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박인서
나는 얼마나 믿는가?
‘믿는다’ 라는 어감이 나는 무언가 불완전해 보인다. ‘믿는다’라는 단어에 앞에 나는 ‘어렴풋이’을 붙인다. 이 두 단어가 나는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또 ‘믿는다’의 개념을 ‘어렴풋이 믿는다’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확신’과 ‘믿는다’는 내 생각에 어울리지 않는다. ‘믿는다’는 곧 ‘어렴풋이 믿는다’로 생각하는 나로서는 ‘믿음’은 ‘확신’의 하위 호환이라 생각한다. ‘믿는다’는 아직 ‘확신한다’로 가는 길목일 뿐이다. ‘확실하게 믿는다’ 혹은 ‘확신하는 것과 똑같이 믿는다’ 이 둘의 어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문장을 섞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면 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거짓말.’
‘확신’과 ‘믿음’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나아가는 길은 그 둘을 동일시 여기는 것을 넘어 ‘확신’을 ‘믿음’의 한 경우로 본다. 또한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것은 ‘확신’보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경우는 많고 그 모든 경우를 전부 인정한다. “확신의 믿음”을 분명히 이상으로 내세우지만 성경은 이상적인 인간을 부정하고 역겨운 인간을 인정하기에 성경에서 많이 다루는 믿음의 상은 “확신의 믿음”보다는 “의심의 믿음”에 속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내가 확신과 믿음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묘를 보며 머리속을 두가지 생각이 가득 채웠다. ‘제발 놀래 키지 좀 말아라.’, ‘도대체 뭘로 글을 써야하지?’ 이 영화는 오로지 공포의 표현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따라서 스토리도 메시지도 그를 전달하는 대사와 연출도 없다. 오로지 모든 대사와 상황, 연출이 공포에만 초점이 맞춰줘 있다. 따라서 영화 초반 공포 연출은 정말 재밌게 봤다. 하지만 후반에 갈수록 부실한 스토리와 알맹이 없는 이야기 전개는 실망스러웠고 무엇보다 글에 쓸 만한 주제가 되지 못했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없기에 알맹이가 없다 느껴졌고 알맹이 없는 영화에 어찌 생각할 거리를 던져서 글을 쓸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화 후반.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가기 전 주인공 3인방이 자신들의 목적을 정하며 하는 대화에서 흥미를 느꼈다.
파묘는 어떤 의미에서 신앙을 다룬다. 무당과 풍수지리 자체가 미신이라 부르는 것이고, 작중에서도 이와 관련한 대사들이 나온다. 의뢰인과 그의 관련된 인물들의 첫 감정의 의심이다. ‘묫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의미가 있나?’ 그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의뢰를 맡기는 것뿐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풍수지리와 굿, 귀신과 조상의 노함으로 생기는 불화는 의심이나, 불안의 감정이 아닌 과학이자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종교의 형태를 본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비신자들이 보기에 기독교에서 하는 행위들은 의심이 된다. 매주 드리는 헌금과 죄책감을 유발하는 설교, 소원을 적어 읽은 중보기도와 헌금을 드린 이에게 하는 축복기도는 의심이 될래야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어떤 이유로 이런 종교의식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 의심은 배가 되고 영화 속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불안과 두려움에 떨지도 모른다. 믿지 않는 입장에서 굿과 기도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부 기괴해 보이고 의심되며 불안하고 두려울 것이다. 피를 묻히며 굿을 하던 소리를 지르고 방언을 터트려 가면서 기도를 하던 이런 행위가 의미가 있다 믿지 않는 입장에서는 다 똑 같은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헌금도, 설교도, 중보와 축복의 기도도 전부 의미가 있는 것을 넘어서서 살아가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감사로 헌금을 드리고 설교로 죄책감을 느끼며 회개해야 한다. 무언가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기도해야 하고 중보기도와 축복기도를 요청할 수도 있다. 문제가 생기면 묫자리를 옮기고, 굿을 치는 것은 믿는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입장에서는 의심되고 기괴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음의 정도이다.
최민식이 연기한 풍수사 김상덕, 유해진이 연기한 장의사 고영근, 김고은이 연기한 무당 이화림은 귀신 다루는 일을 직업 삼는 사람으로써 한마디로 믿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믿음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마지막 귀신(정확히는 정령)을 제령을 두고 이 주인공 3인방은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이 대사에서 이 세 인물의 믿음의 정도가 정해진다.
