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칼림 2026.1010> - (김광모 토요칼럼 2026.10.10)
박정희 대통령의 기술인력 양성
<서론> 한국의 경제성장과 인력자원
1. 경제자립과 인력활용
일국의 경제성장은 그 민족의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여 경제 자립의 성공 여부는 그 나라의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여 있다는 것이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때 국가가 부강하고 국민이 윤택하게 살 수 있게 된다.
50년대 초의 한국의 인력에 대해서는 인구와 인력조사 보고가 된 바가 없어 한국의 인력은 무엇인가를 전연 알 수 없다.
5,60년대의 인력을 산업과 연관하여 개략적으로 살표 보기로 하겠다.
한국의 인력을 양과 질로 분석해 본다면 한국은 조선조의 봉쇄봉건 국가시에는 경제성장이란 전연 없었으며 양과 질의 모든 면에서 성장은 유교라는 신앙에 묶여 요지부동의 상태였다.
50년대 초 박정희의 혁명정부는 이를 이어받았지만 대한민국 최초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여 수출제일주의에 의거 수출이 증대되는 경공업에 의한 경제성장을 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박정희의 혁명공약 1,2 항에서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UN헌장과 각종 국제협약을 준수하며, 4항에서는 국가와 국민을 기근과 빈곤에서 해방시키겠다고 했다.
박정희의 테크노 크라트는 경제개발계획에서 수촐이 되는 것이면 수출하기 시작하여 수출되는 모든 예를 들면 중석 김, 오장어, 가발등 광수산 물이었다.
수출을 증가시키려면 공업입국을 근간으로 하여 공산물 반제품을 수입하여 인력으로 조립 가공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국고에 돈 한 푼 나라가 돈을 버는 오로지 방법은 국제시장에 수출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
"수출이 살길이다"에서 "수출제일주의가 생겨 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대표적인 제품이 섬유류 스웨터 등 봉제품이었고 플라스틱 그리고 고무와 피혁 제품등이 약간 있었다
한때 생모 가발이 수출 주종목이 된 시절도 있었다.
일단은 가내공업으로 시작해서 동네에 가내 업센터도 있었지만 많은 양을 시간이 급한 생산을 하기 위하여는 공장생산으로 대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서울 구로공단을 위시하여 인천 수출공단과 마산수출 자유지역등이었다.
한국의 섬유류 수출은 미국에 치중하여 대미수출 제한을 하는 Quota를 말하는 한미섬유류 협정이 있을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한국의 섬유류 봉제품 수출은 70년도에 전국이 10억 불의 고지를 점령하였을 10억불의 절반을 점유하는 수출 대종 품목이었다
이때에 국가 또는 지방정부는 수출단지를 만들어 민간기업이 수출전용 공장들을 건설하였다.
이 당시 한국의 봉제품 수출 제품 생산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2. 한국의 여성인력
한국의 봉제품 생산은 여성인력의 몫으로 전체의 65%가 농촌출신으로 6년 의무교육의 혜택을 보지 못한 인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배우지 못한 여공들을 위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야간학교를 마련하여 중학 줄업까지 인정하기도 했다.
한국의 60년대 초의 여성인력은 진취적이고 머리도 좋고 손재주가 있어서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결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3. 남성인력을 살펴보자
한국은 중국의 원 명 청의 속국으로 지내 오다가 일본의 지배를 받아 왔으니 스스로 민족적으로 열등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해적도 없는 정도로 해외 진출이란 게 전연 없었다.
남성인력이 일할거리가 없는 시절을 깨트린 게 64년 3월부터 74년 3일까지 약 10 년간 계속된 월남전 파병이었다.
월낭전 파병의 주목적인 국군병기의 현대화를 가져 왔고 KIST까지 설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많은 민간 기업체가 대거 진출하여 토건 공사 수주를 하여 귀한 외화를 벌어 드렸다.
이것이 한국의 최초 해외 진출인 동시에 한국의 남성인력 활동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한국인은 평화와 전쟁에 한국인의 우수성이 나타났다.
남성인력의 패배의식에서 자신감과 옹기를 갖게 했다
.
월남전 파병 연인원 인력으로 3,40만 명이 진출하여 8년의 기간에 6억 불을 벌어들어 월남 파병이 남성인력 시대의 막을 비로소 연 것이다.
지금이 50년대 초 경제개발에 착수 한 이래 50여 년이 지났지만 월남파병이 대일 청구권 자금과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와 더불어 경재개발 3대 종잣돈으로 사용되었다.
4. 중동진출
중동의 진출에는 단 게가 있었다
제1차로 오일쇼크를 신흥 메이저
로서 유공괴의 합작사인 Gulf Oil
덕분으로 무사히 해결했다.
OPEC의 유류감량 통고 20%에 대하여 10%는 소비절약으로 해결하고 남어지 10%는 Gulf Oil이 감량을 해제해 줌으로써 Oil Shock 는무난하게 해결되었다.
한국은 남들이 어쩔 즐 모를 때에 한국은 월남에 진출한 삼환기업을 선두로 현대 동야 대림둥이 주택 도로공사와 송관 공사를 맡아 밤을 새워 가며 일했다.
지나가는 사우디 왕이 횃불을 켜고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공사장을 보고 감탄해서 사우디 왕으로부터 (코리어 넘버 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것은 당시에 값진 얘기로서 한국의 토건업체 수주에 도움이 되었다.
다음으로 현대건설의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한 것이다. 한국 처음으로 플란트 엔지니어링 수주로 세계진출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대 정주영 회장에게 중동에서 성공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전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기능사 덕분"이라고 했다고 한다
1965년 무더 1981년까지 해외건설 수주액이 443억 5백만 달러였는데 중동수주약이. 93.5%에 달했다는 기록이다.
단순 토목건축 기능사뿐만 이나라 용접. 배관, 기계조립에 필요한 기능사가 1,600 명이나 되어 시범공고에서 단 기교 육으로 1,500명을 양성하여 보내기도 했다
중동진출 학과는 인기학과가 되어 졸업 후 즉시 중동으로 떠났다.
정부는 전국의 공업학교 교육에서 주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매년 5만 명씩 양성해 나갔다
4.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보리고개로 일컬어진 기근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며 패잔병과 같은 패배와 절망감이 팽배했다. 스스로 엽전이라고 했다
이러한 환경과 정신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의 수출제일주의에 의한 급속한 산업화의 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경제구조는 공장을 건설하여 수출에 전력을 다하여 수출이 전무한 상황에서 64년 1억 불 달성을 기록함으로 67년에 3억 불 달성을 거처 70년에는 10억 불의 수출고지를 점령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공적을 이룩하여 이로서 국민적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의식구조는 국가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이 나아가서 70년대에 중화학 선언으로 수출 100억 불을 달성하고
목표연도에는 기적의 200억 불을 달성하여 선진국이 돠는 공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74년. Newsweek 6월 호에서 Koreans are coming이라는 표제에 한국인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고 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부지런한 일본인을 게으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5. 위대한 영도자 박정희
우리 만족에 위대한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 등장하여 한국인에게 목적의식괴 행동의식을 제대로 실현화하는 무힌 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 국민의 이데올로기로 반공을 국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국가를 만만 들고 국가의 안보를 위하여 이승만 정부 때 체결한 미국과의 상호방어 게약을 철저히 지켰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6개월간의 재임기간인 60년대와 70년대는 역사 속에 파묻혔다.
닉슨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군을 하고 카터 대통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