나 안 입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 같은 경우는 결코 없다.
즉, 이 때에는 호흡을 멈추고 숨을 안 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화를 그릴 때 무호흡 상태에서 그려진 선의 아름다움은 서양화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음이다.
야마오까 뎃슈나 고호 대사의 서필은 무호흡 상태에서 한달음에 쓰여진 것인데 통일의 미와 힘이 있는 것이다.
액자 같은 것의 글을 쓸 때 한 자 한 자, 한 획 한 획마다 먹을 묻혀서 쓰는 것은 시시하여 통일도 힘도 발견할 수가 없으니, 그림도 글씨도 사람을 나타내는 법이다.
미간의 점액선이 무섭게 활동하여 사람의 마음을 쏘고 침묵의 장엄을 나타내는 것은 무호흡의 상태 즉, 호흡을 멈추고 있을 때이다.
이러한 경우 숨을 내쉬면 관념이 남에게 전해져 이의 없이 남은 나를 따른다.
무호흡 상태를 계속할 수 있음이 오래 가면 갈수록 신체는 건강해지고 또 장수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들의 품성이나 역량이나 숭고한 사상은 호흡을 정지하고 있을 동안에, 공기와 함께 빨아들인 우주 프라나에 활현되는 것으로, 내쉬는 프라나에 의해 그 감화를 주위에 떨치게 된다.
때문에 대성자는 무위(無爲)로서 유위(有爲)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 눈을 안 깜박이며 일점을 응시하고 있는 일은 중요한 수행이다.
눈이 좋아지고 위엄이 갖추어지며, 감화력이 위대해진다.
그러므로 교육상 호흡이라고 하는 것이 자세히 연구되어 실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다.
호흡의 신비는 서양류의 경쟁에서는 활용될 수 없지만 궁도나 검도에는 활현될 수 있다.
춤도 그러하니 서양의 춤들보다 동양의 춤 더나가 요가의 실수를 겪고 행해지는 춤에는 신비적이고 깊은 맛이 들어 있다.
호흡은 예절과 사교에도 활용되어야 할 것이고 예술과 사색에 활용되어야 할 신비의 법칙을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의 대 과학자 ‘지 엠 크로드’가 1927년 프랑스 과학자 대회에서 한웅큼의 모래와 공기가 들어간 시험관에 산소를 채워 실험으로 모래를 루비, 사파이어로 바꾸어 집회 회원의 얼굴이 일시에 깜둥이처럼 새까맣게 될 정도로 놀라게 했다.
이어 인간은 멀잖아 바다 밑을 아무렇지도 않게 걷게 된다고 예언해서 사람들은 까무러치게 한 것은 서양인 사이에도 호흡의 신비 법칙을 이해한 비근한 예이다.
13세가 되는 소년 크리슈나무르티와 2주간 동안 매일 밤 함께 마트라스 교외의 아지알로부터 티베트 산속 깊이 쿠트후미 대사를 방문하고 이 책 제3장의 교훈을 알뜰히 교육받았다.
이것이 ‘대사의 발아래’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큰 감화를 세계에 주었다.
호흡의 신비 법칙을 단련 터득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일체의 기적은 호흡의 신비법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기타에서 신이 ‘나는 호흡이다.’라고 한 말에서도 호흡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기타는 호흡이 대신비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 프라나와 아파나를 중화시켜 심장을 진정시켜라.”
“ 들이쉬는 숨을 내쉬는 숨에, 내쉬는 숨을 들이쉬는 숨에 희생으로 바쳐라.”
이 양대 비밀에 관해서는 제6장 프라나야마의 대목에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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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장 - 명상
1) 명상의 힘
듀알컬 대사는 ‘초목은 태양을 향하여 명상하고 있다.
원시인들이 자기들의 생활을 보다 잘 되게 하려고, 묵지(?止)했던 것도 일종의 명상이었다.
초인은 태양의 마음을 명상한다.’고 말했다.
대성 파탄잘리는 요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태양을 명상하면 전 세계를 안다.
* 달을 명상하면 별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 우정을 명상하면 존경받을 성질을 높인다.
* 인후의 요부를 명상하면 기아를 면한다.
* 두상에서 방사되는 빛을 명상하면 성자를 보게 된다.
* 맑은 마음에서 저절로 열려 오는 계통의 빛을 명상하면 일체의 지식을 얻는다.
* 혼의 많은 지력을 명상하면 혼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이것에 의하여 초자연적 감
각이 일어나게 된다.
* 아카샤와 육체와의 차이를 명상하면 양털과 같이 가벼워지고 하늘을 걷게 된다.
* 육체가 아닌 참 마음이 있어 가지가지 기능을 가진 것을 명상 하면 무지의 암흑이
사라진다.
* 휘황한 지식을 가리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일체의 요소를 조잡한 면으로부터 정밀한 면으로 명상해 가며 그 앎에 통하고 이것이 혼의 경험에 공헌하는 까닭은 명상하면 일체 요소를지 배할 수 있다.
