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달라졌다. 수목원이 뒤척인다. 우듬지에서 쏟아진 동살이 빛기둥을 섶처럼 세워주면 연한 초록 잎들이 몸을 기대어 타고 오른다. 모델의 발걸음처럼 경쾌한 리듬을 탄다. 생동감 넘치는 봄기운이 일렁인다.
무궁화동산도 여름을 꿈꾸며 부스럭거린다. 바소꼴 하얀 꽃봉오리 속에는 수술과 암술머리가 몸피를 키우는 중이다. 200여 종이 넘는 무궁화나무 가지마다 실눈 같은 잎들이 돋아나는 중이다. 고요로, 삼천리, 아사달, 아사녀, 아랑, 춘향, 꽃뫼... ‘무궁화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그중에서 꽃뫼에 왠지 마음이 이운다.
꽃뫼는 무궁화의 종류이기도 하지만 꼴뫼, 화산(花山), 꽃무덤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북 영천의 꽃뫼마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병든 아버지를 수발하던 효성 지극한 아가씨가 머슴에게 몹쓸 짓을 당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듬해 그 자리에서 하얀 꽃이 피어나자 소녀가 살아났다고 믿었던 마을 사람들이 꽃뫼라 부르게 되었다. 순백의 여름 신부를 꿈꿨을 소녀의 꽃뫼를 보면서 또 다른 꽃뫼가 떠올라 울컥 목울대가 막힌다.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꽃뫼, 꽃무덤이 된다. 양지바른 곳에 누군가 돌보지 않아도 계절마다 꽃들이 피고 져서 무덤을 덮었다. 키 작은 양지꽃과 키 큰 개망초가 키 재기 하듯 봉분에 웃자라 꽃내가 진동한다. 꽃은 고인이 자신에게 달아준 훈장처럼 지지 않는다. 부산에서 멀다는 이유로 일 년에 한두 번 벌초 가는 아버지의 묫자리다. 생전에 꽃과 나무를 좋아하시더니 꽃뫼를 만드셨나 싶다.
무덤은 영혼의 집이다. 고인의 집은 친척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해말끔했다. 할아버지는 애국지사의 집안이라는 자부심으로 마을이나 무덤가에 무궁화를 심고 가꾸며 남다른 애국심을 보이셨다. 어느 해 우리가 성묘하러 갔을 때 할아버지는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금세 꽃뫼가 되는 거여.”라던 말씀은 자주 오가며 살피라는 뜻이었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잘 돌보지 못하였다. 관리하는 손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어디 뫼뿐일까.
생의 시효는 장담할 수 없다. 아버지의 생이 마흔 중반에서 멈추었을 때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절감했다. 사업 실패로 얻은 병으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책임감과 소명을 일순간에 놓아 버렸던 아버지. 남은 우리는 사계절 동안 꽃이 피고 지는 줄 모르고 눈물을 쏟아낸 후 더 이상 아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삶의 속도계를 놓친 아버지의 빈자리가 컸지만, 다시 꽃을 키우며 메워나갔다.
꽃밭에 돌풍이 몰아치고 그치며 고난의 빗금을 그어댔지만, 딸들은 저마다의 향기를 지닌 꽃으로 만개했다. 생전에 네 명이나 되는 딸의 정서를 위해서 아버지는 꽃들을 키우며 “우리 딸들은 언제 피려나.”라며 미소 짓곤 했다. 공부를 잘해서 기특하고 민들레처럼 생활력이 강한 큰딸, 여름 수국처럼 욕심이 많은 둘째인 나, 봉숭아꽃처럼 순하고 야무진 셋째, 코스모스처럼 키가 크고 몸이 약한 넷째. 아버지는 여린 꽃들을 돌보고 바람이 불면 섶을 세워주던 솜씨 좋은 정원사였다.
고인의 45주기였다. 제사상을 물린 후 어머니가 말문을 연다. “너희 아버지가 멀리 있어서 늘 마음이 쓰이더라. 내가 가는 절에 봉안당 두 개를 마련했어.” 어머니가 영면에 들 곳을 채비해 두셨다는 말에 자식들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부산에서 가까운 거리니까 꽃 피는 계절에 마음 편히 놀다 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후(死後)에도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이었고 자식에 대한 배려였다. 누구도 돌보지 않아서 쓸쓸한 꽃뫼가 되고 싶지 않은 본인의 의지이기도 했다.
육 남매가 새집을 보러 간 날은 하늘빛이 더없이 맑았다. 다홍치마를 두른 벽화산 자락이 전각을 감싸고 하얀 도솔궁(영혼의 집)을 물들이는 오후. 언덕 위를 한동안 올려다보던 어머니가 “숨 쉬며 걸어 다니면 이승이고 저곳에 들앉으면 저승이다.”라는 말에 눈이 아렸다. 노거수에서는 매미들의 떼창이 이어졌다. ‘저들도 울어대면 생(生)이요 멎으면 사(死)가 아닌가.’ 울음이 산 자의 몫이라는 매미들의 탄성이 애잔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사람도 미물도 생과 사는 잰걸음으로 닿을 지척에 있다.
집 안으로 어머니가 먼저 발을 들인다. 바깥이 현란한 빛의 세상이라면 안은 빛이 비켜 난 고적한 그늘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이 부처님 좌대 아래 문패처럼 나란히 적혀있다. ‘반평생을 돌아 돌아서 여기서 만나시는구나.’ 먹먹한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담담해 보인다. 태풍에도 스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강건했던 젊은 날 여장부의 모습이 평온하다.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해 둔 여유일까. 아버지는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작별 인사도 없이 목 놓아 통곡하는 이들에게 꽃향기만 남겨두고 길을 떠났다. 언젠가 홀로 쓸쓸했던 아버지의 꽃뫼가 실내로 들어온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터이다.
순탄하게 살다가도 삶의 턱에 걸리는 게 인생이다. 아버지도 턱에 걸려 생을 하직했다. 예고 없이 찾아오고 한번 걸려 넘어지면 일어서기 힘든 것이 턱이고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누구든 휘청거릴 때 힘이 되어주는 말 한마디가 섶이 된다. 끝 모르는 생의 길을 내달리는 것이 삶이라, 속도를 따라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 삶의 턱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늪처럼 빠져들기 일쑤다. 아버지도 솔가리든 고주박이든 넝쿨이라도 지탱해 줄 섶 하나 있었다면, 생의 시간이 짧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서(大暑)가 다가오자, 무궁화원이 더욱 생기가 돈다. 물기운이 수맥을 타고 우듬지까지 단번에 차올라 여름날 활짝 필 생을 부추긴다. 제대로의 생을 살아보겠노라는 의지로 태양을 따라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궁화 잎이 마르기 시작하는 초가을이다. 무궁화 꽃뫼가 활짝 펼친 하얀 꽃잎을 하나씩 접어 오므린다. 사람도 생의 문을 나설 때 순백의 옷으로 갈아입는 의식과 같다. 사람은 영혼에 수의를 입혀 하늘로 바다로 땅으로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을 타지만, 꽃잎은 그런 의식을 필요치 않는다.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 않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생명이 몇이나 될까.
찬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 무궁화동산은 꽃뫼가 된다. 순연한 모습으로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여린 생명을 보면서, 숨이 있을 때 누울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비장함이 겹쳐 보인다. 몸치레를 벗고 세상으로 열린 숨구멍도 서서히 닫는다. 비틀거리지 않고 뚝 떨어진다. 입동이 지난 수목원이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