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찾아서
2016년 8월 24일 오후, 용봉사에서 수덕사로 가던 도중에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수년전 잠시 친구들과 한번 들려보긴 했지만, 그땐 기념관만 대충보았지 다른 곳은 돌아볼 시간이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기념관 주차장에는 뜻밖에도 관광차들이 가득 주차해있어 왠일인가 매우 의아스러운 마음이 들었었고....
경관 주변에도 수많은 태극기가 휘날리고 프랑카드가 여기저기 내걸려 무슨 큰 행사가 있나보다 생각해보았다.
충의문을 먼저 돌아보고, 기념관을 위시해서 윤봉길의사가 어린시절부터 살아온 저한당등을 돌아본뒤 어디선가 풍악소리가 들려오기에 그쪽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보았다.
윤봉길의사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를 들어가는 충의문
이곳 충의사에 윤봉길의사를 모시고 있다.
충의사 옆으로 작은 연못이 보였고.....
연못을 끼고 송림지역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윤의사의 부인 배용순여사 묘소를 마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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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 기념관 입구
전에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장을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주경여사가 맡고 있었는데,현재 윤주경여사는 천안 독립기념관장을 먙고 계신다
윤봉길 의사의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이다.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아버지는 윤 황(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원상(元祥)이었다.
윤의사는 1918년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한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윤의사는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그후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一)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ㅡ한국 민족문화백과사전 참조ㅡ
풍악소리가 나던곳은 농민 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백남기를 살려내라고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충남의 각시군 농민들이 자리를 함께한 궐기대회
이런 행사를 바라보다보면 먼저 마음이 아프고, 답답한 심정을 금할길 없다.
장례의식까지 동원되었고....
안동역에서를 부르면서 춤을 추어대는 광경
씨름대회가 열리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