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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말씀/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고린도전서 15:49 | 2025. 4. 20 | |
| 부활절 특강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몇 해 전 여름 수양회 때 EBF 아이들이 사슴벌레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기했는지 저희집 아이들이 집에서 사슴벌레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슴벌레가 알을 낳았는데 좁쌀만 한 작은 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알이 부화하여 애벌레가 되어 지금은 흙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 곧 흙에서 세상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를 알기에 그들은 죽은 것과 같은 번데기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곤 성충의 갑옷을 입고 흙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 하늘을 날아다니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지금은 땅에 발붙이고 살아감으로 인해 흙에 속한 형상을 입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활의 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그날의 영광을 소망할 때 우리는 현실의 많은 문제를 감당하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죽고 부활하는 부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시간 부활에 대한 소망과 부활 믿음이 위로부터 임하길 기도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고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문제가 교회 가운데 생겼습니다. 분파 문제, 음행문제, 소송, 결혼문제, 우상의 음식 문제, 은사 남용 문제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3,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것,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주었던 복음을 제시합니다. 복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부터 이미 준비하시고 예언하셨 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죄의식과 수치심,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땀 흘리고 수고해야 먹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죽어서 한 줌의 흙이 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 각 사람은 삶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어떤 이도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심판의 결과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로 지옥에서 고통받게 됩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는 자는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최후 심판대 하나님 앞에서 지옥행티켓이 아닌 천국행티켓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확증해 줍니다. 죄로 인해 심판받아 영원한 죽음의 고통 속에 살수 밖에 없던 우리를 복음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증인이 직접 체험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5-11절을 보면 게바 베드로, 열두제자, 오백여 형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모든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활의 산증인임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자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는데 앞장섰던 극악무도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체포하여 멸하고자 이방 땅 다메섹까지 가고자 하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4,5)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바울은 모든 자기 의와 생각이 무너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끝나신 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은혜와 감격이 너무 커서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수고를 자기 의나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수고하는 게 당연한 의무를 넘어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뿐만 아닌 우리또한 부활의 산증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박해하고 피해 다녔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으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예배드리며 양들을 열심히 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많고 변화의 역사도 분명하지만, 당시 고린도교회에 파고든 영지주의 사상으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2-19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당연히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비롯한 복음 전도자들이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 되며 거짓 증인이 됩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는데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며 구원받지도 못해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두고 죽은 자들은 망한 자들이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언합니다. 20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믿음과 헌신과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있고 소망이 넘치는 우리 입니다. 진정 불쌍한 이들은 부활을 믿지 못함으로 죄로 인해 정죄받는 자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며 고통하다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는 자들이 진정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기-승-전-죽음이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결론은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승-전-부활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은 인류의 운명을 죽음에서 부활 생명으로 되돌린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 열매인 그리스도에 이어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악을 정복하시고 심지어는 죽음도 정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망이 없어지고 아픔이나 눈물이 없는 세상이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주의 질서를 뒤바꾼 엄청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운명이 바뀌고 미래가 바뀐 바울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도전하여 부활을 맛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31절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부활의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매 맞아 죽을 것 같았고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았고 굶어 죽을 것 같았고 인생이 망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했을 때 이상하게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하나씩 헤쳐 나갈 때마다 그의 속사람은 더욱더 강건해졌습니다. 그의 내면은 더욱더 연단을 받아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더욱더 힘이 있었고 복음 역사는 더욱더 흥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구나! 죽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구나. 십자가는 짐이 아니요. 부활의 능력에 이르는 지름길이구나.”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3장 10,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요회가 개편되어 요회에 학생들과 청년들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목자님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더 많은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픽업도 가야하고 식사도 준비해야 하고 학생들에게 본을 보이고자 일거수일투족 신경을 씁니다. 