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담양에는 목백일홍이 한창입니다. 아마 9월 10일까지 담양엘 가면 코로나로 막혔던 가슴이 확 뚥리는 하루를 보내리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벗어나려하지 않으면 서울의 탁한 공기를 마셔야겠지요? 한번 나들이하며 맛있는 남도의 음식도 맛보고 오시지요! 5-6회 연재로 글을 올립니다.
담양 일원의 가사문학과 연관된 유적지순례
가사문학의 발상지인 전남 담양에 세워진 가사문학관을 둘러보고, 정철유적지인 송강정과 그가 김윤제의 후의로 학문을 익힌 환벽당과 벗들을 사귄 식영정 등에서 조선선비들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새벽에 담양으로 출발하여 총총걸음으로 다니면서도 선인들의 자취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월 말에 담양을 찾아 유적지에는 백일홍이 움도 띄지 않아, 한 달 뒤인 칠월 말에 만개한 백일홍 사진촬영을 위해 다시 차를 담양으로 몰았다.
면앙정(俛仰亭)
전남 담양군 제월리에 있는 전남기념물 제6호인 면앙정은 조선중기 문신, 송순(宋純:1493~1582)이 지은 정자로, 1597년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54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자이름은 면유지(俛有地; 땅을 굽어보고) 앙유천(仰有天; 하늘을 우러러보며) 정기중(亭其中; 그 가운데 정자를 짓는다)이란 말의 앞 세 글자를 따서 면앙정이라 이름 지었으며, 세 칸 중 한 칸은 사람이 쓰고, 나머지 두 칸은 바람과 달과 자연의 경치를 끌어들인다는 옛 건축의 멋에 따랐다.
본관이 신평(新平)이며, 호가 면앙정(俛仰亭)인 송순은 1519년(중종14년) 별시문과에 급제, 중앙무대로 출사했으나 그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하자 낙향해 현재의 위치에 초가정자를 짓고 은둔하였다. 이렇게 5년여를 보낸 송순은 다시 관직에 나아가자 초정(草亭)은 방치되었다.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28년)에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초정을 다시 짓고 면앙정삼언가(俛仰亭三言歌)를 지어 정자이름을 자신의 호를 삼았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俛有地仰有天)
정자 속에는 크고 활달한 흥이 있네 (亭其中興浩然)
풍월을 불러들이고 아름다운 산천은 끌어당겨 (招風月挹山川)
명아주 지팡이 짚고 가며 한 평생을 보내리라 (扶藜杖送百年)
청송 성수침(成守琛)이 쓴 현판
삼언가 편액
면앙정을 짓고 난 후, ‘달, 바람과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소망을 시조에 담은 그를, 제자인 송강은 신선이라 하였다하며, '면앙정잡가(仰亭三雜歌)에 수록된 ‘십년을 경영하여’란 시조는 작가미상이라는 설과 송순의 작품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간결하고 담백한 맛이 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어
반 칸 청풍 반 칸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송순은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사헌부집의를 거쳐 1539년에는 승정원우부승지, 경상도관찰사와 사간원대사간을 지내다가 1547년(명종2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고,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에는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사론(邪論)을 편다.’는 반대파에 몰려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자 다시 낙향하였다. 이때 담양부사의 도움으로 면앙정을 중건하여 새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1597년의 정유재란 때 병화로 전소된 것을 1654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고, 이후 1989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선조1년인 1568년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 후 이듬해 한성판윤과 의정부우참찬에 오른 뒤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와 대나무 숲 그늘아래 언덕의 170여개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청송 성수침(成守琛)이 쓴 면앙정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고, 입구좌우에는 '면앙정가비'와 '면앙정기'를 새긴 비가 서 있다. 동남향에 앉아있는 면앙정은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분산시키는 네모난 나무인 주두(柱頭)조차 생략되었고, 처마도 서까래가 없는 간소한 건물이나 네 모퉁이 끝은 방주(方柱)가 받치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면앙정은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며, 정자 한 가운데 한 칸짜리 방이 있고, 사방으로 마루가 깔려 있다. 어느 쪽에서나 주변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칸 넓이의 방을 가운데에 둔 대청 뒤에는 평야너머로 연산(連山)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냇물이 흐른다. 정자 정면아래에서 이어진 등마루에는 키 큰 노송과 무성한 숲이 어우러져 있어 인간세상에서 동떨어진 별유천지 같으며, 정자 안에는 그의 시 외에도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기대승, 임제(林悌), 고경명(高敬命), 임억령(林億齡)과 박순(朴淳) 등의 시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뒤가 낮은 평야로 후경이 확 트인 면앙정
송순의 제자인 기대승은 1564년(명종 19)에 지은 면앙정기에서
정자의 동쪽산인 제월봉(霽月峯)의 산자락이 북서를 향해 조금 아래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높이 솟구쳐 산세가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자리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집을 세 칸으로 만들고는 사방을 텅 비게 하였고, 서북귀퉁이는 절벽이며, 좌우에는 대나무병풍이 둘러 있고 삼나무가 울창하다. 빈 정자에서 멀리로는 넓은 수백 리 사이에는 산을 마주 대할 수 있고, 물을 구경할 수가 있다.