먼저 김상덕의 믿음은 확신의 믿음이다. 그는 지금 이 귀신을 제령하지 못하면 분명 자신들의 인생과 후에 자손들의 인생의 영향이 끼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믿고 주업 삼는 귀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귀신이 자신의 인생과 인류의 인생에 영향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모토 삼는 믿은 좋은 사람의 생각과 동일하다. 자신이 믿는 바에 있어 확신하고 그 확신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실천한다.
반면 고영근의 믿음은 분리의 믿음이자 어렴풋한 믿음이다. 기본적으로 귀신을 다루는 자신의 일과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분리해 믿는다. 그런 의미로 고영근은 작중에서 기독교인으로 소개된다. 일하는 중에는 귀신을 믿고 일상 속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을 분리하여 생각하기에 김상덕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 귀신을 제령을 하던 안 하던 원래 살 던 것처럼 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장의사로 일하면서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말한다. 그에게 귀신의 믿음은 존재는 하지만 자신의 삶과는 분리된 것이다. 즉 어렴풋이 믿는 것.
이화림의 믿음은 감정적인 믿음이다. 귀신을 제령함에 있어서 이화림을 동참하게 한 것은 자신의 제자를 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위기에 처한 제자를 구해야 한다는 감정적인 것이 ‘귀신을 제령하면 제자가 낫는다.’는 믿음으로 귀결된다. 난 교회에서 이를 많이 목격한다. 자신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혹은 주변에 어떤 사람이 힘들어서 감정적으로 피난처를 찾아 교회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감정적인 믿음은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간단한 길이면서도 불완전한 길이다. 감정적인 믿음은 결국 감정이 식으면 믿음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에겐 간증이 그러하다. 여러 사람의 눈물 섞인 간증을 듣노라면 정말 신이 내 곁에 살아 숨쉬는 듯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간증에 대한 모든 생각과 더불어 신앙까지 사라진다. 또한 수련회가 그러하다. 수련회 기간동안 꾸준히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켜 얻어낸 믿음은 수련회가 끝난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고영근의 믿음에 공감이 된다. 분리의 믿음. 그러기에 어렴풋한 믿음. 영화 시간이 새벽이었기 때문에 극장을 나와 걸어오는 길에는 사람도, 차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신호등을 지켰다. 보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지만 빨간불에는 멈추고 초록불에는 움직였다. 이런 나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난 자연스럽게 자전거 전용도로로 걷고 있었다. 그 순간 생각했다. ‘왜 자전거 전용도로라는 규칙은 지키지 않았지?’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분리하고 분리한다. 내 멋대로 ‘이정도는 괜찮고, 이정도는 선을 넘은 거야’하며 선과 악을 분리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씀과 나의 생각을 분리한다. 나의 생각으로 행동을 분리하기 시작했기에 말씀보다 내 자신이 우선되는 것은 당연한 단계이다. 하지만 신앙은 있기에 말씀과 하나님을 놓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분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의 가치와 말씀 속 가치는 둘 다 옳다. 그저 상황에 맞춰 좋은 쪽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 밝아 보인다. 확실한 구분이 있어야 무엇이 빛이고 어둠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입맛대로 좋은 쪽을 선택한 나에게는 모든 것이 빛으로 이해된다. 어디를 돌아봐도 밝아 보이고, 어떤 일을 해도 빛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자신을 알고 있다. 어디를 돌아봐도 어둡고, 어떤 일을 해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나를 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들어낸 휘황찬란하게 항상 빛나는 빛에 눈이 멀어 어둠속에 잠긴다.
그렇게 점점 모든 것이 어렴풋해 진다. 나의 기준도 어렴풋이 사라져가고, 말씀의 기준도 어렴풋이 사라져간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틀리게 된다. 베드로가 보인다. 말씀 앞에서는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소리치고, 삶 속에서는 부인한다. 자신 혼자 만족했겠지. ‘상황을 잘 넘겼어.’ 나도 지금 만족하고 있다. ‘나는 항상 옳아’ 하지만 곧 닭이 울고 고통과 어둠 속 깊이 잠기겠지. 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옳다’라고 말하는 이 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끊을 수가 없다.
그러니 결국 마스터키는 성령 그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