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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1강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씀/눅3:1-20
요절/눅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므로 주의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의 심령과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때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인 디베료는 양아버지 가이사 아구스도를 계승해 로마제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헤롯대왕이 죽은 후, 그의 4명의 아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유대 지역은 아켈라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로 활동했던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디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역은 빌립, 아빌레네 지역은 루사니아가 맡아 통치했습니다. 유대 지역을 통치하던 아켈라오는 폭정을 일삼다 신하들에게 탄핵당한 후, 로마정부에서 총독을 파견해 통치하게 했는데 당시 총독이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또 유대는 종교사회로 70명의 종교지도자들로 구성된 산헤드린공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인데 당시 대제사장은 안나스와 가야바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지만 로마 당국이 유대인들이 선출한 안나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사위인 가야바를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가야바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안나스가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이고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장차 그들은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모함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예수님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역사에는 관심 없고 하나님도 이들을 통해서는 어떤 역사도,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2b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서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빈들입니다. 빈들은 광야를 말합니다. 광야는 세상에 물들지 않은 곳입니다. 또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인 그는 가만히 있어도 제사장이 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안정된 삶의 울타리를 박차고 황량한 빈들로 뛰쳐나갔습니다. 빈들은 고독하고 적막합니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세상의 필요들을 의지할 수 없는 곳입니다. 자기부인과 궁핍과 절제가 요구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빈들로 나아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고 빈들에서 엘리야처럼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하며 굳게 의지했습니다. 이처럼 빈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설 수 있는 곳입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적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 요한에게 임했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400년 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하셨습니다(마11:14). 이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엘리야인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메시야의 새 시대를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적으로 임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때까지 자식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기초해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대 사도가 됩니다. 루터는 양심이 매우 민감해 작은 죄에도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더러워진 양심을 닦는 것처럼 솔로 수도원 복도를 박박 닦았습니다.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고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를 때까지 수도원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로마서를 읽는 중, 1장 17절 말씀이 그에게 인격적으로 임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의식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도전해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오늘날에도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어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말씀의 종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봄 학기 캠퍼스 복음역사를 섬기는 우리에게도 우리를 사로잡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에 인격적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살리고 나를 뜨겁게 하고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말씀들을 듣습니다. 그런데 한 귀로 듣고 잠시 머리에만 머물다 한 귀로 흘린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많은 말씀을 들어도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빈들같이 가난하고 간절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주시고 감동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순종해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빈들과 같은 광야의 영성을 회복해야겠습니다. 가난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런 우리의 심령에 주님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해 역동적으로 주와 복음역사를 섬길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 요한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여기 ‘회개’는 ‘마음을 바꾸어 되돌아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깬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는 세례’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도록 하는 세례’입니다. 죄 사함의 효력이 있는 세례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구주를 믿도록 준비하는 세례입니다.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요한의 이 같은 사역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바벨론의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할 때 있을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오는 길은 높은 산과 험한 골짜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그 길이 곧아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종 고레스 대왕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은 평안하게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예언은 본문의 세례 요한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 길을 준비하고 주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외칩니다. 그것은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모든 산을 낮추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골짜기는 상처로 움푹 파인 마음입니다. 깊은 열등감이나 패배의식, 운명주의로 마음이 골짜기처럼 깊이 파여 있는 마음에는 주님이 임하시기 어렵습니다. 그 골짜기가 메워져야 합니다. 모든 산과 같이 마음이 높아져 있는 교만한 마음에도 겸손하신 주님이 임하시기 어렵습니다. 높아진 마음은 낮아져야 합니다. 굳어져버린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내려놔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는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또 꽈배기처럼 꼬여 굽은 마음에도 주님이 임하시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꽈배기처럼 꼬여 굽은 마음을 곧게 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험한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험한 길은 거친 마음입니다. 거친 세상에서 거친 삶을 살다가 거칠어지고 강퍅해진 마음에도 주님이 임하시기 어렵습니다. 거칠어진 마음은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 같은 회개는 우리의 힘과 의지와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습니다(눅1:37). 하나님의 말씀은 불방망이 같아서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부수어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종말론적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 모든 산이 낮아졌습니다. 세상은 영원하고 자기는 평생 안 죽을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자랑하던 자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또 어떤 죄를 지은 자라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모든 절망의 골짜기를 메웠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주님은 그 준비된 길로 임하시고 모든 인간은 주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개는 부담스럽지만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는 도로포장공사와 같습니다. 