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끝까지 전설이다 / 김숙영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나 조용했다
빙하가 무너질 때도
산호가 하얗게 죽어갈 때도
아무 말 없이 소멸했다
나는 서늘해진 이야기들을 도려내며
희미해진 손금을 다시 이어보았다
그건 마치
기상이변에서 이변을 떼어내는 일 같았다
숲이 삭제되고
강이 따뜻해지고
새들이 계절을 잃게 만드는
광기의 확산과 질주가
멈추지 않았다
옛날을 끊임없이 살해하고 있는
휘황찬란한 밤이
별이 사라지는 일에
무감각해졌다
겨울이 지나면
봄 아닌 다른 계절의 숨소리가 가득 찼고
그 계절이 짧아지면
또 다른 변종의 마른기침이 찾아왔다
나는 탁해진 공기 안쪽에서 숨을 고르며
내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멀미처럼 세상을 견디는데
뒤돌아보는 이가 없어서,
조금씩 팔다리를 잘라냈다
그런데 내가 사라지지 않았다
되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그리움을 먹고사는
또 다른 내가 더 많이 푸르게 증식했다
이 지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전설이다
연리지
한 줄기 뿌리에서 두 세계가 동시에 흔들린다
한쪽 숲은 푸르게 번져가는데
공장 지대와 맞물린 쪽에선
한숨이 새어 나온다
초록을 달고 있으나
은밀하게 타들어 가는 회색
잎맥 속 유전자가
길을 잃고 헤맨다
햇살은 더 이상
전진도 후진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흘러내린다
도심 속 잘 가꾼 산책로 위를
마른 감정이 걸어 다닌다
썩어가는 한쪽을 방치하면
다른 한쪽도 기필코
괴사할 걸 알기에
숲은 샴 고양이의 기분을 맛본다
고라니, 새, 뱀과 곤충들의
감각 센서가
기시감을 발동한다
사람 아닌 것이
제일 먼저 떠난다
디아스포라가 된다
서로에 연결된 몸이란 얼마나 불편한 축복인가
아니 비극인가
끝과 시작
그 모든 서글픔이 같은 뿌리에서 울고 있다
오블리주(oblige)
나는 바다를 향한 눈물
오늘 아침
물고기 한 마리를 토해냈다
그 작고 빛나는 생명은
나노 플라스틱 입자에
숨이 조인 채
죽어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눈을 뒤집은 채
나는 참회록을 썼다
잘못이 없는데도
잘못이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파리의 추궁은 집요했다
죽어가는 지느러미에서
절망과 진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건 비린내
썩어가는 기분을
바람에 흘려보냈다
배를 가르면
색색의 폐기물들이
무지개처럼 알록달록
채워져 있겠지
그런데 원망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반성은 없을 테니까
일상으로 돌아서면 그만이니까
배고픈 물고기들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듣던 사람조차
마침내 귀를 닫았으니까
아, 그리운 오블리주
익명의 눈물들이 점점 더 번식하고 있다
‘제5회 시산맥기후환경문학상’ 김숙영, 윤석호 시인 공동 선정
‘제5회 시산맥기후환경문학상’에는 김숙영, 윤석호 시인이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나는 끝까지 전설이다’ 외 2편, ‘턴 피시’ 외 2편이며 상금은 각각 300만원. 계간 시산맥은 제5회 시산맥기후환경문학상에 김숙영, 윤석호 시인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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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턴피시* / 윤석호
멸치만큼 작아요 심해에 삽니다
밤마다 불을 켜고 수면으로 올라와 바다를 청소해요
생태계를 떠받치며 지구를 지키는 것이
집채만 한 고래인 줄 아셨죠
캄캄한 밤에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갑니다
불을 깜박이며 도시의 살비듬을 쓸어 담고 버려진
탄소 덩어리를 심해로 옮겨요
낮에도 방은 심해처럼 어둡습니다
포식자를 피하기엔 적당하죠 생존 연습을 하듯 야광
조끼를 꺼내 충전하고 밝기를 맞춰 놓습니다
‘나 여기 있어요’
물가가 오르자 수온이 따라 올랐어요
갈수록 랜턴피시가 숨쉬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맞춰 놓지도 않은 알람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예보도 없이 폭우가 쏟아져요
시계가 뭘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빗물이 들이닥칠까 봐 다시 잠 못 들 때가 많습니다
탄소중립은 마음 편한 영세중립 같아요
친한 사람도 별로 없고 몰려다닐 일이 없으니까
저도 관계 중립입니다 좀 단조로운데, 시끄럽게 살면
탄소가 금방 쌓여요 포집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바다 눈**이 하얗게 내립니다
누군가 바닥에 모여 불을 밝힙니다
어둠을 견디며 바다를 보살피는 것이
멸치만 한 꼬마 물고기인 줄 모르셨죠
* 랜턴피시는 심해에서 사는 작은 물고기로 밤에 수면으로 올라와 먹이를 먹고 심해로 돌아가 배설함으로써 지구의 탄소 조절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 해수면에 사는 생물들의 사체나 배설물이 심해에 눈처럼 내리는 걸 말한다. 심해 생물들에겐 중요한 먹이가 된다.
