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말 하나, 길가에서 노란색 프리지아를 파는 할아버지께 산 꽃을 오래 보기 위해 설탕물에 담가두었다는, 노오란 편지지가 너무너무 좋다던 ㅌ을 떠오르게 하는 노란색 노트북으로 글을 쓰게 된다면, 그 첫 글은 경순 씨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말 두울, 이 글을 쓰면서 잠시 고민했지만, 영화 <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리라.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담아두고 정희, 미자, 경순... 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조심 풀어놓는다. 경순 씨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던 이 공간을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주방으로 난 작은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려다본다. 입이 깔깔하여 아무것도 넘어갈 것 같지 않아도 커피는 마셔야겠기에 습관적으로 포트 스위치를 누른다. 찻물 끓는 소리는 “그립다 그리워 애끓는 소리”라던데, 전기로 끓이는 물소리는 그리 절절하지 않다. 경순 씨가 내려다보던 창밖의 세상은 봄날의 어항 속처럼 고요하다. 유영하는 금붕어처럼 차들이 움직이고, 사람들이 걷고 있다. 하늘거리는 수초는 유월의 싱싱한 수액을 밀어 올리는 가로수들이다. 딱, 하는 포트 스위치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가 창문 선반 위에 놓인 유리항아리에 시선이 멈춘다. 유리항아리를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온다. 유리항아리는 연초록 물이끼와 가느다란 뿌리들이 엉겨 오래된 연못 같다. 항아리 목 언저리에 연초록 테두리가 선연하건만, 물은 거의 증발되어 항아리 배 밑에 고여 있을 뿐이다. 퍼뜩 정신이 든다. 가만, 언제 물을 갈아주었더라? 경순 씨가 하던 대로 나도 두어 번 물을 갈아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순 씨가 있을 때였다. 그럼 경순 씨 손길이 거두어진 이후로 이 여린 생명은 바닥을 보이는 물만으로 삶을 견디고 있었단 말인가? 또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하녀>와 <하하하>를 보고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시>를 본다. 홍상수 영화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시>를 먼저 보지 않았을/못했을까? <시>는 이창동의 영화라는 것보다 배우 윤정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더 기대감이 컸다. 윤정희, 남정임, 문희가 제1세대 트로이카로 불렸다지만, 내게 각인된 배우는 윤정희, 그녀밖에 없다. 지금도 흑백사진 속의 그녀를 보면 오드리 헵번이 겹쳐진다. 윤정희를 은막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이미연과 함께 애증의 모녀관계를 그렸던 <눈꽃>에서였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것도 김수현 원작이라는 것이나 한창 물오른 이미연 때문이 아니라 윤정희 때문이었다. 딸과 엄마 사이의 먹먹함을 보면서 나는 또 경순 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때 마음껏 울지 못했던 것이 쌓이고 쌓여 1여년 뒤 몇몇이 함께 본 웨인 왕의 <조이 럭 클럽>에서는 울음이 멈추질 않아 남포동 거리를 꺼이꺼이 울면서 쏘다녀야 했던가.
영화도 보고 맛난 것도 먹자며 경순 씨의 손을 이끌었다. 오랜만에 딸과 단둘이 극장 나들이를 하게 된 경순 씨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지 않으셨다.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 대어보는 경순 씨를 보며 진작 시간을 내지 못한 내 자신을 탓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경순 씨와 나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고, 이따금 그 손에 힘이 쥐어졌다. 경순 씨 앞에서 울지 않으려 혼자 <조이 럭 클럽>을 한 번 더 보기도 했건만 못난 딸은 엄마 손을 잡고 목울음을 삼켜야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경순 씨는 이 영화 얘기를 꺼내곤 하셨다. 여덟 모녀들의 삶에서 경순 씨와 나, 경순 씨와 그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와 수많은 딸들의 삶이 겹쳐졌을 것이다.
윤정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나는 그만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병원 의자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던 양미자가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 벨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가방을 뒤지는 장면이었다. 뒷사람이 전화를 받자 멋쩍은 듯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는 천진한 미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입은 ‘옷’ 때문이었다. 한지에 분홍색 꽃들을 점점이 그려 넣은 듯 화사한 옷이었다. 미자의 해사한 자태를 돋보이게 하던 그 옷은 내가 경순 씨께 마지막으로 사드린 옷이기도 했다. 우연히 들르게 된 ‘김창숙 부띠끄’ 매장에서 경순 씨 마음에 쏙 들만 한 그 옷이 한눈에 들어왔다. 경순 씨는 그 옷을 몇 번이나 입으셨던가? 짧아서 더 서러운 봄날, 경순 씨는 낯빛마저 화안해지는 그 옷을 입고서도 검불처럼 메말라가고, 대학병원 채혈실 대기의자에서 형광등 불빛처럼 파리하게 시들어갔으리라.
