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숲
김네잎
숲은 굴리기 좋게 뭉쳐져 있었지
다른 방향을 향해 굴려도 숲은 숲
굵은 굴참나무와 여린 떡갈나무 사이로 지나간 바람은
혼자서 걷고 있는 오늘의 날씨를 뭐라고 할까
언젠가부터 내 무릎에서는 동록銅綠 냄새가 나고
외다리로 간헐적으로 두드린 점들이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고 애써 위로한다
지난 계절이 뱉어낸 기척들이 쌓인
산책로를 따라 나는 쇠똥구리처럼
숲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초록은 언제쯤 낯설어질까
나무가 나무를 안고 새를 재우는 시간
골짜기는 얌전한 안개를 기르고
어린 짐승의 가르랑 가르랑 소리는 커지고
이 숲을 다 지나가면
수많은 사람이 되거나 희박한 우리가 될 텐데
사람이 앵무새를 흉내 내도 숲은 숲
나 놀라고 나무가 화들짝 흔들려도
새가 숲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돌아와도
무릎 아래 허공은 놀라지 않으니 숲의 법령은 시詩다
나는 문득 고개를 꺾어 밑둥치 근처에서
직립하는 문장들을 본다
솎아낼 필요 없는 날이미지 속에서
나는 미련 없이 생생한 통점을 버린다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 천년의 시작,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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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네잎 |2016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등단.
2019년 전국계간문예지 작품상 수상.
현 계간지 『열린시학』 편집 차장.
첫댓글 "숲은 굴리기 좋게 뭉쳐져 있었지/ 다른 방향을 향해 굴려도 숲은 숲"
"산책로를 따라 나는 쇠똥구리처럼/ 숲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나무가 나무를 안고 새를 재우는 시간/ 골짜기는 얌전한 안개를 기르고/ 어린 짐승의 가르랑 가르랑 소리는 커지고"
"새가 숲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돌아와도/ 무릎 아래 허공은 놀라지 않으니 숲의 법령은 시詩다/ 나는 문득 고개를 꺾어 밑둥치 근처에서/ 직립하는 문장들을 본다/ 솎아낼 필요 없는 날이미지 속에서/ 나는 미련 없이 생생한 통점을 버린다"
이 시는 숲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성찰이다.
숲은 어떠해야 하며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
"고개를 꺾어 밑둥치 근처"를 보지 않는다면 "직랍하는 문장들"을 볼 수 없다.
그 이전에 "숲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돌아"오는 "새"가 있고, 그 이후에 "미련 없이 생생한 통점을 버"리는 "나"가 있다.
'통점' 이전에 "솎아낼 필요 없는 날이미지"가 있다.
나의 감각과 경험으로 왜곡할 수 없는 대상의 본질이 있다.
쉽지 않지만, 시가 가 닿아야 할 지점이 아닌가.
오늘의 날씨가 혼자 걷고 있는 줄은, 무릎 아래도 허공이 있는 줄은, 그 허공이 튼튼하기까지 한 줄을 이제야 깨치네요
2연1행
생생한 통점을 버려야 초록이 낯설어진다는 뜻일까요?
초록이 낯설어져야 한다?
"초록은 언제쯤 낯설어질까" - 초록은 낯설어질 일이 없다는 의미 아닐까요? 우리가 아무리 다른 숲의 다른 초록을 봐도 낯설지 않듯 원초적으로 초록은 숲의 것이니까 말이죠. "이 숲을 다 지나가"도 "숲은 숲".
"나는 미련없이 생생한 통점을 버린다"는 것은 숲이 가지고 있는 詩性, 곧 "날이미지"에 대한 헌사 아닐까 싶습니다. 숲의 법령이 詩인 장소에서 나의 "통점"보다 더 선행하는 것은 "밑둥치 근처에서/ 직립하는 문장들"인 거죠. '풀'로 형상화해 볼 수도 있는 숲의 문장을 나의 통점 따위로 훼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서.
다시 읽힙니다
2연첫행 안 걸리고 넘어가네요
안 걸리고 넘기니
기형도의 숲과도 일맥하는 느낌입니다
너무 갔나요 ㅎㅎ
날 것
날이미지
익은 이미지
잘 익은 이미지는...
공부가 너무 멉니다요
그래도 시가 있는 저녁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