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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for it is the power of God for salvation to everyone who believes,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BUT THE RIGHTEOUS man SHALL LIVE BY FAITH."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것을 알려면 믿음이 먼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For by it the men of old gained approval. 즉, 믿음은 무언가 희망하는 것들이 실제 상태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 성경에는 여러가지 기록되어 있다. 그중 몇가지를 묵상해 본다.
첫째, 베드로가 물위로 걸은 사건으로 마태복음 14장 23절부터 33절에 자세히 나온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다니시며 전도하셨는데 그날도 빈들에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후 이동하시던중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해서 먼저 앞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주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서 홀로 계셨다. 밤 사경(새벽 3시 ~6시)이 되자 제자들은 배로 반대편으로 이동하던 중 거친 풍랑이 일어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 때 주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다. 제자들은 캄캄한 밤 거친 파도 가운데로 누군가가 걸어오자 '유령이다!, it's a ghost!' 라고 외치며 무서워했다. 그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즉시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나니까 두려워 말라! Take courage, it is I. Dont be a fraid! 이 때 베드로는 황당한 말을 한다. 뭐라 말했냐 하면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 하소서' "Lord if it is You, command me to come to You on the water." 그러자 주님은 오라! come! 말씀하셨다. 그러자 진짜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 주님께로 나아갔다. 제자들도 놀랐고 베드로도 놀랐다. 자신이 물위를 걸어 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로의 시선을 잠시 돌려 휘몰아 치는 바람을 바라보자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순간 그의 영적인 상태가 무서워하는 상태로 변하자 베드로는 즉시 물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질렀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he cried out, "Lord, save me!" 그러자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Immediatel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ok him,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그리고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물위로 그를 올리시고 함께 손잡고 걸어서 배위에 오르셨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여기서 우리가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점은 그는 풍랑이 일어 파도가 배를 집어 삼킬 듯한 상황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은 현실의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가운데 계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풍랑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는 것이 믿음이다. 선악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것이다. 왜 인간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현실을 바라보며 걱정가운데 살아갈까? 옛날 미국인 교회를 다닐 때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에게 폭이 1m 두께가 1m 길이가 100m 되는 정사각형의 두꺼운 나무위를 두 발로 걸어서 100미터 이편에서 저편까지 떨어지지 않고 걸어가면 100만원을 준다고 제안하면 누구든 다 걷겠다고 할 것이다. 그까짓것 너무 쉽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균형감각과 두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걸어갈 수 있기에 누구나 100만원을 타겠다고 서로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잠시 바꾸어 그 100미터 나무를 63빌딩 같은 높이의 두개 빌딩위에 연결하여 놓고 그 위로 걸어가라 그러면 100만원을 줄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머리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성공했을 때에 얻을 100만원과 실패해서 추락했을 때 사망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생각만으로 고소 공포증을 느끼고 포기하게 된다.
1937년에 미국에서 켈리포니아에 현수교를 건설한 적이 있었다. 길이 2737m 높이 227m 의 현수교를 건설하다 여러 명이 떨어져 물에 빠져 숨졌다고 한다. 그러자 작업하는 아래에 그물을 쳐서 건설 노동자들이 떨어져도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조치하자 그 후로는 떨어지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적을 이루어냈다. 불가능한 물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더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베드로가 물에 빠져도 주님이 즉시 손을 뻗어 immediately stretch out 하신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결코 물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깡총 깡총 물위를 뛰어 주님 품에 안겼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처럼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름이 수없이 나온다. 그들은 다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을 믿고 행동했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나갔다. 그중에 몇가지만 더 묵상해 보자.
둘째, 내가 알지 못하는 제 3의 인물이 존재함 기억하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다니엘의 친구들인데 외국 땅 바벨론에서도 하나님 경외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바벨론 느브가넷살 왕은 광할한 두라 평지에 자신의 금 신상(크기: 높이 약 30m 너비 3m)을 세우고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였다. 금신상이 다 완성된 후 왕은 낙성예식을 했는데 모든 도지사부터 지방 동장에 이르기까지 관원들은 다 참석하고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궁과 모든 악기소리를 들으면 엎드려 절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만일 이 명령을 어기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태워 죽이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다. 드디어 낙성식날 나팔을 불고 음악이 울리자 모두가 그 우상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청년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상에게 절할 수 없어 그대로 서있었다. 결국 그들은 군병들에 의해 잡혔다. 느브가넷살 왕은 잡힌 세 청년이 훌륭한 인재였다는 사실에 그들을 죽일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한번 기회를 줄터이니 절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고 아무도 그 어떤 신들도 너희들을 구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게 죽지 말라 명했다.
