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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농촌재단의 잡지 <대산농촌문화> 2021년 신년호에 실린 글입니다. #김대헌 평창군농업회의소 사무국장님, 편집하느라 애쓰신 대산농촌재단 #이진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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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이나 인터넷 말고, 지방농정의 민주적 의사소통에 관하여
농정[1]의 형식은 다종다양多種多樣하지만,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우선 눈에 띈다. 적지 않은 세금이, ‘○○ 지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제각기 다른 목적하에 농촌에 풀린다. 대부분 ‘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지급되는데, 때로는 유용하지만 때로는 비난의 표적이 된다. 그런 비난들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꼭 필요한 곳에 적정하게 지원되지 않아 낭비라는 것이다. 정작 필요한 곳에는 도움이 없고, 불필요한 곳에 돈을 쓰는 일이 잦다는 말이다. 둘째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농민-주민을 보조금으로 ‘길들여서’ 자율적인 활동의 싹을 짓밟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보조금을 받는 사람들만 계속 받기 일쑤여서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역에 필요한 일을 농민-주민 스스로 해나가려는데 힘에 부치는 부분이 있으면, 그 필요한 만큼만 정확하게 지원하면서 혜택을 여러 사람이 골고루 누릴 수 있게 하면 될 일이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니 문젯거리로 자주 지적된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방농정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즉, 민주적인 의사소통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농민, 주민,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등이 협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연습해야 한다.
그런 제도적 구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농업·농촌 정책에 관한 한, 헌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심급審級의 법률은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이다. 이 법률 제15조에 따르면 농촌 시·군에서도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정책 심의회’를 설치하여 지역의 주요 농정 사안을 심의審議하게 되어 있다. 심의란, ‘심사하고 토의한다’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농민-주민의 의견을 경청하고 발언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삼십 명 심의회에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 지방농정심의회만 잘 운영해도 의사소통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질 법하다. 하지만 이 장치가 고장 나서 작동 불능인 경우가 아주 많다는 점이 문제다. 필자도 몇 해 전에 전문가 자격으로 □□군의 지방농정심의회 위원 노릇을 맡은 적이 있다. 봄에 한 번, 초겨울에 한 번 형식상 회의가 열렸다. 지방농정 사안을 심사하고 토의한다고? 그 흉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 년에 두 번밖에 열리지 않은 회의가, 매번 한 시간도 안 걸려 끝났다. 결국,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심의회 위원직을 해촉시켜 달라고 □□군에 요청한 기억이 난다. 이처럼 현실은 한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지방농정의 뿌리를 튼튼히 하려는 노력이 다각도로 일어나고 있다.
YC군에서는 작년 한 해 동안 지방농정심의회 운영을 개선하는 일을 벌였다.[2] 그 배경에는 개별 농가들에 농약이나 비료 같은 소모성 투입재가 무분별하게 지원되는 것을 조정하고, 여러 농업 생산자 단체에 배분되는 보조금 간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YC군은 조례 및 시행규칙을 제정해 지방농정심의회의 심의 절차를 세밀하게 다시 만들었다. 핵심은 회의를 형식적으로 치르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곳에 적정한 수준의 보조금이 지원되도록 ‘심사하고 토의’하자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런 심의 과정에 읍·면이라는 풀뿌리 수준의 의견도 반영되게 하였다. 그 조치의 예를 하나 들어본다.