경순 씨는 민낯에 티셔츠만 입고 다니는 딸을 내내 안타까워하셨다.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거늘, 여느 집 딸들처럼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은은히 화장품 냄새 묻어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제 고집 한 번 꺾어본 적 있는 딸이었던가. 경순 씨는 몇 번을 망설이고서야 신호를 넣으셨으리라. 말부츠가 유행이라던데... 너도 그런 거 신고 다니면 참 좋을 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매정하게 전화를 끊은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경순 씨는 영화 속 미자처럼 ‘그래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천상 ‘여자’였다. 그러나 팍팍한 삶 속에서 몸빼(일바지)차림에 질끈 묶은 꽁당머리로 그 고운시절을 다 보내야 했다. 자신이 손수 다림질해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모래장난 하는 아이들을 피해 빙 둘러 다니던 잔망스러운 딸이 못내 그리웠기 때문일까? 경순 씨는 레이스 달린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이젠 하늘하늘 원피스를 입어도, 롱코트에 말부츠를 신어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봐 줄 경순 씨가 없다. 그러기에 나는 앞으로도 원피스와 말부츠만은 외면하게 되리라.
꼭 3년 전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네. 3년 전 내가 니 앞에서 그랬잖아. ㅁ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드는 나를 무심히 건너다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윤정희가 맨 처음, 아니 가장 많이 입고 나온 그 옷이... 내가... 울 엄마한테... 똑 같애...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이 자꾸 끊긴다. 왜 예부터 3년상을 치른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더라. 이번 아버지 기일에는 이상하게 맘이 편하더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도 그러시다네. 너도 3년은 그리 꼬박 견뎌야 할 거야. 3년은 지나야 숨이라도 좀 쉴 수 있게 될 거야. 느닷없이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울컥울컥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졌다는 ㅁ의 얼굴은 많이 평안해 보인다. 나도 내 안에 고여 있을 눈물을 다 쏟아내야지만 저리 될 수 있을까? ㅁ은 자신을 가장 굳게 믿어준 분이 아버지라고 한다. 경순 씨는 나를 가장 못미더워한 사람이라 해야 하나? 압력밥솥에 밥 앉히는 법을 큰조카에게는 일러주면서도 내게는 위험하니 손대지 말라 그러셨던 경순 씨이다. 내가 얼마나 겁이 많고 모든 게 어설펐으면 그러셨을까 싶다가도 경순 씨의 그런 태도 때문에 나잇값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간 것은 아닌지 따져 묻고 싶다.
경순 씨 없이 처음 맞는 것들을 대할 때마다 가슴께에 예리한 통증을 느낀다. 막내이모는 벚꽃 필 때 너희 집에 한 번 다니러 가겠다는 경순 씨 음성이 맴돌아 흐드러진 벚꽃을 외면했다고 하셨다. 미자처럼 꽃을 좋아했던 경순 씨 생각에 봄 산을 여린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진달래도, 무더기무더기 핀 철쭉도, 오월의 붉은 카네이션도 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경순 씨가 가장 좋아했던 코스모스 필 계절을 맞을 일이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바쁜 자식들 시간 뺏을까봐 바람 쐬러 가자는 것도 늘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던 경순 씨였다. 하지만 코스모스 한들한들 핀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은 언뜻언뜻 내비치셨다. 코스모스 앞에 수줍게 서 있는 경순 씨 사진을 오래된 휴대전화에 담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어디다 두었더라. 나는 오늘 온 서랍을 헤집어 놓으며 휴대전화를 찾고 또 찾을 것이다.
경순 씨 49재를 지냈던 절은 천성산 자락에 있다. 연꽃 형상 자리에 오롯이 지어진 절집은 고 박종철 열사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박종철 열사 추모식에 참석한 적도 있기에 그와의 인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영가들을 모셔놓은 곳에는 푸르게 산화한 시간들이 흑백사진 속에 머물러 있다. ㅈ선배와 막역했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월천 진강백 화백의 작품들이 절집 곳곳에 남아 있다. 하물며 법당 안의 촛대도 화백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이라는데, 담담한 필치로 그려진 수묵화들이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경순 씨를 절집에 모시고 온 다음날, 아침부터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렸다. 절 뒷산에 뿌려진 경순 씨 뼛가루는 빗물과 함께 땅속으로 잘 스며들었을 것이다. 봄이 되면 파릇파릇 싹이 돋아날 것이고 줄기가 튼실해져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을 것이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씨앗이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맞아 또 다른 생명을 틔울 것이다. 경순 씨는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이 빚은 눈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형상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는 것도, 또 가는 것도 기뻐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ㅈ스님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내게 가만히 말씀하셨다.
경순 씨 없는 첫 생일을 맞은 지 이틀 뒤에 찾게 된 절집은 쏟아지는 봄 햇살 속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꿈속으로 경순 씨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큰 스님은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신다. 부처님 오신 날, 이렇게 눈부신 햇살이 곧 축복이라며 큰 스님은 설법을 시작하셨다. 나는 법당에 앉아 온갖 생명들이 빛나는 오월을 본다. 뒷산에 한번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공양간으로 발길을 옮겨 온 옷에 구정물을 튀겨가며 설거지를 돕는다. 그렇게 몸을 놀려야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청정한 마음의 죽비는 그렇게 스스로 내려치는 것이다. 젊은 행자스님은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떼느라 땀에 흠뻑 젖으셨다. 밥 짓는 냄새가 여러 사람의 가슴을 덥힐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세상을 떠돌면서, 경순 씨 없는 집이지만, 그래도 그리운 것은 그 집에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못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