* 그것에 의해 자기를 원자의 극소 속에 넣으며 또 우주의 극대 로도 될 수 있고, 빛처럼 영묘해지고, 산처럼 무거워지고, 바라 는 곳에도 금방 가고, 바라는 것을 즉시 지배하고, 바라는 바를 정복한다.
이리하여 8대 기적을 행할 수 있다.
* 육체 기관을 외적 목적물로서 명상하고 또 자기를 명상하여 그 지식이 혼에 공헌함을 명상하면 육체의 여러 기관을 극복한다.
이것에 의하여 뜻대로 신속히 움직이는 체력을 얻고 기관은 육체로부터 독립하여 자연을 제어한다.
* 자연과 초자연의 구별을 명상하면 전능, 보편해진다.
* 시간의 일부와 그 과거 미래를 명상하면 선악을 구별할 식별지를 얻는다.
종류, 징후, 장소를 묻지 않고 명상에 의하여 이것들을 얻을 수가 있다.
식별의 지식은 생사의 대해를 횡단하여 어떠한 것에도 미친다.
2) 프라나야마의 의의 - 쿤다리니 및 챠크라의 각성
프라나야마는 명상의 본 무대에 드는 시작이다.
프라나야먀란 단순한 호흡 조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리듬을 유지하고 하복부 호흡을 하여 산소와 함께 우주 에너지를 충분히 섭취한다.
그리고 달과 태양을 체내 활동을 충분하게 해주고 신경을 정화 조절하여 체내에 숨어 잠자고 있는 챠크라를 강력화 시켜주고 인간을 진화의 본 무대에 진입케 해주는 과학적 호흡법이다.
이 기술을 수습하기 전에 우선 프라나야마에 관하여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2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가. 제1단계
심행에 의하여 사상 생활이 순화를 가져와서 일곱 챠크라가 자동적으로 리듬, 활력, 진동의 바른 상태로 나아간다.
그것에 의하여 육체와 에텔체와 아스트럴체가 정화된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으로 열성가들이 그 정화 수련에 정진하고 있다.
나. 제2단계
다음에 ‘감옥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체험 무대로 들어가 하늘의 희망에 각성케 된다.
이것은 세계의 여러 사건의 배후에 있는 하리어라키의 지도하에 행해지고 있다.
이것으로 인간은 과거 수세기보다 일층 더 잘 사색하는 존재자들로 되고, 넓고, 높은 사색을 하게 된다.
이것에 의하여 영혼 세계를 감싸고 있는 부정한 것, 인류를 참의 표현으로부터 차단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확실한 걸음으로써 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세력이 탄생되어 나온다.
세계의 표면적 현상을 보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상태에 있지만 순결과 진리의 깊은 흐름은 불만, 혼미의 아래쪽에서 힘차게 흘러가고 있다.
순결한 세계 운동의 성공이 뚜렷해져 이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파괴되는 것이 제2단계의 무대로 향한 비전의 진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이어라키는 세계 사상 처음으로 지금 인류의 체내에 있어서의 중심 챠크라를 진화시키는 작업을 개시하고 있다.
하이어라키는 천인종의 지상 영계(모나드계. 열반계)에 있다.
그 결과 인류의 에텔체에 있는 심장 챠크라와 미간 챠크라가 진보하여 전 세계적으로 그 종류의 사람들에 의한 세계 봉사자 신단체가 형성되어 오고 있다.
한 사람이 영적 생활에 힘을 얻으면 모든 단체원에게로 흘러가서 그들을 활성시키고 또 한 사람이 비전을 보면 모든 사람이 그 비전을 보고 내부 세계를 알게 되어 간다.
그런데 프라나야마는 불순한 인간이나 병자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병자는 제5편에서 설명한 신경 정화 정도에서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수결한 열성가들만이 프라나야마를 해서 서서히 진보해 나가야 할 것으로, 급격한 진보는 도리어 시간의 낭비로 되고 또 위험하다.
각성한 쿤다리니로 과도하게 뇌수를 자극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쿤다리니의 각성은 그저 형식적으로 프라나야마의 기술을 활용하여 흐흡하는 것만으로 는 성공하지 못한다.
두뇌에 있는 의식의 왕좌에 자리잡고 있는 지고의 인간(신성)에게 견고한 의지로 긴장한 심적 초점을 맞추고 주의를 집중시켜야만 불러 일으켜지는 것이다.
정성적 노력과 프라나야마의 노력을 통하여 신체 전체가 활발한 생명력을 얻어 참다운 인간이 활현한다.
이것은 신비적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열성가의 지순한 노력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의지에 의하여 두뇌 안에 의식을 집중하여 머리(송과선)로부터 빛이 나타나고,
챠크라가 활동을 개시하면 대사가 나타나서 사상 형식이 이해되고 실재의 반영에 접하며 참으로 선의 인스피레이션이 임해 온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본 무대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혼의 빛이 나타나면 혼은 나의 지도자로 나의 대사임을 알게 된다.