그 말끔한 길을 따라 주님께서 쌩쌩 달려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이 이미 오신 구원자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양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어떠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새로운 양이 예배에 처음 왔을 때 “독사의 자식아!”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요? 그러나 요한은 담대하게 그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온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말입니다. 겉은 아름다운 색깔로 치장했지만 속은 무서운 독이 감춰진 독사처럼 그들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의가 충만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구원은 따 놓은 당상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이 살았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했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외쳤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의 유익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라서 백성들도 인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의 독에 깊이 젖어들어 있었습니다. 후에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물어뜯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요한의 말대로 독사의 자식들이 된 것입니다. 장차 올 진노는 피하고 싶어 신앙생활은 형식적으로 반복하고 보험 들은 폭 잡고 세례 받으러 왔지만 심령으로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은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요한은 이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분명하게 책망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습니다. 이런 나무에는 이미 도끼가 그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이는 그 나무를 잘라 불에 태우고 그 자리에 열매 맺을 만한 다른 나무를 심겠다는 강력한 주인의 의지표현입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여기서 도끼는 심판과 파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오래참고 기다려주십니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태평양과 같이 드넓고 풍성합니다. 그러나 죄인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은 끝내는 심판의 도끼를 들어 그 나무를 찍어 지옥 불에 던지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어떻게 맺는 걸까요? 무엇을 말할까요? 10-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옷과 밥과 돈 이야기를 합니다. 회개를 이야기하는데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회개가 마음의 문제이면서도 현실적인 삶의 변화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옷을 나눠 입으라, 먹을 것을 나눠 먹으라. 네 소유를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즉 이웃을 향한 나눔과 배려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기도의 눈물을 닦은 후, 이웃과 양들과 밥 한 끼를 함께 나누어먹는 것이고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입니다. 그들을 가족 공동체로 친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는 옷이나 음식을 나누고 거저 줄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는 못 먹어도 자녀에게는 줍니다. 어쩌다 치킨을 시키면 예전 같으면 닭다리부터 뜯어먹었을 텐데 지금은 아이들에게 살코기 다 발라주고 남은 목뼈나 날갯죽지를 발라먹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먼저 줄 수 있고 그것에 대해 배 아프거나 손해 심정 갖지 않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가족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또 세리와 군인들에게 해당하는 회개의 열매도 있습니다. 요한은 세리들에게 부과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라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도 강탈하지 말라 했습니다. 당시 치안을 담당하는 군인들이 있었는데 요즘으로는 경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금 징수를 위해 보조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에게 거짓 고발로 협박해 빼앗지 말라 합니다. 자기 급료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세리와 군인들이 맺어야할 회개의 열매는 매우 상식적인 것입니다. 자기 직무에 정직하고 충실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원래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신앙적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옷과 밥과 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눠주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자기 직무에 충실하고 정직하고 공정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연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연해 보이는 일들을 막상 실천하려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우상숭배에 대한 이야기나, 압제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이나, 정치 종교적 거대 담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곁에 있는 이웃을 도와주고 피해주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매우 상식적인 데 있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실천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물론 기도하면서 눈물로 회개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요한이 말하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지만, 내 옆의 작은 한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고 돕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은 주님의 임재를 방해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내주해계신 성령님이 크게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어갈 때 그 삶 속에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요한을 보고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이때 요한은 손사래 치며 부인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신발 끈을 푸는 것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나는 그의 가장 미천한 종이 되는 것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요한을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그 때, 자신은 그리스도의 비천한 종이 되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며 자신을 겸손히 낮춥니다.
온 이스라엘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고백하는데 그는 이런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므로 예수님이 ‘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가 본질적으로 깨끗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최후 심판의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여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구별하고 심판하시는 심판장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물세례 베푸는 자라고 자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을 그리스도인 줄 알고 다가오는 군중들에게서 슬며시 자기 영광을 취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 앞에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도록 적극 그들의 눈길을 돌려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불의한 헤롯왕의 죄를 책망하다 투옥되었고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하게 됩니다.
그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8).” 그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갔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다보면 나와 내 가정의 삶을 위해 준비할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도 준비해야 하고 노후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때에 주의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의 삶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빈들과 같은 골방에서 주님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외적인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심령으로부터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이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거룩한 주의 신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 형제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삶속에서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