회사 퇴근 후 모임에 와서 학생들의 소감도 들어주고 말씀 공부도 해주고 대화도 나누며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직장 일을 감당하고 가족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이러한 일까지 하면 정말 쓰러져 죽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목자님들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더 환합니다. 기쁨과 힘이 넘쳐 보입니다. 요회에는 웃음이 많아지고 더 커졌습니다. 요회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 담기고 살아나고 자라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부활을 믿기에 우리는 자원함으로 고난받고 수고합니다. 이에 따라 죽음 앞에 내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부활의 믿음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캠퍼스 목자의 삶을 자원함으로 부활을 체험하고 생명을 살리는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35절은 말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그들은 계속해서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자가 살면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합니다. 36절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바울은 씨앗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변하여 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속에 묻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씨앗이 죽었지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씨가 변하여 꽃이 됩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부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씨앗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땅에 묻혀 썩고 없어지는 씨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꽃처럼 아름답게, 나무처럼 울창하게, 별처럼 영롱하게, 해처럼 영광스럽게,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걸까요? 39절을 보십시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나님은 각 피조물을 만드실 때 각자가 살 장소에 맞게 창조하셨습니다. 새는 하늘에서 살아야 하므로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므로 거기에 맞게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처음 창조 때 이 땅에 살도록 우리를 만드신 것처럼 부활의 때 하나님 나라에 살 수 있게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49절은 또한 말합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흙에 속한 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약하고, 욕되고, 추하고, 한계적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늘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은 형상, 강하고 영광스러운 형상, 신령한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이는 변화산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입니다.(마17:2) 또한 요한이 환상중에 본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요한계시록 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이유나 원빈, 공유 같은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이 우리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형상을 입은 후에는 우리 모두가 절세 미남미녀, 미스 헤븐, 미스터 헤븐이 될 것입니다. 땅에 속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기대가 됩니까? 얼마나 소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 이 일이 언제 이루어집니까? 51, 5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가 이 땅에 죽게 되면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는 수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나팔이 울려 퍼지게 됩니다. 그때 순식간에, 홀연히, 다 육체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올 때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왔습니다. 갓난아이가 어른이 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순식간에, 홀연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소망이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 사람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 마음에 천국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그 비밀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도 그 비밀스러운 축복을 부분적으로나마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때 어떤 말씀이 이루어집니까? 54, 55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때까지 사망은 인류 위에 왕 노릇해 왔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모든 인간은 사망이 쏘는 죄의 세력에 넘어지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죄는 율법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를 억누르고 정죄와 무력감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죽음 권세를 박살 내셨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마다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의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시련과 문제와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해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 살던 참으로 불쌍한 자였습니다. 선배의 초청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여름수양회를 통해 십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를 통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건짐 받는 승리를 주셨습니다. 학업을 잘 감당하지 못하던 자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대학원에 들어가게 하시고 승리케 하셨습니다.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와 목적이 없던 자를 캠퍼스 목자로 불러 주심을 통해 최고로 가치 있는 승리의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 한 사람 감당하지 못했던 자가 결혼도 하고 4명의 자녀를 얻게 하심을 통해 승리의 가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양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실패한 것처럼 망한것 처럼 느끼고 좌절하며 흔들리기 잘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생각할때 흔들리는 마음을 잡을 수 있었고 맡겨주신 일을 포기치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장차 이자신 부활하여 하나님앞에 섰을때 하나님이 모든 수고를 알아주시고 받아 주심을 생각할때 현실의 문제, 양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예수님 안에는 실패가 없고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승리만 있습니다. 부활 승리하신 예수님께 날마다 감사함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 되길 기도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 여러 수고를 합니다. 학생들은 중간고사 기간에도 먼저 예배드립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먼 영주에서 음성에서 춘천으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밤낮 일하며 새벽을 깨워 기도합니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택하신 곳에서 목자의 길을 갑니다. 어렵지만 포기치 않고 계속하여 캠퍼스에 나갑니다. 힘든 양들, 소식이 끊긴 양들을 위해 기도하고 다가가며 돕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사의 삶을 삽니다. 우리의 이 모든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다 갚아주시고 다 보응하여 주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장차 부활의 몸을 이루는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날마다 부활의 믿음으로 도전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맡겨주신 캠퍼스 영혼들을 살리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데 더욱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