용천(龍泉)에서 나온 물은 읍내를 지나 백탄(白灘)이 되어 굽이치며 감돌고, 옥천(玉川)에서 발원(發源)한 여계(餘溪)는 잔잔하고 맑은 물이 정자 기슭을 감돌아 흘러 백탄과 합류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정자는 경치가 그윽하여 관조하면서 즐길 수 있고, 밖은 탁 트여 호탕한 흉금을 열 수 있다 했다.
가사문학탄생의 진원지이기도 이곳에서 비롯된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은 ‘호남시단’의 토대를 이루었고, 면앙정 주위의 30가지 풍경을 정해두고 그 제목에 따라 여러 시인이 각자 안목대로 시를 짓는 면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이라는 독특한 시 창작방식을 태동시킨 곳으로, 이는 운자(韻字)를 빌어다 쓰는 차운시(次韻詩)와 다른 형태이고 한 주제에 대해 여러 명이 이어 쓰는 방식과도 다르다. 오늘날 전해지는 ‘면앙정삼십영’은 6편으로, 30개의 경관을 6명이 각기 지은 것이니, 편수는 180편에 이른다.
송순의 나이 87가 되던 해에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회방연(回榜宴)은 과거급제60주년 기념잔치로, 이 잔치를 열려면 ‘과거에 급제해야 하고, 급제 후 60년 이상을 살아야 하며, 잔치를 주관하는 출중한 제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가능하여, 조선을 통틀어 이 영광을 누린 사람은 송순을 포함한 4명뿐이었다. 1579년의 송순의 회방연에 선조는 어사화(御賜花)와 술을 내렸고, 잔치가 파할 무렵 정철과 고경명 등의 제자들이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竹輿)를 직접 멨다.
가사문학관에 있는 ‘회방연도’ 박행보 작
담양부지(潭陽府誌)의 송순의 회방연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면앙정의 잔치는 호남의 온 고을이 구경하였고, 술자리 도중에 정철이 '이 노인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대나무 가마를 메도 좋겠다.'고 제안하여 정철이 고경명, 임제, 이후백과 함께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를 메고 내려오자, 그 뒤를 각 고을수령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따랐다.’한다. 불혹(不惑)을 넘긴 제자들이 스승의 과거60주년합격을 축하하여 송순을 가마에 태운 회방연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 아름의 꽃향기가 가득하지 않았겠는가?
송순의 회방연이 열린지 약 200년 후인 1798년, 그의 회방연 미담을 들은 정조는 호남인재선발을 위해 광주에서 향시의 일종인 도과(道科)를 지시하고 직접 시험문제를 내린 것도 화제가 되었다지만, 시험문제인 시제를 2백여 년 전인 송순의 회방연 때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가마에 태워 집에까지 모셔다드린 것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쓰라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를 어제(御製)로 내렸다. 이 아름다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면앙정에서는 연례적으로 ‘면앙정 송순 회방연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