YC군은 고추가 많이 나는 농촌 지역이다. YC군은 ‘고추산업기반 지원사업’이라는 이름의 보조금 사업을 시행해왔다. 고추 종자, 고추 재배에 소요되는 비료, 상토 등을 고추 재배 농업인들에게 지원하는 사업이다. 2020년 기준으로 사업량은 고추 종자 1130포, 비료 2010포, 상토 3700포에 달한다. 이 사업은 마을별 수요조사를 통해 종자 및 투입재 지원 물량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그 효과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 종자를 예로 들면 1봉투당 3만 원이 보조금이며 자부담이 10만 원가량이다. 고추 종자 가격이 매년 인상되므로, 이장들은 마을별 수요조사 결과를 면사무소 산업팀에 전달하면 군청의 보조금사업 시행 절차를 거쳐 예산을 집행하고 구매한 고추 종자를 배부한다. 이런 방식의 진행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몇 사람의 관계자가 일방적으로 상품의 세세한 종류를 결정하고, 상토나 비료까지 세트로 구매하는 폐단이 있었다. 둘째, 토론이나 공청회도 없이 결정되면 농업인들은 정해진 상품을 보급받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셋째, 보조사업 대상자 기준이 불명확하여 공정성 혹은 형평성 시비가 일어난다. 넷째, 보조사업 대상 상품을 시중 가격보다 80% 비싸게 구입하게 되는 불합리가 있다. 그리하여 이장협의회를 통하여 제안된 개선 방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어떤 상품을 구매할 것인지를 행정과 공급업체와 농업인 대표가 모여서 합리적으로 결정한다. 둘째, 공공 부문 조달이 아니라 농업인들의 공동구매 형식으로 진행한다. 셋째, 구매할 상품(혹은 품종)을 결정하는 과정을 공정하게 확립한다.
다른 방식의 노력도 있다. 농민들의 의견을 모아 지방자치단체에 건의하고 조언하는 제도적 장치로써 농업회의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려는 움직임이다. 아직은 그 수가 많지 않고, 상당수의 농업회의소들은 최근에 설립되어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농업회의소는 여러 해를 거치면서 민주적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했다. 농업회의소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정 관련 정보를 지역의 농민-주민 다수에게 빠짐없이 알리는 동시에 민의를 폭넓게 수렴해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하고 협의하는 일이다.
“지역에 들어와 보면, 정보의 전달체계가 거의 막혀 있다시피 합니다. 이장님들만 알 수 있는 체계입니다. 농민들한테는 정보가 전달되기 어려운 구조예요. 일단, 중앙정부의 사업을 농민들이 알 수 있는 채널이 없어요. 본인이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농민들 말고는 알 수가 없지요. CP군의 보조금 사업이 130여 개 정도 될 듯합니다. 군청의 농정 관련 3개 과에서 연초에 보조사업 신청을 받을 때 어떠했느냐면, 보조사업 관련 내용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고요. 그 자료를 읍‧면사무소로 다 뿌립니다. 그러면 읍‧면사무소에서는 이장단 회의를 소집해서, 약 5쪽 분량의 자료를 만들어 나누어 주면서 ‘읍‧면의 농민들에게 홍보를 좀 해주십시오. 언제까지 신청하라고 전달을 좀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그게 다예요. 그러면 이장님들이 그런 사업들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나요? 잘 안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어떤 폐단이 발생하느냐?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 이장님이랑 친한 사람, 인터넷 좀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정보를 독식하면서 지원사업을 독식하는 구조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우리가 농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전부 설명해줄 수 없다면, 책자를 만들어서 직접 전달하고, 읽어보실 수 있게 하고, 선택이라도 할 수 있게 하자’고 해서 책자를 만든 지가 6, 7년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100명 정도 신청이 들어왔던 보조사업이, 300개까지 신청이 들어와 폭증한 경우도 있어요. 그랬더니 군청에서 제게 ‘이럴 줄 알았다. 이거 어떻게 할 거냐?’라고 하길래, 제가 ‘그게 무슨 소리냐? 이게 정확한 거지. 300명을 올해에 다 지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사업을 계획할 때 이 정도 인원을 기준 삼아 계획을 세워야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업 예산이 늘어날 수 있는 근거, 설득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는 역할까지 합니다.”(CP군 농업회의소 사무국장)