창백한 푸른 점*
떠밀어 보내고 그를 잊었습니다
딱 한 번 뒤돌아보더군요
0.12 픽셀의 푸르고도 창백한 점 하나가
그의 눈에 보였습니다
우주가 둥글면 그가 다시 돌아올 텐데
우린 계속 푸를 수 있을까요
어릴 때 어떤 밤이었어요
많이 아팠죠 열이 펄펄 났습니다
어머니가 얼음물로 닦고 부채로 부치니까
금방 열이 내렸어요
빙하가 녹고 홍수와 태풍이 왜 자주 덮치는지
전 알아요 빙하 속 푸른빛은 해열제일까요
주문을 합니다 먼 마을에 경보가 울립니다
색을 먹이고 재단을 하고 무늬를 박아 넣습니다
아이들이 울고 트럭이 달리고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송센터에서 쪽잠을 자고 어느 문 앞에 던져집니다
잠깐 거울 앞에 섰다가 다시 문밖으로 밀려납니다
먼 나라 바닷가에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0.12 픽셀이 창백해집니다
떠밀어 보내고 잊었습니다
누군가 그를 기억하고 망원경을 켭니다
우주가 둥글면 다시 돌아올 텐데
우린 계속 푸를 수 있을까요
우릴 알아볼 수 있을까요
* 1990년 2월 14일,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약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촬영한 지구의 사진이자 이를 모티브로 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저서 명이다.
사피엔스와의 인터뷰
에어컨과 히터만 있으면 바깥세상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에요 가습기나 공기청정기가 필요하긴 해요
채광이 중요하지만 조명이 알아서 하죠
이중 샤시로 단절을 강화하고 합금 문으로 괜한 소통을
막았어요 무거운 생수통 들여놓는 게 제일 힘들어요
작황이나 어획량이 안 좋다는 말을 들으면 미리 택배
주문해 놓습니다 물가가 너무 오르는데 탄소세 도입은
말도 안 되죠 폭염 오기 전에 냉장고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귀찮을 땐 배달 음식 시키는데 일회용품 치우는 것도 일이에요
산불 뉴스를 자주 봅니다 우린 다행이다 싶어요 고층이라
집중호우 걱정도 없고 교통대란 나도 재택근무니까 괜찮아요
친구들은 늘 SNS에 죽치고 있어서 금방 연락됩니다
아파트가 지겨우면 가성비 좋은 동남아 한번 다녀옵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있으니까, 연예나 유행에 밀리지 않아요
운동할 때만 아래층이 약간 신경 쓰입니다
환경, 중요하죠 특히 아파트 환경이 제일 중요해요
관리비가 좀 비싸지겠지만
이제 뭐가 남았죠?
아, 연애 뭐 그런 거요? 결정사*가 다양해서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에요 스펙은 미리 준비돼 있어요
아직 냉동 보관 생각할 나이는 아니죠
늘 기후 환경을 생각합니다 건강과 직결되니까요
경제도 물론 체크하고요 삼성이나 엔비디아가 잘하고
있으니까 주식도 오르고 안정적인 세상이 지속되겠죠
* 결혼정보회사의 줄임말.
[출처] 제5회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 김숙영, 윤석호|작성자 ksujin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