혼의 세계에서는 나의 혼과 대사의 혼은 통일 되어 있다.
3) 프라나야마의 기술
프라나야마를 할 때에는 규정된 좌법이 있으며, 그중 자신에게 맞는 좌법을 선택하여 하면 된다.
좌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 결가부좌와 달인좌가 가장 좋은 좌법이지만 결가부좌는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
- 참고: 좌법은 다른 곳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을 참조 -
가. 프라나야마 첫째 방법
좌법을 정하여 앉은 다음, 호흡을 천천히 시작하는데, 세 번에 나누어 마신다 생각하고
1에서는 윗 가슴에 채우고,
2에서는 어깨를 내리는 듯 하면서 숨을 중 가슴으로 내리고,
3에서는 아랫배로 내린다.
그리고 4에서는 잠간 멈춘다고 생각한다.
이를 1 2 3에 따로 따로 멈추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하라는 말이다.
1 2 3 4 숫자로 하는 것보다 ‘아움’을 속으로 발성하면 더 좋다.
숨을 마셨으면 아랫배에 채우고 숨을 멈춘다.
이것을 쿰박카라고 하는데 이 시간은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하여야 하며, 욕심으로 무리하는 것은 금물이다.
호흡의 길이 즉, 호와 흡과 중간의 지(멈춤) 의 비율이 각각 폐활량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수행의 숙달의 정도에 따라 달리 해야 함으로 여기서 설명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자세한 것은 다른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사람에 따라서 1:4:2로 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1:4:4로 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1:1:1로 해야 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이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나. 프라나야마의 둘째 방법
이는 좌우 비공호흡으로서, 들이쉼과 내쉼을 좌우 콧구멍으로 교대로 하는 호흡이다.
앞서 설명한 바대로 왼쪽으로 들이쉬고 오른쪽으로 내쉬며 이어 오른 쪽으로 들이쉬고 왼쪽으로 내쉬는 방법이다.
호흡의 길이는 가항에서처럼 정하되 마음의 집중처는 챠크라 중의 하나로 정한다.
이 호흡법을 수행할 때는 함께하는 동작들이 있는데 이를 잘 알고 함께 진행하여야 한다.
첫째는 케챠리라고 하는 동작을 하는데 쿰박(멈춤)의 앞의 반을 마쳤을 때 혀를 위로 말아 올리는 방법이다.
혀를 가능한 목구멍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는 것이다.
둘째는 동시에 배꼽을 등 쪽으로 잡아당기고 항문은 위쪽으로 끌어당겨 오므리며(이때너무 강하게 하면 변비가 걸릴 수도 있으므로 적당하게 하는 것이 요령), 어깨는 약간 드는 듯한 모양을 취한다.
셋째는 항문을 조이는 동시에 턱을 목의 요부(튀어나온 곳)에 착 갖다 붙이는 것이다.
이런 자세에서 숨을 멈추고 기다렷다가 숨이 가빠오기전에 모든 것을 풀고 숨을 내쉬며제자리고 돌아온다.
이상의(나) 동작은 프라나야마의 중요한 오의(奧義)로서, 이것이 앞서 중요성을 설명한 바 있는 프라나와 아파나를 중화시키는 비법이다.
프라나라고 하는 것은 휴부로부터 흘러 내리는 수출 신경 충도의 흐름이고, 아파나는 배꼽에서 아래쪽에 걸치는 부분으로부터 올라오는 수입 긴경 충동의 흐름이다.
이 두 가지 에너지의 흐름이 설명한 동작에 의하여 충돌하고 중화한다.
그러면 그 진동이 온몸의 신경에 파급되어 청정조화를 가져오고 또 글 결과 심장의 고동이 진정된다.
이 동작은 어떤 운동도 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강장의 좋은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또 이것이 명상의 본무대에 진입하는 필요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신경이 더러워져 있고, 심장이 쿵닥거리고 있으면, 호흡이 부드러워지지를 않고,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가 없다.
감각의 5대 문을 닫고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초월하여 온갖 육체적 잡념, 망상에 방해받지 않고 고요히 일심을 지상 목적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신비의 초인 요가 - 미우라 관조
일본 요가의 대가인 저자가 요가를 통한 밀교과정을 설명했다.
구도의 길을 나선지 10년, 그 어떤 종교에서도 안식처를 찾지못해 방황하던 한 영혼을
사로잡아 버린 밀교, 비교의 신비!
차례
머리말
바가바드기타, 통각에의 길, 실제적 경험 사례, 인체는 대우주의 신비를 모두 담고있다,
호흡은 신이다, 하라, 인류의 왕국 위엔 천인종의 왕국이 있다, 천인종의 단체 하이어라키
신지학과 법화경, 삼바라와 시나트 쿠마라 그리고 비전, 매년 히말라야 산에서 열리는 제
천인종과 인류의 협력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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