하지만 세 청년은 단호했다. 왕이 그렇게 하실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실 것이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할 것이니 그리 아시라 말씀 드렸다. 그러자 느부갓네살은 분노하여 평소보다 풀무를 7배나 더 뜨겁게 해놓고 세 청년을 풀무가운데 던지라 명했다. 명은 집행되었고 얼마나 뜨거웠던지 세 청년을 던지던 군사들이 불에 탈 정도였다. 세 청년은 결박하여 뜨거운 풀무 가운데 던져졌고 인생은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던 느부갓네살 눈에 분명히 던진 것은 3명이었는데 결박되지도 않은 한 사람이 그 세 청년가운데 이리 저리 다니는 것이 목격 되었다. 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주변 신하들에게 던진 것이 3명 아니더냐 제 자는 누구냐?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 왕을 덮쳤다. 그는 풀무 입구쪽으로 가까이가서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명했다. 그러자 3명이 맹렬히 타는 불을 뚫고 당당히 걸어나왔는데 머리털 하나도 불에 그슬리지 않았고 입고 있던 옷도 빛이 발하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 그러자 느브갓네살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들의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여 그에게 절하지 않은 종들을 구원하셨다. 말했다. 그리고는 조서를 내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함부로 말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 이는 이와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기 때문이라 공포했다. 우리는 인생를 살다 주님을 섬기다 원치 않는 환경에 던져질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제 3의 인물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믿음을 내보이면 그 때에 나타나는 제 3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우리 안에 주 하나님께서 성 삼위 일체로 사시는 데 두려움, 불안함, 불신, 근심걱정은 거할 곳이 없다. 그러한 것들을 안에 들여 원수 마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 날에도 제 3의 인물은 함께 하고 계시다.
한가지만 더 묵상해본다. 기원전 850년 경 북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아람(현재의 시리아)이라는 이웃 나라와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도단이라는 작은 성읍에 살고 있었고 그에게는 게하시라는 종이 그를 섬기고 있었다. 아람왕은 여러가지 묘책을 내며 북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원인을 찾던중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우리가 전략회의 하는 것을 멀리서도 훤하게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성을 대군으로 애워싸고 엘리사 제거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게하시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의 말들과 병거들을 보고 기겁을 한다. 그리고는 엘리사에게 달려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며 공포에 질려 부르짖었다. 그렇게 절망하는 게하시와는 달리 엘리사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여호와여 원컨대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게아시의 영안이 열려 아람군대보다 훨씬 더 많고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인 불 말과 불 병거가 온 산에 가득하고 엘리사를 호위하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 이후 엘리사는 반대의 기도를 올렸다. "여호와여, 아람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옵서" 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워졌고 엘리사는 그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말하며 그들을 북이스라엘 수도인 사마리아 한복판으로 유인했고 거기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그들에게 음식을 먹여 호의를 베풀며 돌려보냈다. 그러자 아람 군대는 부끄럽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기에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영의 세계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로 영안을 열어 보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 인생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수 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승진에 실패하거나 원치 않는 질병에 걸리게 된다거나 경제적으로 힘들다거나 인간관계가 얽히고 섥혀 도져히 견디기 힘들다거나... 무수히 우리의 믿음을 무너트리려는 상황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펼쳐진다. 베드로에게는 거친 풍랑이였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는 풀무불이였고 게하시에게는 아람군대였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들은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믿음의 눈은 내안에 살아계산 성 삼위 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한 승리의 비결임을 인지하여야 한다. 이것은 내가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은 나를 굿이 아니라 베스트로 인도하신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어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져도 그것은 나를 더욱 정금같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기에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심지어 중환자실(ICU)에서 죽어가던 그 순간도 돌이켜 보면 best였다. 승진하지 못해 좌천된것 같음을 느낄 때도 best였다. 하나님께서는 best를 항상 예비해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 역전하여 승리한다.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주님과 함께 부활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임을 명심하고 오늘이라는 삶속에 주와 함께 걷고 뛰고 달리며 승리하여 감사로 제사드리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자. 샬롬!!!

첫댓글 아브라함이 노년에 그의 종에게 자기 아들 이삭을 위한 아내를 얻게 하는 과정은 삶속에 제 3의 존재를 확인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가나안 땅이 아닌 고향에 가서 아들의 아내가 될 여인을 택하라 하나님께서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 것이라며 종을 보낸다. 종은 아브라함과 맹세를 하고 길을 떠났고 주인의 고향 나홀에 도착하여 성밖 우물 곁에 도착해 주께 기도한다. 주여! 순적히 만나게하사 내가 성중에서 물 뜨러 오는 여인에게 물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물을 마시게 하라 하면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라고 대답하게 하시면 하나님이 자기 주인에게 은혜베푸신줄 알겠나이다. 라고 말이다.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리브가가 우물에 도착하게 하셨고 종의 기도처럼 정확하게 답변하고 행하게 하셨다. 2026년 오늘날에도 이러한 제 3의 존재, 하나님의 사자가 믿는 사람들에게는 함께하시고 계시다. 그것을 삶속에서 직접 체험해 본자는 주님과의 첫사랑의 관계가 오랬도록 유지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