농정 사업 정보를 주민들에게 널리 알린 것은 CP군 농업회의소의 활동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더 중요한 것은, 농민-주민의 의견을 모아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하는 일이다. 의견을 모으는 방식은 여럿인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읍·면 순회간담회다. CP군 농업회의소는 매년 8개 읍·면회를 돌면서 농민 간담회를 한다. 간담회에 참여하는 농민들이 수백 명이 넘는다. 간담회에서 나온 수많은 정책 의견을 분류해서 농업회의소 내부에 구성한 여러 분과위원회가 검토하고 발전시킨다. 농업회의소 사무국이 수집한 참고자료도 함께 검토하여 정책 제안서를 만든다. 그렇게 만든 정책 제안들을 지방자치단체에 보내고, 지방자치단체 농정 담당 공무원들과 한자리에 모여 정책협의회를 개최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농업회의소가 지방의회를 찾아가 조례 제정안을 제시하고 조례 제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농민 몇 명 모여서 회의한 내용을 군청에 전달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민주주의 활동이냐고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CP군 농업회의소의 활동을 양量으로 제시하자면, 사실 질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겠지만, 이렇다. 농업회의소를 설립한 이후 8년 동안 농정 관련 회의 개최 건수 150회(누적 참석인원 4500여 명), 회의 등을 통해 수집한 농민들의 정책 건의안 800여 건, 정책 건의안 중 농업회의소 분과위원회를 통해 공식 제안으로 만든 건의안 300여 건, 그중에 CP군청에 공식적으로 건의하여 농정에 반영된 제안 108건 등이다. 농민 의견을 반영해 지방농정 시책을 고친 것이 연평균 13건이 넘는 셈이다. 농민-주민 의견을 들어 해마다 13건이 넘는 새로운 정책안이나 정책개선안을 만들 수 있는 기초 지방자치단체의 농정심의회나 지방의회는 거의 없을 듯하다.
농업회의소뿐만이 아니다. 요즘 농촌 여러 곳에서 ‘읍·면 주민자치회’ 전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한 농촌의 면面 지역에도 형식상 주민자치위원회가 있지만, 그 위원회가 실제적인 의미의 ‘주민자치’를 구현하는지 의문이 제기된 지 오래다. 그래서 ‘주민자치위원회’ 간판 아래 주민자치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취미교양 프로그램 따위를 천년만년 계속할 게 아니라, 모든 주민이 회원이 되는 주민자치회를 우선 성립시키고,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중요하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찾아내어 대책을 마련하는 공론장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수백 명 주민이 모여서 주민자치회 총회 또는 ‘주민 원탁회의’를 열어 지역에서 정말로 중요한 의제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곳들도 있다. ‘마을계획’ 혹은 ‘△△읍·면 발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주민이 모여 중요 과제를 결정하고, 해결할 전략을 구체화하기도 한다. ‘어떤 지역 문제를 왜, 누가, 어떻게 해서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민들이 직접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주민이 참여해 사전에 수립하는 계획은 지역사회의 의제를 평소에 미리 명확하게 형성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주민 원탁회의 같은 방식으로 의제를 도출하거나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사회의 발전 역량을 축적하는 학습 과정이 된다.
지난 해 총선을 앞두고, 거리마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펼침막이 붙었다. 선거가 꽃이라면, 뿌리는 무엇일까? 꽃은 특별한 모습을 잠깐 뽐내지만, 뿌리는 나무가 살아있는 내내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아니, 뿌리가 쉼 없이 제 역할을 해야 나무가 죽지 않는다. 농민을 비롯한 주민 다수의 의견을 담은 말과 글이 풍성하게 흐르고 만나고 모여 지방자치단체의 농업·농촌 정책에 영향을 주는 의사소통 구조가 있다면, 그것을 두고 민주주의 농정의 뿌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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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는 농업정책과 농촌정책 모두를 아울러 ‘농정’이라고 부른다.
[2] 여기에 소개하는 YC군 지방농정심의회 개선 사례는 ‘지방분권을 위한 농정 추진 체제 개편 방안(3/3차년도)’ 연구의 일환으로 2020년 한 해 동안 조사한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연구는 충남연구원 연구진(강마야, 이도경)과 함께 수행하였다. YC군 지방농정심의회 개선 사례는 충남연구원 연구진이 조사한 내용임을 밝혀둔다. 전체 연구보고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