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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2일(토) 오전 6시
요한복음 13:31~38
주님이 주신 새 계명
사랑샘교회 <5인 5색 새벽 부흥회> 설교문
4페이지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1페이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갈마동 큰마을 네거리 주변에 있는 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입니다.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있는 사랑샘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존경하는 이승훈 담임목사님과 당회원 장로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승훈 담임 목사님은 깊은 영성과 온유한 인품으로 지방회 내에 동료, 후배 목회자들의 귀감이 되어 주시는 훌륭한 분이십니다. 목사님께서 부임하신 이후로 사랑샘교회가 더욱 새롭게, 날로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 귀한 자리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며느리에게 몹시 꼼꼼히 포장된 소포가 왔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얼른 가위를 찾아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하자, 시어머니가 말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얘야,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거란다.”
며느리는 끈을 자르려는 것을 멈추고 시어머니의 말대로 끙끙거리며 매듭을 풀었습니다. 며느리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가위로 자르면 편할 걸, 별걸 다 나무라셔.”
그때, 시어머니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끈을 잘라버렸으면 쓰레기가 됐을 텐데, 예쁜 끈이니 나중에 다시 써먹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인연도, 관계도 잘라내기보다는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단다.”
여러분은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잘 풀어도 될 것을 섣불리 잘라버려서 소중한 관계를 깨뜨려버린 일은 없으셨나요? 이제부터는 얽히고설킨 매듭들이 있다면 섣불리 잘라내지 마시고, 힘들더라도 실마리를 찾아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자세를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출처: 신만교, 「순례자 영성」(서울: 토비아, 2020), 35쪽.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던 중에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괴로운 마음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제자들이 수군거리자, 예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 사람이라(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떡 조각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는데, 그때가 곧 “밤”이었습니다(30절). 여기서 ‘밤’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밤’은 시간상으로 늦은 시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룟 유다의 어두운 마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돈궤를 맡았던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가룟 유다의 어두운 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가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마음은 마치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
저는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던 베드로의 말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향해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철저히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받으실 때, 베드로도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습니다.
모닥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사람들은 두 번째, 세 번째 “너도 그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번번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급기야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곧 닭이 울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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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연약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제자들과 같은 연약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자기가 경험한 일을 솔직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연말이니 거국적으로 모여 ‘술 주(酒)’ 자(字), ‘주(酒)님’을 섬기자는 거였죠. 어둠에 빠진 저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피어올랐습니다. 약속한 날, 한 상 거하게 주문하려는 친구들을 말리며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했으면 좋겠다.”
친구들은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 주었어요. 예전의 저는 절대 남 앞에서 신앙이나 종교에 관해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한 달 만에 완전히 바뀐 거죠.
그런데 그중 딱 한 사람,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이러는 거예요.
“네 이야기 잘 들었다. 너무 좋은 이야기네. 그런데 우리 다들 모처럼 시간 내어 이렇게 모였으니 딱 한 잔만 하고 가자.”
맞는 말 같았어요. 그러자고 했죠.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밤새 술을 마시고 말았어요. 전도 대상자들이랑 밤새 술판을 벌인 거예요.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간 때가 다음 날 새벽 네 시였어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정말 기분이 참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전 정말 안 되는 놈이에요. 솔직히 저 술 담배 못 끊겠어요. 죄송해요. 그래도 교회는 다닐게요.”
-출처: 김용준, 「미리 보는 기쁨」 (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17); 「생명의 삶 플러스」 (서울: 두란노, 2019년 1월호), p. 57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우리에게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때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두려움’이라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꼴지였다.” 전 경북대 총장인 박찬석 교수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었습니다.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학업도 못 따라가는 아들을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들은 대구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명 중 68등, 결국 꼴찌를 했습니다.
아들이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성적표를 내밀 자신이 없었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낸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적표에서 석차를 1로 고쳐서 아버지께 보여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닙니까? 당시 그의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했습니다. 당연히 돼지는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출처: 김병태, 「하나님의 퍼즐」(브니엘, 201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0월호), 23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때로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대충 둘러대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저와 여러분이 가룟 유다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연약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셨겠어요?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혹시 얽히고설킨 매듭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듯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들지는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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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한 배신을 믿음으로 극복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밖으로 나가자, 예수께서는 남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
이 말씀에 보면, 두 가지 “영광”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영광은 ‘인자가 받으신 영광’입니다. 두 번째 영광은 인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신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인자가 받으신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광은 권력과 명예와 재물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추구하는 영광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실 영광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듯이, 장차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이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됩니다.
31절에서 우리가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일입니다.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많은 열매를 거두는 일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미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장래에 확실히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과거형으로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다벨보크, 「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 솔로몬, 2012, 820쪽; 김은신,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0년 2월호, 222쪽에서 재인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한 배신을 믿음으로 극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할 때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결코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 여러분이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여러분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함부로 관계의 끈을 잘라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아픔이 오히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마치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가룟 유다를 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68명 중 68등을 하고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성적표에 1등이라고 적어 놓았던 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 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에 숨도 안 쉬고 버텨보고,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아들은 달라졌습니다. 항상 그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은 드디어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박 교수가 45세가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순간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손자가 듣는다.”
아버지는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여셨습니다.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들의 나쁜 행동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땐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기다리시며 아버지는 슬그머니 눈을 감아 주셨습니다. 소년은 한때의 실패와 실수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네 가슴을 짠하게 만듭니다.
-출처: 김병태, 「하나님의 퍼즐」(브니엘, 201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0월호), 23쪽에서 재인용.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한 배신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결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내 곁에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만 분명하다면 더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분명한데,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35절).
과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요 13:1). 과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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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의 주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제가 최근에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적었던 저의 영성 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새벽, 성도들과 함께 빌라델비아교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실제로 빌라델비아교회는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성도 수도 적고, 재정도 약하고, 그럴싸한 건물도 가지고 있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빌라델비아교회는 우리 교회와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상가교회입니다. 각층 마다 유흥시설이 들어 있어서 담배 냄새, 술 냄새, 노래방 소음은 기본이고, 교회 옆 칸에 애견유치원이 들어 있어서 예배 시간에 강아지 짖는 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래도 교회가 작다고 사랑까지 작지는 않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행복을 덜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큰 교회에 비교해서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얼마든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인내하고 기다려주고 함께 하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8절)”
주께서는 빌라데비아교회에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던 빌라델비아교회 앞에 주께서는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여기서 “열린 문”은 ‘선교의 기회’, ‘전도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주께서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교회에 선교의 기회, 전도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교회에 빌라델비아교회와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최근에 설교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공유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저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설교하는 일에 자신감도 없고, 무엇보다 영상을 찍어 올릴만한 장비와 인력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일은 무모하게 느껴졌습니다.
주변에서 저의 설교 사역을 격려하며, 설교 영상을 유튜브에 공유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기를 내어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녹화 마이크도 없이 영상을 찍었더니 소리를 알아듣기 어렵게 설교가 녹화되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저렴한 무선 마이크를 하나 구입해 녹화하니 예전보다 음향 문제가 개선되었습니다. 서투른 영상 편집으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서툴고 부족하지만,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대단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최선을 다해 사역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지금은 핸드폰으로 설교를 촬영하고 있지만, 가급 적 빠른 시간에 교회 영상 장비를 구입하는 일입니다. 영상 장비 마련을 위한 300만 원의 재정을 계획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간 성도들과 함께 목표한 금액의 1/3을 모았습니다.
이 일은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우리교회에 선교의 기회가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저희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실 때 이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실 정도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받고 살아갈진대,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고, 오늘도 형제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